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타누끼습원을 지나 이어지던 전나무숲이 끝나고 화사한 봄 햇살로 눈부신 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후지5호(富士五湖)’에 들지 않은 인공호수인 ‘타누끼호(田貫湖)’다. 잘 정비된 제방이 길게 이어지고 그 아래 세월을 낚는 강태공들이 봄볕을 쪼이며 앉아있다. 유난히도 푸른 호수와 파란 하늘 아래 흰 구름을 두르고 있는 후지산이 더욱 선명해 보이고 호수 둘레를 감싸고 길게 늘어선 벚꽃들의 향연과 어우러져 길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타누끼호 전망데크에서는 매년 4월 20일 전후 후지산 정상으로 해가 떠오를 때 호수에 비치는 역후지(逆富士) 모습이 ‘더블 다이아몬드’ 형상이라 많은 탐방객들이 몰려든다는 곳이기도 하다. 호반을 따라 걷다 보면 벚나무 아래 초원에서 캠핑을 즐기는 가족들이 모여 앉아 웃고 떠드는 모습이 무척이나 평화롭고 행복해 보인다. 하얀 산, 푸른 호수, 흐드러진 벚꽃 그리고 자연을 즐기는 사람들, 여기가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아닐까. 아름다운 타누끼호가 후지산 둘레길 코스 중 매력 포인트임을 다시 한 번 느끼며 파란 하늘에 떠 있는 조각구름과 화사한 벚꽃, 은빛 물결과 작별을 한다.
후지노미야시(富士宮市)에 있는 ‘후지산 세계유산센터’로 가는 길에 일본 100대 폭포에 들어있는 ‘시라이토 폭포’로 간다. 너비 200m 높이 20m 폭포에서 비단 실처럼 가는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장관을 볼 수가 있다. 현재 국가 명승지이자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돌아 나오며 또 다른 계곡에 있는 ‘오토도메 폭포’의 힘찬 물줄기도 보았다.
후지노미야 시내에 있는 ‘일본정식(日本定食)’이 나온다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어떤 요리가 나올까 기다리는 사이 생맥주 한 잔씩이 돌아간다. 서울 사는 친구인 정영대 사장이 일행들을 위해 쏘는 턱이다. 일본정식이라 잔뜩 기대를 했는데 내용이 별로라서 실망스러웠지만 모두 아무 소리 없이 잘 먹는다. 식사를 마치고 곧장 ‘후지산 세계유산센터’로 간다.
‘시즈오카 후지산 세계유산센터’라고 이름 지어진 센터는 전시동, 북동, 서동의 3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 중앙의 전시동은 ‘후지 노송나무’로 만든 나무 격자로 덮인 역원추형의 독특한 형상의 건물로 내부의 나선형 경사로 벽면에 후지산 등산로가 투영되어 방문객들이 풍경을 즐기며 감상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센터 내에는 후지산의 역사, 문화, 자연 등을 다각적으로 소개하고 있어 후지산의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 센터 앞 광장에는 일본 전통의 주홍색 ‘도리이(鳥居 とりい)’가 세워져 있어 후지산 신사(神社)로 가는 관문임을 알린다. 후지산 세계유산센터 관광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간다. 3일차 트레킹은 날씨만큼이나 상큼하게 마무리했다.
호텔 온천장에 모인 일행들이 저녁 온천욕이 끝이라 노천탕에 둘러앉아 그간의 재미난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 만찬도 ‘카이세키요리’가 나오는 식사자리에 가이드인 혜초여행사의 김기환 대리가 회사 대표가 만찬주로 니혼슈(日本酒)를 내놓았다고 들고 왔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알차고 짜임새 있는 트레킹을 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해 준 것도 고마운데 일배(一杯)를 권하니 반갑고 감사했다. 즐거운 식사자리가 끝나고 아쉬움이 남는데 서울서 온 이상만 사장이 일본통(日本通)답게 고급 니혼슈를 방으로 들고 와서 분위기를 돋운다. 즐겁고 유쾌한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이 그렇게 흘러간다.
트레킹 마지막 날(4월 2일)이 밝았다. 기상 예보로 오후에 비가 온다는 소식에 조금은 불안했지만 식당에서 만난 나이 든 종사자들의 밝은 아침 인사에 오히려 힘이 난다. 된장국(미소시루)을 담아주는 할머니에게 내자(內子)가 “이다타끼마쓰(いただきます)”, “맛있게 먹겠습니다”라고 서툰 일본말로 인사하니 “하이! 하이! 도우모(はいはい どぅも)” “네, 네 고맙습니다”라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는 모습에 마음까지 밝아지는 것 같다.
