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위로, 때로는 치유…약자들을 위한 '마음의 안식처'

대구시 중구 계산오거리에 위치한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대성당(왼쪽)과 대구경북 지역에 처음으로 들어선 개신교 교회 대구제일교회 전경.
대구시 중구 계산오거리에 위치한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대성당(왼쪽)과 대구경북 지역에 처음으로 들어선 개신교 교회 대구제일교회 전경.

△가톨릭의 성지 ‘계산성당’

계산성당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양식의 성당으로도 유명하다. 대구에서 유일한 1900년대 성당 건축물이자 경상도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성당이다. 100년에 달하는 역사적·건축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현재 계산성당 건물에서 첫 미사를 지낸 것은 1902년 12월 3일로 전해진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119년 전 이야기다.

대구 중구 계산오거리에 위치한 천주교대구대교구 주교좌계산대성당.

하지만 실제 본당이 들어선 역사는 이보다 3년 앞선다. 1899년 당시 순수한 한식(韓式)으로 지은 십자형 기와집 성당이 계산동에 들어섰었다. 서양식으로 지어진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과 명동 종현성당, 인천 답동성당 등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세워진 성당이었다. 제7대 조선대목구장 마리장귀스타브 블랑(백규삼) 주교가 대구본당을 신설하고, 초대본당 주임으로 프랑스의 아킬레 바오로 로베르(김보록) 신부가 신자들과 함께 성전과 새 사제관(사랑채)을 짓기 위해 공을 들인 결과물이기도 하다. 1899년 12월 25일에는 축성식을 성대히 열고 성모성당으로 이름을 지었다.

하지만 성당은 봉헌 축성한 후 불과 40일 만인 1900년 2월 4일 오후 8시께 화재가 발생해 전소했다. 당시 김보록 신부는 “화재는 지진 때문에 발생한 것 같다. 지난 2월 4일 오후 8시에 대구에서는 매우 강력한 지진의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제대 위에 세워 둔 촛대가 지진의 진동으로 넘어져 제대 보와 양탄자 등에 불이 옮겨붙은 것”이라고 파리외방전교회에 서한으로 보고했다.

전소한 성당이 현재 계산성당으로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김보록 신부의 노력에 기인한다. 김 신부는 화마를 겪은 지 일주일만인 2월 10일 호소문을 통해 새로운 성전을 재건축하자고 뜻을 모은다. 그는 “천주께서 하시는 일은 놀랍고 두렵고 거룩하신데, 이는 우리의 신덕을 시험하시고 더 큰 은혜를 주시고자 하심인 줄로 받아들이고, 다시 성당을 더욱 잘 짓기로 한 마음으로 협력합시다”고 성도들을 독려했다. 이후 교회 중진의 협력으로 성당 재건계획을 세우고, 설계해 현재의 계산성당이 만들어졌다.

계산성당은 전주 전동성당과 함께 우뚝 솟은 쌍탑이 특징이다.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성당임에도 내부는 평화롭고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성당 내부에는 색유리를 이어 붙이거나 유리에 색을 칠해 무늬나 그림을 나타낸 장식용 판유리 ‘스테인드 글라스’로 꾸며졌는데, 이곳에 새겨진 한복을 입은 사람들은 조선 시대 당시 천주교 박해 때 순교한 성인을 의미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결혼 사진.

계산성당은 고풍스러운 내부와 아름다운 외관 덕분에 유명인사들이 이곳에서 행사를 치르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결혼식이다.

박 전 대통령과 육 여사는 6·25 전쟁이 한창인 1950년 12월 12일 계산성당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 시절에는 전통혼례가 일반적이었으나 격식보다 효율을 더 중요시했던 박 전 대통령은 전란 중이라는 이유로 빠른 결혼식을 택했다.

계산성당을 찾으면 ‘신랑 육영수군과 신부 박정희양’을 떠올려볼 수 있다. 박 전 대통령 결혼식 당시 허억 전 대구시장과 대구사법학교의 스승인 김영기, 육 여사와 박 전 대통령의 만남을 주선한 육군본부 정보과 송재천 소위(육 여사의 외사촌) 등이 하객으로 참여했는데, 주례를 맡은 허억 전 시장이 ‘박정희양과 육영수군’으로 잘못 소개해 식장을 웃음소리로 가득 채운 일화가 있다. ‘한국 근대화의 설계자’인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계성성당에도 한 줄의 역사를 새겼다.
 

