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교수의 역사칼럼 연오랑 세오녀의 진실
연오랑은 자상하게 서민을 보살핀 지도자였다. 그 한가지 보기로 '고리버들상자 만들기'를 들 수 있다.
그가 일본서 최초로 개발한 지역의 하나인, 지금의 효고켄(兵庫縣) 토요오카시(豊岡市) 일대에는,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연오랑은, 그 곳 마루야마(丸山)강 강변 일대에 우거진 고리버들 가지로 상자 엮는 법을 창안, 널리 보급시켰다 한다. 옷이나 도시락 간수용으로 긴히 쓰인 그 상자는, '고리'란 이름으로 그 후 일본 각지에 널리 전해지며 인기를 모았다.
옷상자를 '코오리(こおり)'라 부르는 일본말은, 여기서 빚어진 낱말이다. 토요오카시는, 현재 가방 제조로 일본서 첫손 꼽히는 중소공업도시다. 그 배경에 연오랑이 보급한 고리버들 상자의 오랜 전통이 있음을 돌이키게 된다.
◇…버들은 예(濊)를 상징하는 나무였다
연오랑의 할아버지는, 신라 제4대왕 석탈해(昔脫解) ―
석탈해의 성은 석(昔)씨였다. '석(昔)'이란 한자는 '예 석'이라 읽힌다. 석씨를 나타내는 '석(昔)'은 '예(濊)'와 상통하는 소리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예(濊) 계통의 우리나라 사람이었던 탈해는, 자신의 성을 '예(昔)'라 지은 것이다. '예(濊)'와 '예(昔)'는, 상통하는 소리를 내는 한자였기 때문이다.
석탈해는 예 출신 한국인이었음을 이로써 알 수 있다.
석탈해 왕의 손자였던 연오랑과 그의 동생 지고(知古)도 석씨였고, 예 출신자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석탈해왕 자손들은, 제9대왕 때부터 다시 신라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일본에 간 연오랑과 그의 아내 세오녀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은 지고(知古) 즉 제9대 벌휴왕은, 어려움 끝에 신라 왕위에 오를 수가 있었고, 그 후 제16대 걸해왕(訖解王·310~356년)까지의 8대에 걸쳐 정권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1세기에서 4세기까지, 초기 신라의 국력을 다진 예사람들은, 어떤 집단에 속해 있던 우리나라 사람들일까.
이들은, 한국민족의 뿌리가 되는 무리로, 예(濊), 또는 예맥이라 합쳐 불리기도 했다. 요즘의 중국 북동부의 송화강과 흑룡강, 압록강, 두만강 유역에서 활동한 대민족이었다.
이 예족 중 한 무리는, 1세기초, 동해안을 따라 남하, 강원도 강릉 일대에 터를 잡아, 동예(東濊) 또는 철국(鐵國)이라는 이름의 부족국가를 세워 번성했고, 일부는 동해를 건너 일본 본섬 동북부 및 큐슈(九州)로 진출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왜(倭)국을 형성했다.
히미코(卑彌呼)의 여왕국이 그것이다.
동예는 그 후 2세기에는 해체되어, 주세력은 반도 남해안에서 낙동강을 따라 북상, 남강 황강 등 지류 일대의 경상북도 서쪽 지역에, 가야(伽倻) 소국(小國) 여러 나라를 열었다. 모두 제철소국(製鐵小國)들이었으나, 매우 번성, 일본으로 많이 진출하기도 했다.
이들 중 일부 세력이 포항?울산 등 해안으로 상륙, 신라국에 편입되었고, 일본에 진출했다가 다시 귀국하여 신라인이 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연오랑의 조부 석탈해가 그 케이스에 속한다.
이들 예족은 '버드나무'로 상징되었다. 우리의 고대사책 '삼국사기'에는, 버드나무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신라 제10대 내해(奈解)왕 3년 대목에는, '시조(始祖) 묘 앞의 쓰러진 버들이 저절로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고, 신라 제12대 첨해(沾解)왕 7년에도, 경주 '금성(金城) 남쪽의 쓰러진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났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것은 모두,, 예사람 세력이 눈에 띄게 힘 얻게 됨을 일러주는 글발이다.
이들의 국가적 발전의 근간에는 제철의 힘이 있었다.
예사람들은, 뛰어난 제철(製鐵) 단야(鍛冶) 등 금속 관련 기술과, 직조(織造) 기술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연오랑 세오녀 부부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