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으로 만나는 경북의 역사 문화] 2. 포항 내연산 삼용추(ⅱ)
[금석문으로 만나는 경북의 역사 문화] 2. 포항 내연산 삼용추(ⅱ)
  • 진복규 박사·포항중앙고 교사
  • 승인 2021년 04월 07일 18시 38분
  • 지면게재일 2021년 04월 08일 목요일
  •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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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추(延湫)’, 삼십리 계곡물은 용을 품고 흐르네
갈수기 잠룡폭포.

△계곡을 타고 오르다.

지난 2월 28일 친구와 함께 내연산 계곡을 찾았다. 지금까지 다녀본 중에 이번 겨울이 가장 계곡 물이 적었다. 양쪽 산비탈의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고, 엄청난 크기의 바위가 우리를 압도했다. 이따금 만나는 맑게 고인 물은 그야말로 보배로운 거울과 같은 보경(寶鏡) 그대로였다.

보이는 경치마다 감격하여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 찍기에 바빴다. 나타나는 계곡의 여울과 크고 작은 폭포를 헤아리며 알려진 이름이 없으면 생각나는 대로 이름을 지어 불렀다. 계곡 양편에 펼쳐진 경치는 또 어떤가. 겨울이라 활엽수의 나뭇잎이 전혀 없으니 멀리 산세도 본래 모습을 드러내었다. 겨울 금강산만 개골이 아니라 내연산도 개골(皆骨) 그 자체였다. 선인들이 금강산에 빗대어 소금강이라 한 까닭을 알 것 같았다.

고만고만한 폭포를 몇 개 지나고 여러 차례 암벽을 올라 상생폭포에 이르니 길이 막혔다. 할 수 없이 돌아 나와 나무 계단을 올라 다시 계곡으로 내려갔다. 몇 번 폭포를 더 만나고 길에서 보이지 않는 삼보폭포에 다다르니 또 길이 막혀 있었지만 폭포 옆으로 기어올랐다. 또 몇 구비를 돌아 하용추인 잠룡폭포에 이르렀다.

△잠룡은 어디로

잠룡폭포에 이르니 갈수기라 물줄기는 작았지만 기세는 여전했다. 폭포 밑의 못, 이른바 하용추를 자세히 보니 큰 바위가 절벽에서 떨어져 잠겨 있었다. 숨어있던 잠룡이 맞아 죽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다른 폭포와 달리 이 폭포는 등산로에서 훤히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선인들이 잠룡폭포라고 부른 게 아닌가 싶다.

10m가 훨씬 더 되어 보이는 폭포 옆의 절벽을 올라가기로 하고 앞장섰다. 가파른 절벽이기는 해도 곳곳에 요철(凹凸)이 있어 손과 발로 바짝 붙어 기어올랐다. 물이 적어 오를 수 있었지 아마 바위가 미끄러워 못 올랐을 것이다. 다 올라서 보니 계곡의 사방이 모두 까마득한 절벽으로 하늘이 조그맣게 열려 있었다. 낙차가 낮은 무풍폭포가 보이고 옆으로 사람들의 이름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순사 김노경.

△추사의 아버지를 만나다.

관음폭포 앞에서 오른쪽으로 나와 연산폭포로 오르는 길로 향했다. 다리로 올라가는 매우 가파른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서 오른쪽 산 바위 면에 보면, 추사 김정희의 생부인 김노경(金魯敬, 1766~1837)의 이름이 순사(巡使)라는 관직과 같이 크게 새겨져 있다. 순사는 조선시대 각 도의 군무를 살피던 벼슬로 관찰사가 겸직했다. 김노경은 1816년(순조16) 11월에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1818년 12월에 이조참판이 되었다. 2년 남짓 경상감사로 재직할 때, 관내를 순시하다 동남지역의 명승인 이곳을 탐승하러 왔을 것이다. 그 구체적 자취가 바로 이것이다. 살집이 통통하고 단정하면서도 온화한 분위기의 서풍이 드러난다. 오래전 이 글씨를 만났을 때, 추사의 서풍을 찾으려 무척 고심했던 기억이 있다.

실제로 글씨를 마주하여 찬찬히 뜯어보면, 30대 초반 추사의 서풍으로 보이기도 한다. 외직의 아버지를 따라 왔을지도 모른다. 가야산 해인사 대적광전 중건 상량문을 1818년 6월에 33세의 추사가 짓고 써서, 지금도 남아있기에 그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세간에 알려진 추사 글씨와 차이가 현격하고 객관적인 자료나 증거도 없기에 더 이상 확대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30대 초반의 추사가 아버지의 직함을 써야 했다면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이 남는다. 아버지 김노경이 직접 썼을 수도 있다. 누가 쓴 것이든, 김노경이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쓴 글씨를 새기도록 인정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근처에 다른 사람의 이름도 있다. 그쪽 바위를 타고 계곡으로 내려가면 바로 다리 아래 공간이다. 바위 여기저기 이름이 더 있다.
 