△기독교의 성지 ‘제일교회’

제일교회는 대구·경북 지역 최초의 개신교 교회다. 현재 5만여 평(16만여 ㎡)의 아름다운 동산에 우뚝 서 있다.

제일교회 역사에는 첫 씨앗을 뿌린 베어드 목사와 종각 건립에 재산을 바친 이주열 권사, 첫 세례교인 서자명을 빼놓을 수 없다.
 

윌리엄 베어드(W. Baird, 배위량) 목사

부산에 있던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W. Baird, 배위량) 목사는 1893년 4월 22일 팔조령을 넘어 정오께 중구 약령시장 골목에서 전도를 시작했다. 대구제일교회의 출발점으로, 제일교회 창립일이 4월 22일인 이유이기도 하다.

대구에 온 최초의 ‘서양인 전도사’, 베어드 목사는 대구에 발을 내디딘 이후 대구읍성 남문 내 정완식씨 소유의 땅(1380여㎡)을 매입하고, 이를 수리해 사용했다. 제일교회의 첫 예배당으로, 현재 남성로 선교관(대구 남성로 50번지)이 있는 곳이다.
 

제임스 E 에덤스(J. E. Adams, 안의와) 목사

베어드 목사가 서울로 발령을 받자 1897년 11월 처남인 제임스 E 에덤스(J. E. Adams, 안의와)와 그의 부인 넬리딕이 교회를 맡게 됐다. 이후 교인이 급격히 늘면서 1907년 7월 둘째 성전을 신축하게 된다. 이곳은 남문안예배당, 대구읍교회, 남성정교회 등으로 불렸다.

20여 년이 흐른 1933년 최재화 목사(8대)의 주도로 셋째 성전이 지어졌고, 1936년에는 이주열 권사와 교인들의 헌금으로 고딕 양식의 5층 종각이 완성된다. 당시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교회건물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이 시기에 ‘남성정예배당’ 명칭은 대구제일예배당(교회)으로 변경됐다.

이주열 권사는 종각 건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기록된다. 성경학교 졸업 후 여전도회 창립에 많은 힘을 쏟았고, 집사와 총무, 회장, 권찰, 권사 등의 직분을 맡기도 했다.

특히 수성들의 논 열 마지기를 교회에 내놓는 결심을 한다. 한 해 동안 쌀 200∼300가마니가 나올 만큼, 실한 땅이었으나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고 한다.

대구경북 지역에 처음으로 들어선 개신교 교회 대구제일교회.
대구경북 지역에 처음으로 들어선 개신교 교회 대구제일교회.

하지만 1936년 12월 9일 종각 완공을 눈앞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당시 기독 공보에는 ‘대구제일교회 이주열 권사는 종각 건축을 위해 수성들의 논 10마지기를 바쳤다. 종각이 거의 완공되어 가던 중 홀연히 12월 9일 0시 30분에 별세했는데, 향년 63세다’로 기록됐다. 이 권사의 헌신으로 짓게 된 종각은 1937년 초 완공돼 1939년 12월 9일 성전과 함께 봉헌됐다.

기독교의 성지 대구제일교회에서 첫 세례를 받은 교인은 서자명(徐子明, 1860∼1936년) 장로다. 그는 남성로 남쪽 약 10m 거리에 있는 일명 ‘뽕나무 골목’으로 불린 곳에서 애덤스 선교사를 만났고, 서툰 조선말로 전도하는 모습에 감동 받았다고 한다. 또 한 농부가 산에서 나무를 베어 오던 길에 짊어진 나무가 애덤스 선교사의 얼굴을 스쳤고, 애담슨 선교사는 농부에게 길을 막고 전도하다 일이 벌어진 것이라며 용서를 구했다. 서 장로는 이 모습에 감명을 받아 예수를 믿기로 했다고 한다. 그는 보수적인 달성 서씨 집안에서의 반대에도 믿음을 이어가기로 했고, 1898년 12월 대구제일교회의 첫 세례교인이 됐다.

대구제일교회는 현재 분립·개척한 교회가 20여 개에 이를 정도로 세가 커졌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의료선교활동을 벌이는 등 120년이 넘는 교회의 역사와 생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전재용 기자
전재용 기자 jjy8820@kyongbuk.com

경찰서, 군부대, 교통, 환경, 노동 및 시민단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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