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산 둘레길 트레킹은 딱히 정해진 루트를 따라 걷는 게 아니라 넓고 긴 둘레에 있는 ‘후지5호(富士五湖)’ 주변과 후지산 등산로 중 차로 오를 수 있는 5합목(五合目) 주변을 걸어보는 후지산 탐방과 높고 낮은 전망대를 오르내리며 풍광을 조망하며 대자연과 함께하는 즐거움으로 힐링의 시간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후지산 기슭에 있는 일본의 옛 정취를 살린 전통마을과 울창한 삼나무 숲길, 아름다운 폭포가 있는 계곡을 둘러보는 등 일본 특유의 자연과 문화를 교감할 수 있는 다양한 코스로 이루어진 트레킹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는 ‘후지산 둘레길 트레킹’이 혜초여행사가 몇 해 전 상품으로 개발했지만 코로나19로 뜸했던 것이 작년부터 항공편이 재개되면서 한국 트레커들이 일본 최고봉 후지산의 멋진 풍광과 일본의 문화를 탐방할 수가 있어 우리 멤버들도 서둘러 일정을 잡아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천엔전망대가 있는 ‘나카노쿠라도오게(中ノ倉峠)’까지 가는 오르막을 20여 분을 오르면 삼나무 숲이 우거진 산등성이에 닿는다. 삼나무 숲 넘어 아스라이 보이는 만년설을 하얗게 덮어쓰고 있는 일본 남(南)알프스의 모습이 이국의 정취를 만들고 있다. 왼쪽으로 시야가 트이고 모토스(本栖)호(湖)가 눈앞에 보이며 그 위로 후지산의 위용이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여기가 바로 ‘나카노쿠라’, ‘천엔전망대’이다. 해발 900m, 수심 120m인 모토스호의 투명도가 혼슈(本州) 제일이라는 설명에 걸맞게 후지산을 투명한 물위에 펼쳐놓았다. 천엔(千円)지폐를 끄집어내어 뒷면에 그려진 그림과 눈앞에 보이는 후지산과 모토스호를 번갈아 보면서 똑같은 풍광이 펼쳐지는 절묘함에 감탄하며 사진 찍기에 바빠진다.
천엔전망대를 떠나 후지산을 조망하는 전망대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파노라마(パノラマ)전망대’로 향했다. 심한 경사는 아니지만 가파른 산길을 한 시간 이상을 헉헉대며 올라야 한다.
이름 그대로 파노라마처럼 사위가 탁 트인 조망 포인트에서 후지산이 정면에 보이고 좌·우 주변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일행들이 이리저리 포즈를 취하며 ‘후지산 추억 만들기’에 바쁘다. 필자도 내자(內子)와 함께 인증 샷과 파노라마 사진 몇 커트를 찍었다.
전망대를 떠나 경사진 산길을 지그재그로 내려서니 그림 같은 자그마한 호수에 닿는다. 호수에서 카약을 즐기며 유유자적하는 사람들이 퍽이나 평화롭고 멋스러운 모습이다. 흐리던 날씨도 개이고 호숫가 벚꽃이 더욱 흐드러진 채 피어있는 한적한 동네에서 점심을 먹는다. 넓지 않은 식당에 일행들이 들어서니 시끌벅적 생기가 돈다. 시원한 생맥주 한잔으로 타는 목마름을 달래는 사이 식사가 나온다. 카레라이스와 우동이다. 특이하게도 카레에 든 고기가 사슴고기라는 설명에 잠시 머뭇거리기도 했지만 카레 위 라이스가 후지산 모양이라 웃음이 난다. 이 곳 호수와 후지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정취가 묻어 있는 것 같아 맛 나는 점심을 먹었다. 식당 밖 햇살 좋은 탁자에 앉아 휴식을 즐기는 일행들 모습이 행복해 보이는 한낮의 시간을 보낸다.
반짝이는 물 위를 저어가는 카약과 하얗게 솟아오른 후지산을 한 폭의 수채화로 그려내는 이곳이 ‘후지5호’ 중 가장 규모가 작은 ‘쇼우진(精進)’호(湖)로 불리는 아름다운 호수다.
