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결 같은 물빛에 투영된 신비로운 자태에 눈이 황홀
지난 3월 30일, 이른 새벽 포항을 출발하여 7시가 다 되어 김해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4년 가까이 해외여행을 할 수 없었던 탓도 있었지만 탑승 수속부터가 허둥대고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게 늙은 모양이다.
모처럼 십여 년 국내외 여러 곳을 함께 트레킹하면서 우애를 다진 맴버들과 3박 4일 일정으로 일본 최고봉 후지산(富士山 3,776m) 둘레길 트레킹에 나섰다. 오랜만에 타는 비행기가 낯설기만 하고 긴장된다. 2시간 남짓 걸리는 일본 도쿄(東京) 나리타(成田)공항까지 가는 하늘길이 무척 새롭게 느껴지고 설레기도 한다. 일본 열도로 접어든 비행기 창밖으로 하얀 눈으로 덮인 고봉준령이 시야에 들어온다. 일본 중앙 알프스, 남알프스 연봉들이다.
이번에 가는 후지산(富士山)은 필자도 처음 가는 일본의 상징으로 손꼽히는 고봉으로 1707년 폭발한 이후 현재까지 휴화산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밑바닥 둘레가 125km에 이르며 기슭에 있는 5개의 자연호수와 1개의 인공호수에 투영되는 후지산의 모습이 아름답기로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산이다. 또한 눈 덮인 원추형 산모양이 일본인들에게는 성스런 곳이며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어 2013년 6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일본 혼슈(本州)의 태평양 연안에 접해있는 산으로 일본 원주민 아이누족이 ‘영원한 삶’이란 이름으로 불렀다고 전하는 볼수록 아름다운 명산임에는 틀림이 없다. 오르기가 어렵고 눈으로 덮여있어 7월에서 9월 사이만 개방되며 정상에 있는 신사(神社)로 소원을 빌러 가는 사람들로 줄을 잇는다고 한다.
이번 트레킹에 참여한 인원이 부부동반 여섯 가족을 포함하여 22명이 함께했다. 지난 2018년 5월 큐슈(九州)올레길 트레킹 이후 5년 만에 간 일본은 그리 변화된 게 없는듯하다. 일본이란 나라는 늘 조용하기는 하지만 뭔가 꿈틀대는 모습이라 속내를 알 수 없다는 느낌이 이번에도 든다. 코로나 이후 다소 기(氣)가 없어 보이지만 그건 필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공항에서 십 여분 거리에 있는 고기뷔페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오늘의 목적지인 야마나시현(山梨縣)에 위치한 시모베호텔(下部 HOTEL)로 향한다.
나리타공항에서 후지산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도쿄 중심부를 관통하여 남서쪽으로 내려가야 하므로 도쿄 시내의 교통 정체를 감안하여 세 시간 반은 족히 걸린다는 가이드 설명에 다소 맥이 빠진다. 세계적인 대도시 도쿄(東京)의 빌딩과 울창한 숲 속을 자나 어렵사리 빠져나가는 차창에서 일본 도시의 속살을 감상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포항을 다시금 떠올려 보기도 한다.
새벽 일찍 출발하느라 잠을 설친 일행들이 버스 안에서 눈을 감고 피로를 풀고 있는 사이 버스는 동경 시내를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시내를 통과하는데 무려 2시간 이상이나 걸린 셈이다. 오후 6시 반이 다된 시각에 시모베(下部)온천호텔에 도착했다. 일정상에는 후지산 대분화로 생성된 8개 아름다운 연못이 있는 마을 ‘오시노핫가이(忍野八海’)에 들러 일본의 옛 고을의 참모습을 살피며 마을 한 바퀴를 돌아보는 일정이었지만 시간이 없어 다음날로 미루고 곧장 숙소로 이동했다. 근로시간 준수가 철저히 지켜지는 일본이라 7시 이후는 버스운행이 안 된다는 가이드 설명에 어쩔 수가 없다.
호텔 앞에는 기차가 다니는 철로가 놓여있고 가까이에 역이 있어 관광객들이 이용하기에 편한 비교적 규모가 큰 8층짜리 호텔인 시모베온천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3박을 줄 곳 한 곳에서 머물기 때문에 짐을 풀었다 싸는 수고를 덜 수 있어 마음이 여유롭다. 일본 전통의 다다미방으로 된 객실에서 온천을 즐기기 위해 ‘유카타(浴衣)’로 갈아입고 온천탕으로 내려간다. 일본 온천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겠지만 유독 깔끔한 걸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취향에 맞게 잘 정돈된 온천탕에서 지루한 하루의 피로를 따뜻한 온천물로 풀어내고 넓은 연회장에 마련된 식사 자리에 일행 모두가 모여든다.
