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밈없이 소박·고졸한 글씨로 어머니의 큰 사랑을 새기다

승의랑 문중 묘역 전경.

△우연히 만난 승의랑 문중 묘역

지난겨울 연재를 계획하고, 우선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을 답사하기로 했다. 흥해 곡강 주변의 ‘충비순량순절비’를 찾아가기로 하고 차를 몰았다. 흥해에서 곡강으로 들어가는 길의 양쪽 산이 곡강과 어우러져 절경이었다. 포항 가까운 곳에 이런 뛰어난 경치가 있나 감탄하고 보니, 이곳은 유서 깊은 곳이었다. 곡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미질부성이 있던 곳으로, 지금도 자취가 남아 있다.

순절비가 있는 절벽에 이르러 자세히 살펴보고 촬영한 뒤, 강 건넛산을 바라보았다. 그리 높지도 크지도 않은 산이지만 오래된 유적이나 유물이 있을 법하게 보였다. 무턱대고 산을 돌아 동네를 찾았더니, 바로 승의랑 문중 묘역이 있는 곡강재 옆이었다.
 

승의랑 정세홍 묘역. 멀리 승의랑의 양부인 당숙 정문함의 묘가 가장 높은 곳에 있다.

그곳이 포항시 흥해읍 곡강산 자락에 영일정씨 ‘사정공파 승의랑 문중’의 분묘가 모여 있는 묘역이다. 이곳 문중의 실질적인 입향조 정세홍(鄭世弘)의 품계가 승의랑으로 흥해훈도 벼슬을 지냈기에 문중의 이름으로 삼았다. 승의랑(承議郎)은 조선시대 정6품 상계 문신의 품계이며, 훈도(訓導)는 종9품으로 지방 향교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관직이다.

단양 장씨 묘역을 지키는 문인상.

△임란 전후의 오래된 묘비

이 묘역에는 400년에서 500년 가까이 된 묘비가 여럿 있어 그 내용과 가치가 자못 궁금했다. 승의랑(정세홍)의 묘비는 1555년 신령현감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이 비문을 지어 세웠다. 승의랑을 흥해에서 길러 문중을 열도록 산파 역할을 한 이가 있으니, 양모(養母)인 단양 장씨이다. 아들 정세홍이 1540년 직접 비문을 지어 장씨의 묘비를 세웠다. 승의랑의 증손인 형조정랑 정사명(鄭四溟)의 묘비는 흥해군수 홍보(洪靌)의 글로 1626년에 세웠다.

△승의랑 문중의 초석이 된 단양 장씨

먼저 제일 오래된 단양 장씨의 비문을 살펴보자. 비의 제목을 ‘양비장씨지묘(養妣張氏之墓)’라 하였다. 길러주신 어머니 장씨의 무덤이란 뜻인데, 비(妣)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말한다. 이어서 장씨와 남편 정문함(鄭聞咸)의 가계에 대해 기록하였다. 장씨의 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하여 임피현령을 지낸 장한필(張漢弼)이다.

단양 장씨 묘비.

승의랑은 3살 때 후사가 없던 당숙(堂叔)인 정문함에게 입양되었다. 당숙이 당숙모의 친정인 흥해에 살고 있었기에 흥해에 정착했다. 장씨는 양자인 세홍을 세 살 때부터 거두어 길러 장성할 때까지 따뜻한 사랑이 더욱 두터웠다(自三歲收鞠 至于長成 和愛益篤). 장씨는 집안의 재산이 엄청 많고 종복도 넉넉한 데다, 덕이 많고 성품이 자애롭고 온화하였다(張氏 非但家資鉅萬 而僕隷俱足 乃德宇豊閏 性度慈和). 그래서 고을의 가난한 사람들을 친소원근을 가리지 않고 모두 구제하는 것으로 일삼았다(凡隣里鄕黨 貧寒無賴之人 不問親疏遠近 一以兼濟爲事). 1539년 향년 70으로 생을 마쳤다.
 

단양 장씨 묘비 뒷면.

비문의 끝에 가정 19년 경자년(1540) 정월 15일, 고아가 된 장사랑 기장훈도 세홍이 빗돌을 세웠다고 마무리했다.

△어머니의 무덤에 정성을 다한 아들

세 살 때 친가를 떠나 양모에게 길러진 세홍이 새로운 문중을 열게 되는데, 사랑과 정성으로 기르고 어려운 이웃에게 덕을 쌓은 양모 단양 장씨가 그 초석을 든든히 마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어머니의 사랑을 입은 아들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해 비문을 짓고, 비석과 상석과 문인석도 아름답게 꾸몄다. 비문의 글씨는 모두 해서(楷書)로, 꾸밈없이 소박하고 고졸(古拙)하기 이를 데 없다. 거의 500년이 된 글씨라 그 자체로도 의미가 크다.

