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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근대 미술사] 21. 영일만 바다를 사랑한 소년, 수채화가 이경희
[경북·대구 근대 미술사] 21. 영일만 바다를 사랑한 소년, 수채화가 이경희
  • 박경숙 큐레이터, 화가
  • 승인 2020년 10월 06일 18시 19분
  • 지면게재일 2020년 10월 07일 수요일
  • 1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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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고 순수하 예술관 과감하고 속도감 있는 붓질에 담겨
젊은시절의 이경희

2014년 1월, 이경희 선생(이하 이경희)이 화려한 색상의 상의를 입고, 젊은이들이 쓸 법한 세련된 선글라스와 모자를 쓰고 차남 이형봉이 끄는 휠체어를 타고 스타처럼 포항시립미술관에 작품 기증을 위해 방문하였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형봉에 의하면 차 안에는 두어 벌의 화려한 자켓과 다양한 형태의 선글라스 등을 준비하신다 하였다. 이경희는 젊었을 때부터 외출할 때는 항상 세련되고 완벽한 차림으로 외출하였다 한다. 당시, 누구랄 것도 없이 허름한 차림의 사람들이 대부분인지라, 음악회나 기타 유료가 있는 행사에는 행사장의 관계자라 생각하는 사람으로 여겨져 아무 소리 없이 그냥 자유롭게 입장 하였다 한다.

이경희 수채화가

2014년 10월 21일 오전, 포항시장실에서 이경희의 작품 50점을 기증하는 날이었다. 90세를 바라보는 이경희는 휠체어에 자그마한 체구를 의탁하며 이강덕 시장과 나란히 중심 자리에 앉았다. 그는 개구쟁이 소년의 표정과 행동으로 참석한 내빈들을 사로잡아, 진지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한바탕 즐거운 기증식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사뭇 긴장된 분위기에 아랑곳 하지 않고 환한 얼굴로 내빈들과 우렁찬 소리로 분위기를 만들어 나갔다. 또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하여, 허겁지겁 스케치 재료를 갖다 드렸다. “나는 ‘소띠’라요.” 그래서 본인의 호가 현우玄牛라 하면서 소를 그린 스케치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제1회 국전에 특선으로 당선된 “포항의 부두”를 기억하며 그 영광을 잊지 못했는지 반복적으로 스케치한 것을 보여 주셨다. 이처럼 이경희는 스타 기질의 성품으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짜릿한 일상을 즐겼고 멋을 부렸다.
 

1960년대 송도해수욕장에서 가족과 함께

대구에서 태어난 이경희는 독학으로 화가의 길을 걸어왔다. 한학자이신 조부와 서도에 관심이 많았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글씨와 그림에 취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보통학교 졸업 후 일본 도쿄의 상업중학교로 진학 중 해방을 맞이하였다. 이경희는 1957부터~1991년까지 무려 46여 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우리지역에서는 1968년 구룡포(산호다방)에서 “바다전”을 개최했다. 아쉽지만 그때 전시한 관련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는 신혼여행을 송도에서 보냈고, 해마다 아들 삼형제의 방학 기간에는 주말마다 송도 바다에서 보냈다. 이것은 그의 1950년대에서 1970년대의 작품의 풍경이 거의가 영일만 풍경이었다는 점에서 보여 주고 있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상장.

한국의 수채화는 1910년대 일본의 미술학교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화가들에 의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922년 창설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양화 중 상당수의 작품이 수채화였다. 입상한 작가 중 가장 두드러진 지역이 대구였는데, 이것은 대구가 근대기에 한국미술사에서 중심지역임을 증명해 준다. 이경희가 1949년 제1회 국전에 “포항의 부두”로 특선의 영광을 안게 되어 이인성의 재능을 이어 받았다는 명성을 얻기도 했으며 대구가 수채화의 본향이라는 명성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기존 선배들의 수묵화 이미지 풍이 대부분인 수채화풍 분위기에서 표현주의적인 색채와 구도로 한국 수채화사에서 독보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던 점에서 이경희의 명성은 특별한 것이었다. 우리지역으로서는 “포항의 부두”라는 제목으로 작고 외진 영일만 지역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데에 계기가 되어준 셈이다.
 

1960년 포항해욕장.(포항시립미술관 소장)

이경희는 젊은 시절 포항을 제집 드나들 듯이 하였다. 이경희가 포항과의 인연은 김우조(목판화가)와 평소 친분이 있었던 관계로 자연스럽게 포항의 풍물과 풍경을 접할 수 있었다. 일본식 가옥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던 구룡포가 해방전 일본 도쿄 상업학교에서의 기억을 되살려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천혜의 자원이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던 영일만은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그 시절에 원색적이고 이국적인 풍경, 그리고 어민들의 삶의 모습들이 이경희에게는 매력이 넘치는 곳이었을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경희의 영일만의 이미지는 ‘치열한 삶의 현장과 함께 휴양 및 풍요가 한데 어우러진 역동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곳’으로 보았다. 부둣가 배들의 모습은 거친 항해 이후 새로운 충전을 위한 안식처처럼 보이고, 정비를 마친 어선은 파도를 가르며 만선을 위해 다시 힘차게 미끄러져 나아가는 에너지가 넘치는 곳이었다. 이러한 감흥은 표현주의적인 색채와 구도로 어부들의 노동을 속도감 있는 과감하고 시원한 붓질로 그으면서 진솔하고 건강한 삶의 현장을 표현했다. 또한 맑디맑은 포항의 하늘빛과 물빛, 그리고 여기에 주어진 어부들의 삶을 마치 여유로움을 즐기는 요트 배를 타는 느낌을 화면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 세계 여행을 시작하며 원색적이고 더욱 화려한 색감의 작품들을 제작하는 시도가 보여지는 작품이 제작되었다.

1949년 제1회국전특선작 포항의부두.포항시립미술관 소장.

이경희는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물에 대한 사랑은 남다르다. 수채화를 선택하게 된 여러 가지 사연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무색·무미·무취한 순수한 물을 좋아하였다. 어느 곳이든 흐르는 무형의 물이 주는 자유로움과 투명함이 이경희의 예술관을 결정짓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경희의 작품은 현장에서 만들어진다. 그의 수채기법은 형태란 그리 중요한 것이 못된다. 초기작은 대상의 재현에 충실한 자세로 출발하였지만, 점차 밑그림 없이 수채화의 특징을 요약하면서 표현주의적 감성으로 즉흥적인 붓질을 휘둘렀다.

죽도시장, 구룡포해수욕장, 송도해수욕장, 칠포 등 194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의 포항지역을 수채화로 남긴 이경희의 작품들은 우리지역 근대기 미술문화의 정체성을 선명히 보여주고 문화도시로서의 위상을 한층 돋보이게 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그동안 나이 지긋한 연령대의 지역민들은 우리지역은 메마르고 깊이가 없는 문화예술사였다 라고 아무런 반성 없이 내뱉곤 했다. 그러나 과거의 지역 문화예술사의 풍토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이경희의 작품들로 인해서 근대기 문화예술의 깊이가 있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것은 불과 15여 년전 까지만 해도 지역사회는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도의 저조와 알려지지 않는 작가들의 조사연구에 대한 의지가 부족하였고, 또한 알리고자 하는 환경이 주어지지 안 했기에 그 연유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아무튼 이경희의 천진난만한 소년의 감성으로 인해 영일만의 아름다움이 작품에 투영되어 한국 회화사에서 외면받고 있는 수채화를 격상시킨 그의 업적과 작품을 지역민들에게 많이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박경숙(큐레이터, 화가)

박경숙 큐레이터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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