쇼우진호를 떠나 20여 분만에 닿은 곳이 ‘후가쿠후게츠(富岳風穴)’라는 곳이다. 화산 폭발로 생겨난 용암동굴이 바람과 얼음을 만들어 내는 곳으로 여러 군데 풍혈(風穴)과 빙혈(氷穴)이 있다. 동굴 속에 얼음기둥이 서 있고 ‘천연냉장고’라고 써놓은 안내판도 보인다. 낮은 동굴에 머리를 부딪치는 아찔한 일도 있는 빙혈을 돌아보고 ‘후지하코네이즈(富士箱根伊豆)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수령 300년 된 솔송나무와 용암 숲길로 유명한 ‘아오키가하라 쥬카이(靑木ケ原樹海)’가 이어지는 곳에서 용암 원시림과 비단결 같은 이끼로 뒤덮인 숲 속을 거닐면서 신비의 세계를 돌아봤다.
아쉬움을 남긴 채 ‘후가쿠후게츠’를 떠나 후지산 대분화로 만들어진 8개의 작은 연못이 있다는 일본 전통마을 ‘오시노핫가이(忍野八海)’로 간다. 마을 입구 자그마한 연못 한가운데 일본 전통가옥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물레방아가 정겹게 돌아가고 있다.
연못 주변에는 오래된 벚나무에 화사한 꽃이 피어나고 돋아난 초록빛 잡초들과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운 마을을 만들고 있다. 마을 골목길에는 이곳 특산품들이 곳곳에 진열되어 눈길을 끌고 ‘오시노핫가이’ 특미(特味)인 ‘쿠사모찌(草もち)’를 즉석에서 굽고 있는 할머니가 연신 뭐라고 말을 붙이며 자랑을 한다. 이 마을이 관광지라 외국인뿐만 아니라 내국인도 많이 찾아와 시끌벅적 골목길을 채우고 시골마을의 정취에 흠뻑 빠져드는 모습이다. 우리 일행들도 맛 나는 음식을 사먹으며 맑은 개울이 흐르는 마을 ‘오시노핫가이’에서의 느긋한 오후 일정을 보냈다.
2일차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창 밖으로 후지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를 두고 따라온다. 그새 정답게 느껴진다. 숙소로 돌아와 온천욕으로 피로를 풀고 저녁 식사 자리로 간다. 어제와 같은 ‘카이세키요리’가 기다리고 있다. 한 순배의 니혼슈가 돌고 나니 첫 날보다 더 익숙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재미있었던 얘기를 나누며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호텔1층 바깥에 있는 노천 족욕탕(足浴湯)에서 발을 담그며 대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와 기차 지나가는 소리에 끌려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시모베(下部)의 밤을 즐긴다.
3일차(4월 1일) 아침이 밝았다. 오늘 일정은 오르내리는 산행이 없고 평탄한 길을 걷는다는 설명에 조금은 느긋해진다. 후지산 기슭 조용하고 맑은 물이 흐르는 ‘이노카시라(猪之頭)’마을에서 오늘의 트레킹을 시작한다. 이동하는 도로변에 너른 평원이 펼쳐지고 솟아오른 후지산 아래 푸른 초원에서 한가하게 풀을 뜯는 젖소들의 목가적 풍경이 스쳐 지나간다. 날씨가 쾌청하여 눈부신 주변 풍광이 더욱 빛나고 후지산 정상부에 쉬어가는 흰 구름이 운치를 더해 또 다른 멋스러움으로 다가온다.
깨끗한 일본 농촌마을의 전형인 ‘이노카시라’ 마을에는 후지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풍부하게 흘러 ‘와사비(わさび)’ 재배의 적지로 알려져 있다. 마을 입구에 와사비 조형물이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다. 하얀 수선화와 노란 유채꽃이 여기저기 피어있고 마을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개울물소리가 마음을 더 싱그럽게 만든다. 마을 안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진바폭포(陣馬の龍)’가 나온다. 몇 갈래 낮은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평범한 폭포지만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숙적(宿敵)이었던 ‘다께다 신겐’과의 얽힌 이야기가 서린 곳이라고 한다. 폭포를 둘러보고 나와 마을 안 유난히 키 큰 벚나무 아래서 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이노카시라’ 마을을 배경으로 단체 촬영을 하고 ‘고타누끼습원(小田貫濕原)’으로 발길을 옮긴다.
‘고다누끼습원’으로 가는 길에 울창한 전나무 숲길이 있다. 피톤치트가 가득한 숲에서 긴 호흡을 하며 온몸에 청량한 기(氣)를 받아 마신다. 숲을 나서니 너른 평원이 펼쳐지고 습원이 시작된다. 아직은 꽃이 피지 않아 70종 이상의 나비가 서식한다는데 볼 수가 없어 아쉽다. 목도(木道)로 된 통로를 따라가는 해발 700m 고지대에 있는 후지산 산록의 유일한 습원이 이색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