짐을 꾸려 로비로 나오니 일행들 모두 상기된 얼굴로 인사한다. 출발 전 호텔을 배경으로 단체 촬영을 하고 버스에 오른다. 시모베온천호텔의 종업원들이 현관 앞에 도열하여 끝까지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모습에 고마움을 느끼며 떠난다. 일본인들의 몸에 배인 친절이 또 한 번의 감동을 준다.
마지막 트레킹 일정이 당초에는 후지산 5합목까지 차로 올라 ‘오쿠니와주유’ 코스를 트레킹 하는 것이었으나 눈이 쌓여 갈 수 없어 후지산 부근에 있는 ‘긴도키야마(金時山 1,212m)’를 오르는 일정으로 변경하였다.
후지산 정상을 오를 수 있는 시기는 7월 초부터 9월 초까지 약 두 달간만 개방한다. 정상 부위에 눈이 많이 쌓이고 녹지 않아 일반인들은 오를 수 없다. 등산 루트는 4개로 각 루트마다 시작점 높이가 다르다. 등산 시작점에서 정상까지를 10등분하여 나눠 놓은 것을 ‘고메(合目)’라고 부른다. 통상적으로 각 루트마다 도보로 오를 수 있는 위치가 5합목에서 부터다. 4개 루트로는 요시다(吉田), 스바시리(須走), 고덴바(御殿場), 후지노미야(富士宮)루트가 있으며 각 루트 중 순례자들은 도쿄(東京) 쪽 요시다루트(5합목 2,305m)를 선호하고 일반 등산객들은 시즈오카(靜岡)의 후지노미야루트(5합목 2,380m)를 많이 이용한다. 각 합목마다 산장(총 46개)이 있고 숙박비는 인당 1만5천엔을 받는다고 한다. 시즌에는 정상 신사(神社)에 가는 순례자들로 줄을 잇는다는 설명에 후지산을 신성시하는 일본인들의 관습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10시 40분, ‘긴도키야마(金時山)’ 등산 시작점인 ‘오토메’고개(해발 800m)에서 4일차(마지막) 트레킹을 시작한다. 산장으로 사용하는 깨끗한 주택들이 여럿 있고 주택들 사이로 길이 나 있다. 산행 전 스트레칭을 어김없이 시키는 가이드가 트레킹 전문가답다. 고도를 400m 정도 높여야 한다. 출발점부터 경사진 계단을 한참을 오르니 낮은 키의 산죽이 울타리처럼 둘러쳐진 쉼터가 나오고 이어지는 오르막이 끝도 없는 듯하다. 몇 차례 쉬어가면서 오르긴 해도 2시간이나 걸려 정상에 도착했다. 날씨가 흐려 후지산은 보이지 않았지만 정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앉아 음식을 즐기고 있다.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들도 보인다. 정상에 매점이 있어 간단한 음식과 음료를 팔고 있다. ‘천하의 수봉(天下の秀峰) 긴도키야마(金時山)’란 정상 표지목이 하얗게 탐방객을 맞아주는 정상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올라온 반대 방향으로 내려선다. 내려가는 코스도 만만치가 않다. 급경사에다 위험한 구간이 더러 있어 애를 먹는다. 안전을 위해 쳐진 가느다란 로프가 일본답지 않아 실망스러웠고 용암지대라 울퉁불퉁한 바위 깔린 내리막길이 시간을 잡아먹는다. 당초 2시간 트레킹으로 예정했는데 3시간 반이나 걸려 ‘오토메(乙女)주차장’에 닿았다. 후지산 둘레길 트레킹의 모든 일정이 무사히 끝이 났다.
“일본의 상징, 후지산은 멀리서 봐야 아름답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실감하며 잔잔한 호수와 흐드러진 벚꽃 향기에 취한 봄의 천국에서 코로나 팬데믹으로 잊고 있었던 힐링의 소중함을 찾은 유익한 트레킹을 마치고 일본을 떠난다. 다음에는 못다 본 ‘가와구찌(河口)’호와 ‘야마나가(山中)’호 일대와 ‘에도(江戶)’시대 마을길을 걷는 ‘나가센도(山中道)’ 둘레길을 갔으면 좋겠다.
끝으로 서울에서 동참해준 김재년·정영대 두 친구와 이상만 사장 내외 그리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준 혜초 김대리의 노고에 고마움을 전한다.
늘 걸어서 자연 속으로 함께 가는 ‘백키로’ 멤버들에게 다음을 기약하면서 고마운 마음을 이 글로 대신한다. “富士, さよなら!(후지, 안녕)”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