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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근대미술사] 24. 지역 후학 양성의 대부, 화가 김두호
[경북·대구 근대미술사] 24. 지역 후학 양성의 대부, 화가 김두호
  • 박경숙 큐레이터 화가
  • 승인 2020년 11월 17일 17시 55분
  • 지면게재일 2020년 11월 18일 수요일
  • 1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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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순리 따르며 꾸미지 않고 포용력 있는 예술철학 보여
젊은시절 김두호(서울 화실에서)

6·25전쟁으로 고아가 되어버린 소년 김두호는 1950년대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든 시절에 틈만 나면 재생지로 만든 도화지에 주변 풍경을 그렸다 한다. 아마도 혼자라는 외로움과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인 김두호는 내적인 허한 마음들을 그림으로 풀어내는데 많은 위로가 돼을 것으로 짐작되며, 그림을 그리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1955년 초등학교 6학년 가을, 지역 각 초등학생들이 참여하는 종합 미술전시회가 포항초등학교 강당에서 열렸다.

김두호도 작품을 출품했었다.

이후 포항중학교 입학식 날, 미술교사 서창환 선생(이하 서창환)이 김두호가 누구냐고 신입생 인파 속을 헤매며 찾으셨다 한다. 놀랍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한 소년 김두호는 ‘접니다’ 하고 손을 들었다. 곧바로 미술실로 불려간 김두호는 서창환이 미술반에 들어오라고 권했다. 곧 바로 수긍을 한 김두호는 미술반에 들어갔고, 많은 선배들 앞에서 김두호 소개와 함께 재능이 많고 장래가 보인다 하며 크게 칭찬해 주었다. 또한 너희들이 잘 이끌어주고 돌봐주기 바란다며 당부하기까지 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평생 화가의 길을 걷게 된 김두호는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서창환이 포항초등학교에 개최돼던 종합 미술 전시회에 들러서 김두호의 작품을 눈여겨 보고 화가로서의 재능과 우수성을 감지하셨다 했다.

윤경렬 선생님과 함께

그리고 입학식 날을 기다리셨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했다. 이러한 관심과 사랑이 김두호에게는 화가의 길을 가게 되는 첫 발을 내딛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이후 서창환의 자택으로 놀러도 자주 가는 등 두터운 인연을 맺으며, 외로운 시기에 학창시절을 아름답게 보냈다. 특히 송도 송림 숲과 조선소 주변에 야외 스케치를 자주 갔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올리며, 이 시기가 화가로서의 기본을 다지는데 중요한 체험이었다고 회상했다. 또 한 사람의 고마움을 김두호는 간직한다. 소년 시절에 도움을 받았던 선린애육원 운영자이자 근대문화운동가인 재생 이명석 선생이다. 가끔 수도산에서 야외 풍경을 그리고 있을 때, 이명석 선생이 뒤에 와서 지켜보면서 ‘참 잘 그린다. 열심히 해라’는 칭찬을 아낌없이 해 주신 덕분에 평생을 자신감을 갖고 살아갈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1959년 포항고등학교(2학년까지 다님)시절, 체육 교사가 미술 교사를 겸임하던 환경이었다. 학교 교육이 그러해서 김두호는 미술의 재능을 잊고 지냈다. 고등학교 3학년(경주 문화고등학교) 겨울, 우연히 포항 시내에서 화우인 권영호(서양화가)를 만났다. ‘너 요즘 그림 그리고 있나’라는 친구의 말 한마디가 충격으로 다가왔다. 김두호는 고등학교 3년 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 것을 발견하고, 평생 화가의 길을 걷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미술대학 진학에 관해 아무런 정보도 없던 김두호에게 권영호는 서라벌예술대학을 추천해 주었고, 미술대학 입시에 관한 정보를 어렵게 얻어 주었다. 또한 목탄으로 줄리앙 석고상을 다루는 시범을 김두호에게 보여주기도 해 미술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다해 주었다. 이렇게 준비해 미술대학 실기시험을 치뤘는데, 주변의 친구들이 너무 잘 그려 낙방하는 줄 알고 위축감 속에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합격의 통지를 받게 된다. 그리해 서라벌예술대학 지도교수인 장리석의 예술적 정신을 자양분 삼아 당당하게 서울에서 화가로서 꿈을 펼쳐 나갔다. 대학교 생활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고생했다고 김두호는 회상한다. 포항 친구 하숙집에 얹혀살며 학비와 재료비,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고군 분투 했다. 그러다 교회에서 만난 지인의 도움으로 아동지도 과외교사를 하면서 겨우 생계를 해결해 나갔다. 또한 소년시절 도움을 받았던 브레멘 선교사를 다시 만나게 되면서 학비를 도움 받아 어렵게 졸업을 하게 돼다.