연추 바위글씨.

△‘연추’ 바위글씨를 찾다.

연산폭포 쪽 교각 아래, 암벽 끝자락에 큰 바위글씨가 보인다. 바로 연(延)자와 추(湫)자가 비스듬히 위아래로 새겨져 있다. 연자와 추자의 거리가 멀고 글자가 위치한 높이의 차이가 많다. 연자는 얼핏 보면 바를 정(正)자처럼 생겼지만, 맥락을 고려하면 늘일 연자로 추정할 수 있다. 민책받침(廴)이 생략된 전서이다. 여러 서체자전에 나오는 많은 양의 전서로 된 연자를 살펴보았지만, 형태가 완전히 같은 글자는 아직 찾지 못했다. 연추 보다 아래에 있는 용추 바위글씨의 용 룡(龍)자와 동일한 생략법으로 쓴 것으로 짐작한다. 이를테면 길양(吉羊)이란 한자를 전서로 써 놓고 길상(吉祥)으로 읽고 풀이하는 경우처럼, 한자의 변이나 방 부분을 생략하고 쓰는 전서의 용례와 같아 보인다.

그런데 연추가 도대체 무엇인가? 내연용추의 줄임말인가, 아니면 바위 면이 상용추를 맞이한다는 뜻인가. 그게 아니면 길게 늘어져 이어진 용추란 말인가. 암벽이 아래로 계곡물을 맞이하듯이 내려와 있으니 말이 된다. 폭포와 연결된 계곡이 길게 중용추와 하용추로 이어져 있기에 연자를 썼다고 해도 그럴듯하다. 아무려면 어떤가. 내연산 용추를 표현한 것임은 틀림없다.

연자의 뜻을 ‘설문해자’에서 찾아보았다. “연(延)은, 길게 감이다. 살펴보면, 연(蜒)자가 되기도 한다.(延,長行也. 按,字亦作연)”고 하였다. 다시 연(蜒)자를 찾아봤다. “꿈틀꿈틀하는 게, 용이나 뱀이 기어가는 것이다.(蜿蜒,龍蛇爬行.)”라 설명하였다.

길게 계곡으로 내려온 연추.

5. 용트림하며 흐르는 ‘연추’

여기에 새겨진 추자는 중용추(관음폭포) 앞에 있는 세 글자와 완전히 다른 짜임을 하고 있다. 게다가 삼수변의 표현도 생략하지 않고 완전한 형체로 써서 여타의 글씨와 구분된다. 전서를 쓴 솜씨도 더 나아 보인다. 연자는 획수가 적으니 획을 굵게 표현하고, 추자는 곡선과 직선을 조화롭게 구사하였다. 처음 이 글씨를 봤을 때 아래 중용추에 있는 용추 글씨와 서체는 같지만 다른 서풍으로 보였으나 시간을 두고 곰곰이 살펴보니, 거의 같은 서풍으로 보였다.

연추 바위글씨는 조선 중기 이후의 글씨로 짐작된다. 중용추 앞 큰 바위 이면에 새겨진 심능준이라는 전서 인명 글씨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심능준(沈能俊, 1769~1846)은 1810년 7월에 동영(東營)인 경주의 영장으로 부임하여 이듬해 12월 오위장으로 전임(轉任)되었다. 글씨를 비교해 볼 때, 대체로 비슷한 서풍이지만 좀 더 세련된 느낌이 있다.
 

심능준 동영장.

1월부터 3월까지 여덟 차례 내연산 계곡을 올랐다. 혼자서 또는 둘이나 여럿이 올 때마다 날씨와 물빛이 뚜렷하게 달랐다. 수량의 변화는 더욱 심했다. 계절이 바뀌는 때라 산색도 바뀌고 물소리도 커졌지만, 내연산은 우뚝하니 그대로 있고, 용을 품은 삼십리 계곡물은 끊임없이 흐른다. 내연산 계곡의 장대하게 펼쳐진 물길은, 수많은 물굽이와 폭포(용추)를 꿈틀꿈틀거리며 힘차게 용솟음치는 용의 다른 모습이다.

연추는 내연산 삼용추 혹은 내연 용추의 준말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다양한 의미로 볼 수도 있다. 내연산이란 산 이름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30여 리 계곡이 산 안으로 장대하게 흐르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글·사진= 진복규 박사(포항중앙고 교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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