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 가슴 속에 애국심 싹 틔운 대구 독립운동 성지

대구 중구 성내동에 위치한 구 교남 YMCA 회관 전경 박영제 기자 yj56@kyongbuk.com

△3·8 만세운동 주도한 교남YMCA.

“조선인이 조선의 독립을 바라고 만세를 부르는 것이 어떻게 보안법 위반이 되느냐.”

3·8만세운동을 주도한 교남기독교청년회(교남YMCA) 회장 이만집 목사가 일제의 심문과정에서 내뱉은 말이다.

1919년 2월 15일 대구의 지도자층은 3·1만세운동 정보를 최초로 접했다. 중국 상하이 신한청년단에서 특파된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가 교남YMCA 창립지도자 백남채를 만나 대구에서도 3월 1일 봉기할 것을 전달하면서다.

3월 1일 경성과 평양, 원산, 선천 등에서 만세운동이 개시됐고, 3월 4일 세브란스 의전 학생 이용상과 최재화를 통해 독립선언서가 도착하면서 거사 준비가 본격화됐다.

이 목사는 서문 밖 장날인 3월 8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8일은 장날로 군중이 모이기 적합한 날이었고 기독교 지도자를 중심으로 거사를 함께할 학생과 민중들을 만났다.
 

대구 중구 성내동에 위치한 구 교남 YMCA 회관 전경 박영제 기자 yj56@kyongbuk.com

8일 오후 1시께 대구고보 학생 200여 명이 일본 경찰의 저지를 뚫고 집결지에 도착했으며 순식간에 800여 명으로 늘어났다.

1시간 뒤 동산의료원 북편 언덕 밑 큰 장터(현 섬유회관 건너편)에 집결한 시위대는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독립선언문을 뿌리며 동산교, 대구경찰서 앞, 경정통(현 종로), 남성정(현 약전골목)을 돌아 중앙파출소를 거쳐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 근처)까지 행진했다.

시위 도중 주변의 상인·농민·노동자 등 다수의 시민이 가세, 시위군중은 10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일제는 군경을 동원해 시위대 해산에 나섰고 이날만 157명을 체포했다.

대구만세운동은 9일과 10일에도 계속됐다. 12일부터는 경북 의성을 시작으로 경북 전역으로 퍼졌다.

교남YMCA의 창립발기인은 12명이었다. 외국인선교사 3명을 제외한 9명 가운데 이만집을 비롯해 김태련, 김영서, 백남채, 정광순, 권희윤, 이재인 등 7명이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교남YMCA 회관 북측 앞에서 열린 결혼식. 대구 구교남YMCA회관 기록화 조사 보고서.

△대구 개신교의 성지 교남YMCA.

개신교 성지인 남성로 대구제일교회 맞은편에는 대구YMCA의 전신인 교남기독교청년회(YMCA·대구 중구 남성로 24)의 건물이 있다. 이곳 역시 대구 개신교의 성지다.

3·1운동을 전후해 대구의 개신교는 사회변혁의 중심에 서 있었다. 주권을 잃은 후 조선의 젊은이들은 가슴 속에 품었던 민족애의 불씨를 지펴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 중심에는 교남기독교청년회가 있었다.

교남YMCA 회관은 경상도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서울의 3·1만세운동 직후 지방인 대구에서 3·8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했던 독립운동의 성지다.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지도자들이 모이는 공간으로 활용됐고, 이후에는 물산장려운동, 농촌운동, 신간회 운동 등 기독교 민족운동의 거점공간으로 사용돼 대구 근대사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크다.

교남YMCA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각종 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했다. 특히 당시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농촌사업을 체계화하고자 전국 각지에 농민학교를 세우고, 협동조합, 농민회, 야학 등을 조직해 농촌 청년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종군기자가 찍은 항공사진(1950~1953년 추정). 대구 구교남YMCA회관 기록화 조사 보고서.