대학 졸업 후, 고향에서 미술교사의 꿈을 꾸었지만, 장리석 교수는 작가의 길을 권유해 서울 서대문 로터리 부근 미술대학 입시생들을 지도하는 학원을 운영하며 작품 생활을 지속해 나갔다. 4년간 무난하게 미술학원을 운영하던 중 우연히 한 업체와 손을 잡고 사업에 협조하다가 사람들 관계 속에서 너무나 큰 상처를 입어 무작정 대구의 畵友인 최병소를 찾아가 기거하게 돼다. 최병소가 운영하는 화실에서 학생을 지도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는 와중에 고향에 모 중학교 미술교사 자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고향 땅에서 미술 교사를 시작하게 돼다.

죽장중학교 근무시절, 학생들과 함께

“나는 어릴 적에 두 가지 꿈이 있었는데 하나는 교사가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큰 행운을 얻은 것 같다. 나름대로 둘 다 이루었다고 보기 때문이다”라는 김두호의 꿈은 결국은 우리 지역 미술문화를 꽃피우기 위한 필연적인 존재였다. 그는 1971년 죽장중학교를 시작으로 대동중·고등학교로 전근해, 명예 퇴직하시기까지 평생을 미술교육에 남다른 열정으로 우리지역 화단을 활성화 시키고 지켰다. 그가 배출한 첫 번째 제자들은 제2의 제자가 배출되도록 사명감을 되새겨 주었고, 또한 그들은 제3의 제자 배출로 이어지면서 오늘날 지역 화단을 있게 했다. 특히 대동중·고등학교 미술반 지도와 후학의 배출은 현재의 화단 활성화에 원동력이 되는 바탕이 돼고, 어려운 그 시절, 다른 중·고교 미술학도들에게도 개인화실까지 내어 주시며 미술학도의 꿈을 갖게 해 주었다.

물소리
나무 1

김두호의 화두는 ‘자연’이다. 또한 ‘기본에 충실할 때 예술적 영감은 풍부 해진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삼라만상 자연물 중에서 특별히 물을 좋아한다. 어릴 적 항상 물과 접하고 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넓은 바다, 조용한 호수, 시냇물. 모두가 포용력이 너무나 크고 무한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여기에서 김두호의 심성과 예술철학을 선명히 엿 볼 수 있다. 세상 모든 것을 가슴으로 생각하고 실천해온 그의 맑은 심성은, 된장 맛 나는 붓 터치에서 자연에 역행하지 않고 순리를 따르며 꾸미지 않고 포용력 있는 맛을 보여 준다.

하절의 계곡

김두호의 향토정신은 후학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고 있다. 포항미술협회 창립과 함께, 7대 지부장을 역임했고, 포항일요화가회에 지도교사로 활동하시면서, 미술문화의 사회화 저변화 하는데에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업적들은 김두호에게는 서창환의 스승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그림이 있었기에 우리 지역을 아름다운 문화예술적 풍경을 그려 내었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따뜻함과 편안함의 에너지를 제공해 주는 전도사로서, 당신이 존재하는 자체가 우리들에게 큰 위안이 되고 있다. 

박경숙 큐레이터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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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현정 기자 nhj@kyongbuk.com

사회 2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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