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닿는 곳 눈길 가는 곳마다 옛 선조 지혜·정신 깃들어 있네
역사와 현대가 잘 어우러져 있어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마을이 있다.
포항 북구 기계면 봉계리다.
봉좌산(鳳座山·626m) 자락에 위치해 있는 봉계리는 침엽수림지인 덕계숲 등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하며 곳곳에는 마을을 지키고자 했던 옛 선조들의 지혜와 정신이 깃들어 있다.
또, 마을에는 자연을 벗 삼아 농촌·도자기·승마·캠핑 등 다양한 체험 활동을 즐길 수 있는 장소가 마련돼 있다.
봉계리는 1리와 2리로 나눠져 있는데 동네마다 유서 깊은 고택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봉계 1리에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 현판이 걸려 있는 ‘분옥정’, 2리에는 파평윤씨 시조인 윤신달(尹莘達)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지은 ‘봉강재’다.
마을 입구에는 ‘봉좌마을’이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봉좌마을은 봉계1·2리, 문성리, 고지1·2리 총 5곳의 주민들이 함께 운영하는 마을 공동체 사업으로 지난 2010년 농림수산부로부터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 대상지로 선정되면서 2015년부터 각종 체험장과 캠핑장 등 운영하는 장소다.
봉좌마을 캠핑장 바로 옆에는 농경철기문화 테마공원이 있다. 공원 내에는 농경철기 문화·체험 교육관이 마련돼 있어 선사시대부터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철기 농기구의 변천사를 잠시나마 엿볼 수 있다.
교육관 뒤편에는 어 자연을 그대로 느끼며 힐링할 수 있는 덕계숲길이 조성돼 있다.
숲길을 지나면 ‘소강(小岡) 김인제’ 선생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김인제 선생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 보는 이들의 궁금증을 유발한다.
그는 일제 감정기 당시 빈곤했던 마을을 개혁해 부촌으로 부흥시켜 지금도 주민들에게 칭송받는 인물이다.
△’농촌 계몽운동의 선구자’ 김인제 선생.
1881년 10월 기계면 봉계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사서심경(四書三經)에 능했다. 장년이 된 김인제는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읽고 일제에 착취당해 희망조차 잃은 마을을 살리기 위해 34살 때인 1914년부터 2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선진지의 민풍과 산업을 견학했다. 마을로 돌아온 김인제는 주민들로부터 존경받는 김성진을 찾아가 마을을 부흥시킬 것을 의논한 뒤 마을에 성행하던 음주·도박 등 나쁜 풍습을 교정하기 위해 교풍회(矯風會)를 조직해 농업개량과 근검절약을 하는 등 마을 개혁에 앞장섰다.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점점 근검절약의 풍토가 마을에 조성되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과 상의를 통해 당시 마을의 주산품인 면을 공동판매하고 공동저축을 하는 등 마을 발전에 이바지했다.
또, 김성진과 함께 주민에게 단책형 묘대, 정조식, 녹비재배, 나락의 건조조제 자급, 비료제조 등을 실시하게 했다. 이로써 각종 농산물의 생산액이 종전에 비해 크게 증가한 것은 물론이고 품질도 매우 향상됐다. 해마다 장족의 발전을 거듭한 결과 근면·자조·협동하는 마을로 되살아났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조선총독부는 전국 보통학교 교과서에 마을 성공사례를 실어 학생들에게 근면·자조·협동정신을 배우도록 했다.
△봉계리 고인돌.
김인제 선생의 공덕비에서 몇 분옥정 방면으로 발자국만 올라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 조금만 오르면 ‘봉계리 고인돌군’이 있다.
청동기시대 유적인 봉계리 고인돌군에는 총 3기의 덮개돌이 있으며 과거 경지정리를 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남덕재’ 서당.
고인돌을 둘러본 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다시 삼거리를 마주하게 된다. 이곳에서 분옥정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좌측에 자연부락인 치동마을이 나오는데 골목길을 따라 100여 m만 걸으면 ’남덕재‘라는 고택이 나온다.
남덕재는 1767년 하곡공 김시원(1709~1779년)과 학파공 김시형(1715~1789년) 형제가 사재를 털어 건립한 서당이다. 형제는 마을에서 효우(孝友)를 지녔다고 불릴 정도로 어릴때부터 효성과 행의가 돈독했다. 또, 성품이 너그럽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에 관심을 가졌으며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오직 학문연구에만 몰두해 후손과 후학을 가르쳤다. 남덕재의 현판은 조선 당대 명필인 형조 판서 홍의호가 쓴 것으로 유명하다.
