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의 왁자함이 사라진 뒤 적막강산이다. 사람들은 떠났고 사람 소리도 사라졌다. 남은 음식 냄새를 쫓는 흐릿한 파리 소리뿐인 절간 같은 집에 사시랑이 육신을 뉜다. 모두가 일상으로 되돌아올 것을 전제하고 떠나온 여행이 아니던가. 올 추석에도 우리 집 십일 남매 대가족은 명절이라는 이름으로 몰려왔다가 정수리에 불었다 사라지는 바람처럼 흩어져 갔다. 덩달아 한순간 달아올랐던 내 안의 열기와 잰걸음도 멈추었다. 그 가족들과 음식을 만들어 나누었다. ‘잘 먹고 갑니다.’ 아무도 들을 수 없지만 또렷이 내 가슴으로만 듣는 말. 내 삶의 기술 하나 제대로 빛났음을 느낀다.
살아서 겪은 체험과 겪어서 아는 경험이 조합된 내 삶의 기술은 요리다. 삶의 가장 기본인 음식을 만들기 위해 부엌에서 반세기 분투로 연마한 기술이다. 두툼한 나무 도마 몇 개와 묵직한 무쇠 칼 여럿으로 맞바꾼 그 허벅진 기술에 수고스러움이 더해진 정성. 십일 남매는 결이 고운 고향 음식에서 거친 듯 투박한 이곳 음식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길들었다.
가족은 든든한 울타리기도 벽이 되기도 하는 존재다. 또한 달성과 극복의 양가적 대상이다. 평소에 누적된 갈등과 과도한 기대심리가 해소되지 않아서일까. 때론 만나 부대끼다 보면 감정적 거리로 자그락거리다 다툼이 일어나기도, 격렬하게 부딪혀 압력이 폭발하는 일도 종종 생긴다. 그러나 애초에 혈육이라는 질긴 연으로 쌓아 올려 돌처럼 굳어버린 인연이다. 아무리 부정하고 벗어나려 해도 번번이 그 안으로 되돌아오는 존재다. 그런 일로 한 조각 도려낸다고 멈춰질 인연들은 아니지 않는가.
이렇듯 흔들린다는 건 모두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성장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것 일 게다. 하여 외따로이 있는 마음들도 모아야 하는 내 삶의 기술은 나날이 발전을 거듭한다. 노래방 기기를 설치해 놓고 가족들의 융숭 깊은 만수받이로 전락한 남편의 기술보다 한발 앞선다.
우리는 삶의 반복성 속에서도 숟가락부터 드는 존재다. 삶을 견디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헐거워진 감정에 알싸하니 매운 회무침으로 대화를 이끈다. 어림친 알근달근한 두루치기에 막걸리로 평정한다. 맛있게 먹고 배부른 이들의 입과 귀는 날큰하여 순해지고 까무룩 해져 마침내 가족의 소중한 가치를 느낀다니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나의 부엌일이 으뜸의 가치를 얻는 순간들이다.
대가족은 옛이야기만 안주처럼 탁자 위에 올리던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당면한 현실적인 이야기로 밤샌다. 서로의 고통을 토로함으로써 안타깝고 애틋한 눈빛으로 고단한 삶을 위로하고 위로받는다. 혈육의 그리움이란 멀리 있을수록 강렬하게 끌리는 자력과도 같고, 막으면 막을수록 더 큰 소리로 심장을 딛으며 오는 이명 같은 것이라 그 기술로 버석거리는 가족의 거멀못을 괴고 다독일 수 있음에 어찌 행복하지 않으리.
올해도 햇과일을 듬뿍 넣고 담근 새콤달콤한 알배기 나박김치가 최고였다. 버섯 잡채와 식혜 통은 진즉에 바닥을 보였다. 노란 치자로 물들인 다양한 전 소쿠리도 야금야금 비워졌다. 텁텁한 입맛을 달래준 상큼한 해파리냉채와 황태포를 갈아 넣은 들깨 미역 해장국도 인기였다. 포용과 이해의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먹고 마셨다. 가족들이 돈 버는 기술, 사람 구하는 제 기술들을 잠시 내려놓은 사이, 내 삶의 기술은 최고조로 빛났다. 창호지로 번져 스며드는 빛처럼 칭찬 일색이 아니더라도 얼비치는 그들의 표정과 빈 그릇이 말해준다.
한 자리에 서 있는 나무라도 각자 지닌 성향과 풍파에 따라 다른 그림자를 드리우듯 우리 삶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같은 나무, 다른 빛깔로 빛나도 결국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 있다. 가을은 그렇게 다름을 인정하며 깊어지고 그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계절을 살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