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 입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주도 '큰 특징'
극심한 일제 탄압 속에서도 수천명 '독립 만세' 외쳐
고증 통해 최초 집결지를 '대구 3·1 운동길'로 명명

대구 중구 3·1 만세운동길을 찾은 시민이 90계단을 오르고 있다. 박영제 기자 yj56@kyongbuk.com

대구(大邱)는 대구(大丘), 달구(達丘), 달구벌(達句伐)로 불리는 등 지명 변천사만큼 상징해온 별칭이 많았다. 특히 많은 것을 품고 있는 이야기의 도시이기도 하다.

근대문화유산과 관련된 이야기가 도심 곳곳에 숨 쉬고 있고, 도심 외곽은 신숭겸 장군 유적지 등 역사문화 유적이 포위하듯 늘어서 있다. 긴 역사의 약령시 도시, 6·25 때의 피란도시, 1950년대 후반의 야당 도시, 그 이후의 여당 도시, 보수도시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교육도시, 문화도시, 미인 도시로도 불렸고 특화산업에 빗대어 능금 도시, 섬유 도시로도 불렸다.

대구의 역사성 속에 숨겨진 이야기는 각종 도시개발사업에 밀려 선대들의 삶이 녹아 있는 흔적이 하나둘씩 소리 없이 사라져 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유기체적 조직을 이루고 목표나 삶을 공유하면서 공존했던 마을 고유의 문화와 자산, 역사 등을 기록으로 남긴다. 선대들의 숨결을 되찾아 어제와 내일을 이은 ‘두 발로 투어-대구 이야기’를 시작한다.
 

대구 중구 3·1 만세운동길 90계단 박영제기자 yj56@kyongbuk.com

△일제의 한반도 강점에 저항한 3·1만세운동, 일주일여 뒤 대구에서 울린 ‘독립만세’

계명대 대구동산병원 뒷 편 청라언덕. 청라언덕 입구 교각 아래 벽면에는 3.1운동 당시를 보여주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많은 민중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지금이라도 뛰어가는 모습이 담겼다.

반대편 벽면에는 독립 유공자들의 성함과 선언문이 자리 잡고 있다.

교각 아래를 지나면 대구의 몽마르트로 불리는 청라언덕으로 들어간다.

길을 따라 양쪽으로 선교박물관과 의료 박물관을 만날 수 있고 길을 따라 계산성당 방향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온다.

3·1절 기념행사때 시민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90계단을 걷고 있다. 중구청 제공

청라언덕과 계산성당으로 내려가는 길이 바로 3.1만세 운동길이다.

만세운동길 내리막 부분 벽면에는 당시 모습이 담긴 사진이 전시돼 그날의 역사를 떠올리게 만든다.

3.1운동은 1919년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퍼졌으며 같은해 3월 8일 대구에서도 거사가 일어났다.

대구 3.1운동은 기미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대구출신 이갑성과 지역 기독교계 인사들이 주도했다.

계성학교·신명학교·대구고보·성경학교 등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도 특징이다.

이갑성은 같은해 2월 24일 대구의 지도자들을 만나 거사 3.1운동 계획을 알렸고 대구에서도 궐기하자고 제안했다.

이만집 목사와 김태련 조사 등 기독교 지도자와 계성학교 백남채 교사 등이 중심이 됐다.

구체적인 날짜는 8일이었으며 집결지를 서문큰장(현 섬유회관 건너편) 입구로 정했다.

8일은 장날로 군중이 모이기 적합한 날이었고 기독교 지도자를 중심으로 거사를 함께할 학생과 민중들을 만났다.

이만집 목사는 2일 독립선언문을 받았고 계성학교 아담스관 지하실에서 독립선언문을 등사했다. 다른 한편으로 집에서는 태극기를 만드는 등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일본 경찰은 비상이 걸렸고 검열이 심해져 위기를 맞는 듯 했다.

거사를 앞두고 주동자 일부가 체포돼 구속되는 등 불안감이 커졌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거사 당일 참여하기로 약속한 일부 학생들은 한복을 입교 장꾼인 것처럼 위장, 집결지로 모여들었다.