△말미평 저수지 수변공원.
골목을 나와 벽화길 따라 2~3분 정도 걸으면 우측에 ‘말미평 저수지’가 있다. 저수지 위에는 정자가 설치돼 있었는데 들어가는 입구에 300년이 넘은 버드나무 2그루가 나무가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었다. 여기에 봉좌산에 물든 가을의 정취가 더해져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케 했다.
말지평 저수지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300여 년 전 마을 지나던 한 나그네가 사람들에게 마을 형상이 불이 자주 나는 지형이라고 알려줘 저수지를 만들게 됐다고 한다.
△수려한 자태를 뽐내는 ‘분옥정’.
저수지를 지나 200여m를 올라가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50호로 지정된 분옥정에 도달한다. 용계정사(龍溪精舍)라고도 불리는 분옥정(噴玉亭) 입구에는 400년이 넘은 소나무와 300년이 지난 향나무가 자리 잡고 있어 고풍스러운 멋을 한층 더했다.
정자 옆에 계류가 있는데 흐르는 물이 바위에 부딪혀 튕기는 물방울들이 마치 옥구술 같다고 해서 지어진 ‘분옥정’이란 명성처럼 정자에 들어가자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가 마음을 청량하게 했다. 또, 처마 밑에는 현판이 여럿 걸려 있는데 이중 조선시대 최고의 명필인 추사 김정희와 그의 아버지 김노경의 친필이 있다.
분옥정은 조선 숙종대 성균생원이며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된 돈옹공(遯翁公) 김계영의 덕업을 찬양하기 위해 순조 20년(1820년) 3월에 문중에서 건립했다. 주변 풍경을 고려해 출입을 건물 뒤편으로 하고 앞면은 계류(溪流)를 향하도록 배치하고 있다.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丁(정)자형 평면 목조 기와집으로 이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를 지니고 있다.
수려한 자태를 뽐냈던 분옥정에서 나와 봉계 2리로 발길을 옮겼다.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과 봉강재.
봉계 2리에는 파평 윤씨의 시조 윤신달(尹莘達, 893~973년)의 묘와 그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세운 재실인 봉강재가 있다.
경북일보 기자가 윤신달의 묘를 방문했던 날에는 풍수지리학자와 이를 배우는 학생들이 있었다. 이들에 따르면 윤신달의 묘는 지형적으로 산의 기운이 한 곳에 뭉쳐져 있는 곳인 혈 자리에 위치해 있어 소위 일컫는 ‘명당’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풍수지리를 배우는 이들이 종종 찾는 곳이라 한다.
윤신달은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가 남달리 뛰어났고 장성해서는 고려 왕건의 막료가 돼 고려 건국과 국가기반을 다지는 일에 많은 공을 세웠다.
918년 신숭겸 등과 함께 왕건을 도와 궁예를 추방하고 고려 창건에 공을 세웠으며 후백제의 견훤을 복속시킬 때와 신라 경순왕을 귀순시킬 때에 공이 컸다. 나아가서 견훤의 아들 신검을 토멸해 후삼국(後三國)을 통합하는데 많은 공을 세워 삼국통일 후 건국 공로로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의 서훈(敍勳)과 삼중대광(三中大匡) 및 태사(太師)의 관직이 내렸다.
태조 승하 후 왕위에 오른 혜종이 윤신달을 두려워한 나머지 944년 신라 유민을 다스리는 경주대도독(慶州大都督)으로 내보내는 한편 공의 아들 선문을 인질로 해 개경에서 봉직하게 했다. 본의 아니게 혈육별리(血肉別離)의 고통을 겪게 된다. 30년 재임 기간 중 한 번의 반란도 없이 경주에서 선정을 베풀다가 973년 81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당시 신라유민들은 윤신달의 유덕을 흠모해 이곳, 금닭이 알을 품은 형상의 경주 기계현 벌치동(현 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리) 구봉산 아래에 예장했다.
윤신달의 묘 바로 아래에는 봉강재가 위치해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01호로 지정된 봉강제는 윤신달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1751년에 창건한 재사로서 28세손인 윤광소가 안동부사로 재임 당시 헌금 50량과 목재 15칸분을 헌납해 건립했다. 1762년에는 27세손 윤동도가 경상감사로 재직하며 수축, 1763년 경상감사 윤광안과 안동부사 윤성대에 의해 위토(位土)를 늘리고 재사를 중수하는 등 이후에도 몇 차례 증·개축과 보수를 거치며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