묘비 받침돌을 자세히 보면 거북 모양인데, 머리와 꼬리가 앞뒤로 있고 귀갑문도 새겼다. 비신과 덮개돌은 하나의 돌을 깎아 만들었다. 구름무늬인지 꽃무늬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조각으로 윗부분을 장식했다. 비신의 양 측면은 꽃잎 모양의 무늬로 잇달아 새겼다. 이 무늬는 이중으로 마련한 상석의 윗돌에도 앞면에 장식되어 있다.
 

단양 장씨 묘역. 묘비와 상석, 문인석.

특이한 것은 비교적 큰 문인석이다. 장씨가 비록 흥해에서 유력한 가문의 딸이며, 시댁도 영천의 명망 있는 사족이라 해도 내명부의 품계도 없는 부인의 무덤에 큰 문인석이 세워진 경우는 드물 것이다. 문인상은 관의 모양으로 보아 조선 중기의 양식으로 보이는데, 조각의 솜씨가 화려하거나 섬세하지는 않다. 그러나 고개를 조금 돌려 무덤을 향해 바라보는 애틋한 눈길은, 어머니를 향한 아들의 효심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눈동자의 방향은 어느 방향에서 보더라도 무덤을 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단양 장씨 묘를 혼자 지키는 문인석. 애틋한 눈길로 어머니의 무덤을 바라보는 듯.

△황준량이 지은 승의랑 묘비

승의랑 정세홍의 묘비는 1555년 당시 신령현감 황준량이 지었다. 먼저 친가와 양가의 가계를 썼는데, 정세홍이 숙부에게 입양되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정세홍이 쓴 어머니 단양 장씨 묘비에서는 당숙에게 입양된 것으로 되어 있어 차이가 있다. 자라서 세 고을(신령, 의성, 기장) 훈도로 학생들을 가르치다 1552년 가을에 학질에 걸려 향년 51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마무리는 4언의 운문인 명문(銘文)으로 하였다. 묘비의 주인공이 훌륭한 군자로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고, 덕을 많이 베풀었으니 후대에 복을 받게 될 것이라 찬양하였다.

황준량은 퇴계선생의 유명한 제자로 문장과 덕행에 두루 뛰어났다. 특히 지방관으로서 뛰어난 치적을 드러내어, 지금까지 행정이나 정치 분야의 본보기 인물로 회자된다.
 

승의랑 정세홍 묘비, 황준량이 비문을 지었다.

비문의 글씨는 전반적으로 해서로 쓰였지만, 이따금 초서로 약자를 표현한 것이 보인다. 넉넉한 짜임의 글꼴과 부드러운 필획으로 자연스럽게 썼는데, 기품이 저절로 드러난다. 서자는 나와 있지 않지만, 혹 비문을 지은이가 쓴 것이 아닐까 기대하는 마음이 있다.

△감동적인 명문(銘文)의 정사명 묘비

비문은 1626년 흥해군수 홍보가 지었다. 홍보는 석주(石洲) 권필(權泌)의 문인으로 문장이 뛰어났다. 광해군 1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직으로 벼슬살이하다 광해군의 실정을 보고 벼슬을 단념하였다. 반정 직후 인조 1년에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을 거쳐 흥해군수로 부임했다. 원주목사 재임 중 인조의 대명 사대외교에 반대하여 난을 일으킨 이인거(李仁居)를 사로잡아 일등공신이 되었고, 인조의 두터운 신임으로 대청외교의 임무를 여러 차례 수행했다. 정승을 빼고 고관대작을 두루 거쳤다. 사후 경헌(景憲)이란 시호를 받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승의랑 정세홍의 증손인 묘비의 주인공 정사명의 가계를 앞세웠다. 재주가 뛰어나 문과에 급제하고 형조정랑으로 중앙의 벼슬을 살다, 지방관으로 나가 용인을 잘 다스려 호조좌랑이 되었다. 다시 외직으로 무장고을을 맡았는데, 병으로 무장 관아에서 향년 3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형 정사유(鄭四維)가 동생의 요절로 행적이 인멸되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군수 홍보에게 비문을 청했다. 비문의 뒷부분에, 찬자 홍보가 흥해군수로 부임했을 때 서로 교유하며 시문을 주고받던 사람이 오직 그뿐이었다고 추억하며, 다음과 같은 명문으로 마무리했다.
 

형조정랑 정사명 묘비. 귀부를 약식으로 조각했고, 이수엔 구름 속의 쌍룡을 새겼다.

“오천에서 나와, 재주가 일시를 풍미했네.
일찍 용문에 뛰어올라(과거급제), 장차 큰일을 하려 했네.
하늘은 어찌 그리 빨리 앗아가는지, 이런 이치는 알 수가 없네.
곡강이 길이 흐르듯, 공의 이름과 함께 하리!”

(系出烏川, 才擅一時. 早躍龍門, 將大有爲. 天何奪速, 此理難知. 曲江長流, 名與同垂.)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사진= 진복규 박사(포항중앙고 교사)
진복규 박사·포항중앙고 교사
조현석 기자 cho@kyongbuk.com

디지털국장입니다. 인터넷신문과 영상뉴스 분야를 맡고 있습니다. 제보 010-5811-4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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