현재 3.1운동 만세운동길로 불리는 길은 당시 소나무 숲으로 일제 경찰의 눈을 가려줬다.

오후 1시께 대구고보 학생 200여명이 일본 경찰의 저지를 뚫고 집결지에 도착했으며 순식간에 800여명으로 늘어났다.

1시간 뒤 동산의료원 북편 언덕 밑 큰 장터(현 섬유회관 건너편)에 집결한 시위대는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독립선언문을 뿌리며 동산교, 대구경찰서 앞, 경정통(현 종로), 남성정(현 약전골목)을 돌아 중앙파출소를 거쳐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 근처)까지 행진했다.

시위 도중 주변의 상인·농민·노동자 등 다수의 시민이 가세, 시위군중은 10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당황한 일본 경찰은 대구 주둔 헌병들의 협조를 요청, 이들의 무자비한 진압 작전으로 시위대는 해산됐다.

시위를 주도한 이들은 물론 다수의 학생들이 체포돼 헌병대(현 대구병무청)에 구금됐으며 이후 지역 항일 운동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대구 중구 3·1 만세운동길 90계단 야경. 중구청 제공

△역사적 고증을 통해 확인 된 3.1운동길

과거 대구 3.1운동의 시작은 서문시장 인근으로 인식돼 왔다.

‘큰장(서문 밖 시장)’으로 표현되면서 서문시장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변화시키고 지금의 3.1운동길을 지정하게 만든 장본인이 계명대 의과대 학장을 지낸 전재규 전 대신대 총장이다.

전 전 총장은 1999년 계명대 동산병원 개원 100주년 편집위원을 맡으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편집위원으로 다양한 사료를 정리하고 확인 하던 중 대구 3.1운동의 시작 지가 동산 언덕인 것을 확인했다.

옛 지도를 살펴본 결과 서문시장은 당시 연못으로 최초 집결지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큰장이라는 표현이 이런 오해를 만들었고 큰장은 지금 섬유회관에서 달성공원까지 이어질 만큼 범위가 넓었다.

객관적인 자료를 찾기 위해 옛 문헌과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현재의 위치를 입증했다.

큰장 입구가 섬유회관 맞은편으로 대구 3.1운동 선언문 낭독과 첫 만세운동은 당시 큰장 입구 강 씨의 소금 집 달구지 위에서 이뤄졌다.

이 같은 사실은 계성학생 3.1운동 동지회 회장인 여규진 씨가 살아있을 때 직접 현장에 가서 확인시켜줬다.

이를 통해 정확한 장소가 확인됐고 대구의 3.1운동 지도를 만들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대구시는 지난 2003년 거사를 위해 모인 첫 집결지를 ‘대구3.1운동길’로 명명, 행진로가 정확하게 지정됐다.

제95주년 3·1절 기념행사 공연.  중구청 제공

동시에 같은 해 2월 28일 경상감영공원에서 많은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3.1운동을 재현했다.

시민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고 동산병원 박물관 앞에서 ‘대구 3.1운동 길’ 제막식을 열었다.

제막식 후 양손에 태극기를 든 시민들이 3.1운동 당시 만세 시위 행진로를 따라 경상감영공원까지 행진했다.

서문교회와 남산교회에서도 많은 교인들이 중간 합류 지점인 섬유회관 앞으로 모였다.

서성로를 따라 경상감영공원으로 향하면서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지나가는 시민들도 합세, 그날의 모습과 같았다.

전 전 총장은 다른 지역과 달리 대구는 3.1운동 행진로가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고 강조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길이 바뀌고 건물이 들어서면서 단절되는 다른 지역과는 달라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다만 3.1운동길을 확장, 3.1운동 행진로를 명명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표했다.

주소지의 이름을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행진로로 명명만 해도 역사적으로 큰 의기가 있다고 덧붙였다.

3.1운동 행사도 단순히 한 장소에서 모이거나 3.1운동길로 한정하지 말자고 제안했다.

그날 하루만이라도 행진로를 따라 행사를 진행한다면 역사 의식은 물론 그날의 의미를 더욱 더 되새길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김현목 기자
김현목 기자 hmkim@kyongbuk.com

대구 구·군청, 교육청, 스포츠 등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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