△약전골목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교남YMCA 회관은 대구 약령시에 있다. 약령시는 1658년 전국 한약재 수집을 위해 개설한 한약재 유통전문시장으로 715m 거리에 한약방들이 밀집된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 자금조달과 연락 거점이 되어 탄압을 받다가 1941년 폐쇄됐다가 광복 이후 다시 열렸다. 약령시 자체가 독립운동과 깊은 관계가 있는 셈이다.

교남YMCA 회관은 약전골목에서도 가장 오래된 근대건축물이다. 미국 북장로교 대구선교지회(선교사 블레어)가 1914년 청년전도를 위해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지상 2층 규모의 붉은 벽돌 건물로, 가로 약 11.26m, 세로 약 9.39m, 높이 8.3m이며, 건축면적은 129.1㎡(48평)이다.

1층과 2층 사이는 돌림띠로 장식하고 창 상부는 아치, 하부는 받침대 장식을 하고 사각창문을 설치하는 등 동·서양 양식이 결합된 1910~1920년대 근대건축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1938년 조선약업주식회사로 매매되기전에 촬영한 교남 YMCA 지도자들. 대구 구교남YMCA회관 기록화 조사 보고서.

그러나 1938년에 ‘조선약업 주식회사’에 매각된 뒤 1955년 ‘한국흥업은행’에 경매됐다. 이후 1968년에 외과의원으로, 1973년엔 정형외과 입원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2008년에는 ‘현대백화점 대구점’이 들어서면서 해당 부지를 매입한 토지주가 도시형생활주택을 짓기 위해 2015년 건축허가를 신청하면서 철거될 위기에 처한다.
 

교남YMCA 개관식 당시 내부 모습. 중구청 제공.

△철거위기 놓인 독립운동 근거지…민관이 나섰다.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민관이 함께 나섰다.

대구 중구청은 건물의 역사적 의미와 건축적 가치를 인정하고 보존하기 위해 재단법인 YMCA 유지재단과 함께 교남YMCA 회관을 2011년 12월 16일 모두 매입했다.

대구YMCA는 자체 예산 2억 원과 시민모금 3억 원 등 5억 원을 모아 2013년초 옛 교남YMCA회관을 인수했다. 중구청은 27억7000만 원으로 한옥과 정형외과의원 건물을 매입했다.
 

교남YMCA 개관식 당시 내부 모습. 중구청 제공.

현재는 대구YMCA가 교남YMCA건물을 YMCA 100주년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중구청은 한옥 자리에 새 건물을 신축해 리모델링한 정형외과의원과 연결해 약령시의 정통과 한방을 하나의 공간에서 즐길 수 있는 에코 한방 웰빙체험관(2014년 8월)을 조성했다.

교남YMCA 건물 외부에는 대구 3·1만세운동기념관 현판과 대구 옛 교남YMCA회관 안내표지판, 신간회 대구지회 비서, 경북서원 간판 등이 걸려 있다. 1층에는 3·1운동의거 대구조직연락도와 대구시위도, 경북도와 경남도의 3.1운동 궐기도, 김용해 비석내용, 독립선언문, 대구복심법원 판결문, 고등경찰요서 등이 전시돼 있다. 1914년 건축 당시 모습으로 복원된 2층에는 교남YMCA출신 독립운동 유공자인 17명과 3명의 선교사 흉상과 활동경력이 소개돼 있다.
 

대구 중구 성내동에 위치한 구 교남 YMCA 회관 전경 박영제 기자 yj56@kyongbuk.com

1927년 설립한 대구의 대표적인 항일단체 신간회가 이곳에서 활동했고, 비밀리에 청년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장소로 사용됐다. 특히 청년들을 계몽하고 독려하기 위한 웅변대회, 법률 강습회, 강연회, 각종 토론회 등을 개최했다.

훗날 교남 YMCA의 주요 임원과 회원 17명은 건국훈장 애국장 및 독립유공자 훈장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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