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대 흥덕왕·장화부인 합장 경주박물관 발굴조사때 밝혀져

아침부터 따가운 햇살이 내려와 날씨가 후덥지근하다. 더운 날씨에 주말마다 왕릉을 찾는다고 집을 나서는 우리 부부를 보고 아들들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 하더니 오늘은 꼭 한번 보고 싶다며 따라나선다. 웬 일일까? 같이 가자고 사정을 해도 고개를 가로로 젓던 아이들인데…

흥덕왕릉은 경주의 외곽지역인 안강에 있다. 그래서 포항에 사는 우리에게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왕릉이다. 아이들과 함께 처음으로 가는 답삿길, 안강 들판을 달렸다. 그런데 정확한 지점을 몰라서 헤매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다반사로 있는 일이어서 느긋했지만 아이들은 길을 잘 찾지 못한다고 퉁을 준다. 지금까지 왕릉을 찾아가는 노하우를 살려 범상치 않아 보이는 소나무 숲을 눈여겨보았다.

능 둘레에 새겨진 십이지신상.

옛 건물과 어우러져 있는 소나무 숲이 보여서 마을길을 따라갔더니 구강서원이다. 구강서원은 고려 후기의 유명한 학자 익재 이제현을 모신 서원이라고 했다. 서원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남편이 아이들에게 구조를 설명해주려고 했는데 문이 닫혀 있다. 밖에서 대충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마을 사람에게 길을 물어 흥덕왕릉을 다시 찾았다. 가면서 남편은 아이들을 위해 흥덕왕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었다.

서역인의 모습을 한 무인석.

흥덕왕릉은 그 주인공을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무덤 중 하나란다. 주위에서 흥덕이라고 새겨진 비석조각을 발견했다고 하는구나. 이곳에는 흥덕왕이 사랑했던 왕비인 장화부인이 합장되어 있다고 해.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 줄게. 흥덕왕은 장화부인이 먼저 죽자 평생 홀로 지내며 아내를 그리워했단다.『삼국유사』에 보면 흥덕왕과 앵무새의 이야기가 나와 있어. 어떤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는데 오래지 않아 암컷이 죽었어. 그러자 외로운 수컷이 구슬프게 울었지. 그 앞에다가 거울을 달아주었더니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보고는 자기 짝으로 알고 거울을 마구 쪼았는데 그것이 자기 모습인 줄을 알고는 슬피 울다가 죽었다고 해. 왕이 이것을 보고 노래를 지었다는데 남아있지는 않다고 하는구나.

돌난간.

"가슴 찡한 신라시대의 순애보네." 나는 장화부인을 부러워하며 감동하는데 아이들은 "에이." 하면서 코웃음을 친다. 무슨 의미인지...

얼마 가지 않아 입구에 들어섰다. 어김없이 소나무 숲이다. 숲 밖에서 볼 때는 대수롭지 않게 보였는데 숲 속에 들어서니 구불구불 자란 소나무가 빽빽하다. 어, 여기 저기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보인다. 빽빽이 들어선 구부러진 소나무는 좋은 작품의 소재가 되나보다.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피해가며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몇 분쯤 걸었을까? 어둑어둑하던 소나무 숲과는 달리 하늘이 보이는 곳에 봉분이 있다. 마치 하늘에서 빛이라도 내려주는 듯이 환하다. 바로 흥덕왕릉이다.

괘릉에서처럼 제일 앞쪽에 화표석이 있고 무인상, 문인상, 사자상도 있다. 봉분 둘레에는 호석과 난간석이 남아있고 앞에는 높다란 상석도 갖추고 있다.

먼저 안내판을 찾아서 아이들과 함께 읽어보았다.

신라 흥덕왕릉 (新羅 興德王陵)

사적 제30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 42

이 능은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 김수종/김경휘)을 모신 곳이다. 왕은 지금의 전남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두고 장보고(張保皐)를 대사로 삼아 해상권을 장악하였으며, 당나라에서 차(茶) 씨를 들여와 재배하도록 하였다.

밑둘레 65m, 직경 22.2m, 높이 6.4m 되는 이 능의 둘레에는 호석(護石)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겼고 그 주위로 돌난간을 둘렀다. 네 모서리에는 돌사자(石獅子)가 있고, 앞쪽에는 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을 세웠는데 무인석은 서역인(西域人) 모습을 하고 있다.

『삼국유사, 三國遺事』왕력편(王曆編)에 '능은 안강 북쪽 비화양(比火壤)에 있는데 왕비 장화부인(章花夫人)과 함께 매장했다.'고 하였다.

1977년에 국립경주박물관과 사적관리사무소의 발굴조사 때 상당수의 비편(碑片)과 함께 '흥덕(興德)'이라 새긴 비의 조각이 나와 흥덕왕의 무덤임이 밝혀졌다.

무덤의 앞 왼쪽에는 비석을 세웠는데, 지금은 비석을 받쳤던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만 손상된 채 남아있다. 당시의 둘레돌과 십이지신상 양식의 변천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이들은 장보고가 활약하던 시대의 왕이었다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 같다. 해적을 소탕하고 중국과 일본에 바닷길을 열어 해상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장보고가 흥덕왕보다는 더 친숙하게 와 닿았을 것이다.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무인석과 문인석은 원성왕릉의 것보다 그 조각 솜씨가 떨어져 보인다. 목욕을 했는지 하얀 바탕은 드러내었지만 윤곽이 흐릿하다. 다만 봉분의 사방에 배치된 사자는 아직도 소임을 다하고 있다는 듯이 늠름한 자세로 눈을 부라리고 있다. 성덕왕릉에서 본 것과 비슷한 위치다. 원성왕릉에서는 봉분 앞쪽에 네 사자석이 있었는데…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봉분도 자세히 살펴보았다. 무덤이 흘러내리지 않게 받치고 있는 호석이며 십이지신상을 돋을새김으로 새겨 왕릉을 지키게 한 모습도 보았다. 난간에는 두 줄로 걸쳐져 있었을 것 같은 관석은 보이지 않고 난간기둥에 동그란 구멍만 두 개씩 나있다.

이렇게 잘 갖추어진 왕릉도 이곳이 마지막이란다. 흥덕왕 이후에는 서로 죽이고 죽는 왕위쟁탈전이 심각했으니 왕릉을 꾸밀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후대의 일은 아는지 모르는지 흥덕왕은 장화부인과 함께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왕릉에서 내려다보는 소나무 숲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아이들도 그 모습을 한참동안 보고 있을 정도로.

왼쪽으로 내려오는데 성덕왕릉에서 본 것과 비슷한 귀부가 있다. 덩치는 무척 큰데 조각은 섬세하지 않다. 머리도 뭉툭하게 되어있어서 목인지 머리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기울어져가는 신라왕실을 보는 듯하여 마음이 짠하다. 나오면서 소나무 숲 입구에 있는 흥모재도 둘러보았다. 흥덕왕릉을 지키기 위하여 1991년에 건립한 재실이라고 한다. 깔끔하게 단장한 모습을 보니 흥덕왕을 기리는 후손들의 마음이 전해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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