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랏빚 1300만원 갚기에 팔 걷은 대구 제일의 거상
대구 중구 계산동 근대문화골목. 근대문화체험관인 계산예가 옆에는 민족 저항 시인 이상화 선생의 고택이 있고, 이상화 고택 맞은편에는 애국지사 서상돈 고택이 있다. ‘국채보상운동의 거장, 서상돈 고택’이라는 제목의 안내판에는 대구를 중심으로 일제로부터 국권을 찾고자 나랏빚을 갚자는 모금활동인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에 섰던 서상돈의 삶의 터전이고, 그의 애국심을 보여주는 유서 깊은 곳이라는 설명이 새겨져 있다.
이른 아침부터 초등학생들이 체험학습을 위해 찾기도 하고, 고풍스러운 ‘셀카’를 찍기 위한 2030 세대의 발걸음도 이어졌다.
근대 개량한옥의 모습을 지닌 이 고택은 단출하기 짝이 없다. 18살 무렵에 김수환 추기경의 외할아버지인 서용서 대구 천주교회 원로회장 등의 도움을 받아 보부상을 시작한 이래 1885년(고종 22년) 35살의 나이에 수 많은 보부상을 거느리면서 한해 3만 석의 수확을 거둬들인 유력한 경제인이자 대상(大商)의 집이었다는 사실과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서상돈 고택은 계산성당과도 맞닿아있는데,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천주교의 도움을 받아 맨손에서 시작해 큰 부자가 된 민족자산가다. 1850년 10월 17일 김천시 지좌동에서 태어난 그는 9살의 나이에 부친을 여의자 어머니, 동생과 함께 대구 세방골의 죽전으로 이사했고, 1866년 16살에 큰 아버지와 삼촌의 고난과 순교를 목격하고 큰 부자가 돼도 전교와 구제·자선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1885년 로베르 신부가 칠곡 신나무골의 교우촌으로 옮겨오자 그를 도와 천주교 활동에 참여했다. 44살의 나이에 통정대부의 대우로 탁지부 세무시찰관(일병 봉세관)에 임명돼 경상도의 세정을 총괄하면서도 대구읍내 대어벌의 임시성당과 지금의 계산동 성당 터에 기와집으로 된 십자형 성당을 만드는 데 거액을 헌납했고, 대구달서여학교 설립을 적극 지원하거나 민권수호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1913년 6월 30일 새벽 2시 61세의 일기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을 마친 서상돈 애국지사는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1997년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 국민이 결혼반지와 돌 반지 등의 귀금속을 국가에 기부해 부채상환 기금을 마련한 ‘금 모으기 운동’은 공동체 연대의식의 대표적 사례로서 전 세계인에게 큰 감동을 줬다.
IMF 외환위기 때보다 100년을 거슬러 올라가 1907년에 대구에서 시작된 한국 최초의 국민적 기부운동·금연운동·근대적 여성 운동이자 한국 근대 시민 민족주의 운동, 한국 근대 경제 주권 수호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이 뿌리다.
나랏빚 1300만 원에서 시작됐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완전 경제 식민지화를 위해 1905년 6월 일본인 메가다를 재정 고문에 임명했다. 메가다는 대한제국의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명목으로 차관공략을 추진해 1300만 원의 빚더미로 몰아넣었다. 관세나 국고금을 담보로 하면서 연 6% 이상의 고금리였다. 당시 공무원인 주사의 봉급이 15원, 신문 한 달 구독료가 30전 정도임을 고려하면 매우 큰 금액인데, 1906년도 대한제국의 1년 예산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지금 금액으로 환산하면 3300억 원 정도로 추산된다.
서상돈 애국지사는 “2000만 동포가 담배를 석 달만 끊고 그 대금으로 국채를 보상하자”면서 거금인 800원을 내겠다고 했고, 그 자리에 있던 회원들도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김광제 애국지사는 당장 시작하자면서 석달 동안의 담뱃값 60전과 별도로 10원을 내자, 많은 사람이 의연금으로 당장 2000여 원을 갹출했다.
김광재·서상돈 애국지사 등은 국채보상 취지문을 작성해 전국에 반포하면서 전 국민의 동참을 호소했고, 1907년 2월 16일 자 제국신문에 보도되면서 큰 충격을 줬다. 국채보상운동이 들불처럼 번져 나가는 계기가 된 셈이다.
1907년 2월 21일에는 대구북문밖 북후정에서 국채보상운동 대구군민대회를 열었는데, 젊은이, 노인 등 모든 신사들, 젊거나 나이 든 모든 부녀들, 술 파는 노파들, 불구의 거지 아이들, 푸줏간 정육상들, 책을 낀 어린이들과 제기 차는 아이들까지 모두 분노하며 의연금을 냈다.
서울에서는 국채보상기성회가 설치돼 운동을 전국화·조직화 했고, 기탁되는 의연금을 보관하고 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통합기관이 필요하다는 여론에 따라 동년 4월 8일 대한매일신보사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설치했다.
애국 운동이 고조될 즈음에 고종황제가 단연에 참가함으로써 이 운동은 범국민운동으로 승화한 데 이어 해외 한인들에게도 전파됐다. 특히 대구 남일동에 사는 부인 7명이 폐물을 바침으로써 전국여성국채보상운동의 선구가 됐는데, 역사의 뒷면에 있던 여성들이 나라의 위기에 당면해 역사의 전면에 뛰쳐나온 한국 근대 여성운동의 시작이기도 했다.
1907년부터 3년 동안 이어진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1300만 원의 국채를 갚아 경제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중단됐지만, 신분·계급·성별·연령·국적을 초월했다. 이때 결집한 힘과 애국정신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과 1920년대의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같은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끊임없이 지속할 수 있었던 민족의 저력이 됐다.
1907년 2월 21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국채보상운동 취지문에는 이런 내용이 담겼다. “지금 국채 1300만 원이 있으니 이것은 우리 대한의 존망이 달린 일이라 할 것입니다. 이를 갚으면 보존되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은 필연적 추세일 것입니다. 지금 국고로는 갚기가 어려운 형편인즉 장차 삼천리 강토는 우리나라의 소유도, 우리 국민의 소유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2000만 동포가 석 달만 담배를 끊어 한 사람이 한 달에 20전씩만 대금을 모은다면 거의 1300만 원이 될 것이니, 만약 모자란다면 1원, 10원, 100원, 1000원씩 낼 수 있는 사람을 골라 출연시키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감히 이를 발기하고 그 취지문을 붙이면서 피눈물로 엎드려 호소합니다. 대한 신민의 여러분들은 보시는 대로 말로 혹은 글로 서로 전하고 알려서 한 사람도 모르는 이가 없게 하여 기필코 실시함으로써 위로는 성상(聖上)께 보답하고 아래로는 우리 강토를 보존하게 된다면 이 이상 더 다행한 일이 없겠나이다.”
대구시는 대구의 소중한 자산이자 세계의 유산으로서 대한민국 최초의 시민운동이자 여성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10월 8일이었던 대구시민의 날을 지난해부터 2월 21일로 바꾸기도 했다. 달구벌대종이 있는 대구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과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서는 김광제·서상돈 애국지사의 헌신을 비롯해 국채보상운동의 전 과정을 직접 눈으로 보고 배울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