저녁 메뉴는 일본 전통 ‘가이세키요리(會席料理)’가 나왔다. 작은 그릇에 다양한 음식이 순차적으로 나오는 일본의 연회용 코스요리를 일컫는 ‘가이세키요리’가 한상 가득 차려져 있다. 가이드가 먹는 방법을 설명해주고 친절이 몸에 밴 종업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식사를 거든다. 서울 사는 필자의 죽마고우인 김재년 사장이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산 니혼슈(日本酒)로 후지산 둘레길 트레킹의 성공을 기원하는 건배가 몇 순배 돌다 보니 모두가 기분 좋은 일본에서의 첫 저녁을 즐겼다. 저녁을 마치고 1층 로비에서 벌어지는 민속 북춤 공연까지 관람하고 각자 방으로 들어간다. 새벽 일찍부터 서둘러 하늘길과 육로에서 하루 종일 시달렸지만 오랜만에 맛보는 니혼슈 몇 잔에 모든 피로와 아쉬움이 사라지고 이색적인 다다미방 잠자리가 낯설지 않은 일본에서의 첫 밤을 맞았다.
트레킹 2일차(3월 31일) 아침이다.
호텔방 창문을 열어보니 상쾌한 공기가 사뭇 다르다. 나뭇가지에 물이 올라 연한 연두색 물감을 묻힌 나뭇잎이 여기에도 봄이 왔음을 알리고 이른 벚꽃이 달려와 하얀 입술로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오하요 고자이마스! (おはようございます!)”라고 운을 떼는 듯하다. 때맞춰 지나가는 기차 소리로 정겨운 아침 풍경이 그려지며 낯선 이방인을 환영한다.
서둘러 온천장으로 간다. 일본에서는 하루에 세 번(일어나서, 밖에서 돌아와서, 잠자기 전에) 이상 온천욕을 하면 10년이 젊어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고 할 정도이니 따라 해 봄 직하다. 남탕과 여탕이 격일로 바꿔지는 관습은 알고 있어도 한 번 더 확인하고 들어간다. 아침 식사는 간단한 일식 뷔페로 해결하게 되어 있다. 함께 간 내자(內子)가 여기서 만든 ‘낫또(納豆)’와 우유가 유명하다고 일러준다, 대나무 잎으로 싼 낫또에 간장과 겨자를 풀어 거품이 일도록 저어 떠먹는다. 조금 짜긴 해도 먹을 만하다. 쌀죽과 된장국(미소시루) 등으로 속을 풀고 간단히 아침을 마친 다음 본격적인 트레킹 복장으로 8시 40분에 숙소를 나선다. 목적지인 ‘모토스호(本栖湖)’까지는 40여분이 소요된다. 후지산을 둘러싸고 있는 다섯 개의 자연호수 ‘후지 5호(富士五湖)’ 중 전망 좋기로 이름난 모토스호(湖)이다.
후지산 주변에는 모토스(本栖), 쇼우지(精進), 사이(西), 가와구찌(河口), 야마나가(山中)호(湖)등 5개의 자연호수와 1개의 인공호수인 타누키호(田貫湖)가 있어 어디서 바라보아도 후지산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고 있다. 그중 2개의 전망대가 있는 모토스호에서 후지산의 첫 풍광을 보게 되어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날씨가 흐리긴 해도 후지산 전망은 볼 수 있을 것 같다.
9시 20분에 모토스호에 도착하여 잔잔한 호수 위로 우뚝 솟아있는 후지산의 만년설 정상부위를 바라보며 감탄하는 일행들 탄성에 사진이나 영상으로만 보든 후지산 모습을 직관(直觀)하게 됨이 실감 난다.
원추형 형태의 산 모양이 주변을 압도하고 하얀 눈으로 뒤덮인 정상부위가 더욱 신비로운 후지산의 위용이 일본 최고봉으로써 자태가 가히 일본의 상징으로 불릴 만하다. 모토스호의 투명한 물빛이 어우러지면서 환상의 세계가 펼쳐지는 모토스호반에서의 포토존을 떠날 줄 모르는 일행들을 재촉하여 ‘천엔전망대(千円展望臺)’라 불리며 후지산 전망 뷰포인트로 유명한 ‘나카노쿠라도게(中ノ倉峠)’로 향하여 오르막 산행을 시작한다. 안내판에는 전망대까지 680m 거리에 약 30분이 소요된다고 쓰여 있다. 일본돈 천 엔짜리 지폐의 뒷면에 그려져 있는 유명한 그림이 바로 이 ‘나가노쿠라(中ノ倉)전망대’에서 모토스호와 후지산을 바라보며 그린 것이라 ‘천엔전망대’라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오르는 길목에서 뒤돌아 본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호수면과 그 위로 투영되는 후지산 풍광이 아름다움을 더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