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만든 도구로 오묘한 색채 표현 추상미술계 거목

장석수 인물

우리 지역에서 큐레이터 업무를 수행하면서, 2002년 대구아트엑스포 특별전의 도록에서 장석수가 포항 장기면 출신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동안 영남 화단은 근대자연주의 구상회화 작가들만 다루는 전시회가 대부분이었다는 점에서 늘 아쉬워하고 있었던 터였다. 근대기 영남지역 출신으로서 한국 추상미술의 거목(주경, 유영국, 남관, 손동진, 정점식, 장석수)들이 많이 배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조명하는 굵직한 전시회를 접하기는 쉽지 않았다. 정점식을 제외한 장석수(2003년 대구문화예술회관)와 남관(2012년 수성아트피아, 대백프라자갤러리)전시가 2000년대 초반에 와서야 전시 되었다는 점에서 영남 화단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하무튼 장석수의 추상미술로 인해 영남화단사는 물론 포항미술사를 풍요롭게 더할 수 있음에 기쁨을 느꼈다.

장석수 작업모습.

장석수는 1921년, 장병규(張炳奎)의 3남으로 영일군 지행면(只杏面·현재 장기면) 양포리에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 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그의 부친은 지행면 내에서 제일 가는 재산가였다고 한다. 장석수는 일본 태평양미술학교를 졸업 후 고향인 장기에 잠시 머물다가 대구에 정착해 대륜중·고, 사대부고 등의 중등학교와 대구여자초급대학, 영남대학교 사범대학 회화과로 직장을 옮기면서 작가와 미술교육자로서 대구화단을 이끌었다. 1950년대 말부터는 중앙의 현대미술초대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창작 활동을 보여 주었으나 55세 나이에 뇌종양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장석수 작 합판위 유채.영남대학교박물관 소장

2012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개최했던 ‘영남의 추상미술’전을 추진함에 있어, 장석수의 추상작품 소장처를 알아내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생전, 장석수가 영남대학 재직 당시 대작 2점을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했다는 정보를 어렵게 듣고 미술전문 운송업체와 함께 작품을 운송하러 갔다. 그러나 박물관 측의 관계자분들이 난감해했다.

이유인 즉, 분명히 유물 목록표에는 장석수의 작품이 있긴 한데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한참 후에 누군가가 큰 벽 한쪽 구석에 벽면 크기만큼 합판 두어 장 정도의 가장자리에 캔버스 천이 삐죽이 나와 있는 뒷면을 보고 “이게 뭐지요?”하는 누군가의 말이 들려 왔다. 그 말을 듣고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장석수의 작품 뒷면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남자 2~3명이 주위를 정돈하고 뒷면에서 앞면으로 돌려놓는 순간, 그토록 헤매었던 대작 2점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순간 희열을 느꼈다. 박물관 담당자가 교체될 때마다 추상미술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오래전부터 세워 놓은 큰 이것(장석수의 작품)이 무엇인지 늘 의문을 가져 왔다는 것 이었다.
 

장석수 작.영남대학교박물관 소장.

일찍부터 장석수는 유럽미술과 미국미술의 조류에 이해가 깊었다. 장석수는 1950년대 중반까지는 표현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다가 1950년대 후반 비대상 추상회화로 극적인 전환을 보인 후 1960년대의 전 시기를 앵포르멜(기하학적 추상을 거부하고 미술가의 즉흥적 행위와 격정적 표현을 중시한 전후 유럽의 추상미술)작품으로 예술적 열정을 불태웠다. 장석수의 앵포르멜 회화는 당시 다른 추상작가들과 달리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순수 추상인 동시에 이론적인 정립이 함께 이뤄졌다. 서성록(미술평론가)은 ‘우리나라 추상미술이 20대의 젊은 작가들에 의해 추진된 데 비해 이미 30대 중반을 넘기고 있었던 장석수가 본격적인 추상회화를 제작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

앵포르멜은 양식적인 면에서 분명 서구 모방적인 성격이 강했으나 권위에 대한 도전, 개인의 표현과 창조적 자유의 존중과 같은 개혁적이고 전위적인 움직임이었고, 서구 모더니즘의 본격적인 수용이었다고 평가된다는 한국미술의 흐름에서 견주어 볼 때, 태평양미술학교 수학 후 1950년대를 거쳐, 1960년대의 장석수의 추상화는 우리 현대미술사에서 매우 선구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장석수의 1960년대의 작품은 감정의 표현과 함께 화면의 시각적 효과를 중시하는 쪽으로 작업을 해 나갔다. 붓 대신 직접 제작한 도구를 사용했고, 붓으로 물감을 바른 것이 아니라 화면에 물감을 들어부어 긁고 밀어 붙이고 함으로써, 많은 물감이 서로 섞이면서 오는 격정적이며 오묘한 색채의 분위기로 앵포르멜 미술의 진수를 잘 보여주고 있다.

1970년대에 장석수는 구상적 표현으로 복귀했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지역 출신 권영호는 그의 대학원 논문에서 1970년대에 꽃이나 산을 그릴 적에 화면 전체를 싸고 도는 다소 열락적인 구상작품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인다는 점에서 아마도 그에게 죽음을 가져다 준 뇌종양의 증세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았다. 태평양미술학교 졸업 후의 그의 구상작품들은 실존적이며 깊은 인간애적인 면을 확연히 느낄 수 있는 1950년대의 작품들과 1970년대의 변화된 구상작품에서 동일한 작가의 작품이라 느껴지지 않는다. 초기의 구상작품은 삶의 존재의 가치를 토대로 한 정신적 뼈대를 그린 거라면 1970년대의 작품은 권영호가 말 한대로 작고하기 전 존재의 덧없음을 환상의 색채로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작가의 정신세계는 언제 어디서나 상황과 현실에서 변화무쌍할 수 있는 화풍도 창조자의 예술세계에는 중요하며 작가만이 가질 수 있는 자유이다. 아무튼, 그가 남긴 추상작품들은 한국미술사에서 중요한 작품들이며, 서울지역은 물론, 유럽미술의 흐름을 꿰뚫고 있었다는 점에서 앞서 가는 추상회화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날이 선 평론가로서 활동 또한 영남지역에서의 그의 존재는 크다.



장석수가 오랜 세월을 살았더라면, 포항화단의 변화에도 약간은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현재 추상작업을 고집스럽게 하는 작가는 드물고, 그가 작고한 시점의 1970년대의 포항화단은 열악했고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이 초기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포항화단의 아쉬움에 대해 권영호가 고향 선배인 장석수에 대한 기록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에 우리 지역을 위해 대학원 논문을 장석수로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 영남화단에서는 장석수에 대한 인물과 작품을 연구하는 미술사가들이 있다. 참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이 든다. 시간은 흐른다. 이번 글로 인해 조금이나마 우리 지역민들은 물론 미술가들도 지역 출신 장석수에 대해 좀 더 알려지기를 바란다.

박경숙 큐레이터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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