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희강왕릉·민애왕릉

내남면 망성리에 위치한 희강왕릉.

느직이 집을 나서서인가 희강왕릉과 민애왕릉을 찾을 때쯤에는 배가 무척 고팠다. 우리가 달리고 있는 도로는 경주시내를 한참 벗어나 있다.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아 음식점을 찾아갔지만 예약 손님만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주변에는 식사할 곳이 마땅히 없단다. 시내로 나가야만 꼬르륵거리는 배를 달랠 수 있다는데 왕릉이 코앞이라 망설여진다. 다시 오는 것보다 배고픈 것을 참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망성1리 둥굴마을로 들어서서는 대문 밖에서 콩을 다듬고 있는 할머니께 차 세울만한 곳이 없냐고 여쭈었다. 좁은 동네여서 차를 세울 곳도 마땅하지 않다고 하며 당신의 집 마당에 세우라고 하신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주차를 하고 문을 나서는데 배고프다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틔어 나왔다. 그 말을 들었는지 마음씨 좋아 보이는 할머니가 우리를 부른다. "점심을 막 먹고 나오는데 밥이 좀 남았다우. 좀 먹을라우. 반찬은 변변치 않지만" 아직도 시골인심은 남아있구나! 지금은 반찬을 가릴 때가 아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달라고 했다. 집의 구조가 색다르다는 생각을 하며 앉아 있으니 맛깔스러운 김치와 함께 상을 내오신다.

내남면 망성리에 위치한 민애왕릉.

덕분에 배가 든든해진 우리는 밖으로 나와서 집을 다시 보았다. 짙은 갈색 지붕이 나지막한 세모를 이루는 특이한 집이다. 이 집은 전기 일을 하신 할아버지와 건축 일을 하는 아들들이 지었다고 하신다. 모두 나무로 지어진 집이다. 감탄을 하고 있으니 앞쪽에 있는 집은 아들형제가 직접 같이 지은 둘째 아들집이라며 조금 있으면 며느리가 직장에서 돌아올 시간이니 왕릉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구경해보라는 할머니. 친절의 끝은 어디일까?

우리가 이 마을에 온 목적은 희강왕릉과 민애왕릉을 답사하는 일. 요즘은 왕릉을 찾는 사람들이 가끔씩 있다고 하시며 할머니는 길을 일러주신다.

왕릉을 향해 오르는 중간에 마주친 이정표. 두왕의 운명을 말하는 듯 반대방향을 가르키고 있다.

희강왕은 김균정과 왕위다툼을 하다가 김명과 이홍 등의 힘을 등에 업고 권력을 잡은 흥덕왕의 조카 제륭이다. 하지만 김명과 이홍이 반란을 일으켜 재위 3년 만에 자살하고 만다. 뒤이어 스스로 왕이 된 김명은 민애왕이 된다. 민애왕 역시 재위 1년 만에 김양에게 피살된다. 평범한 집에서도 형제가 싸우면 가정이 무너지고 지역사회 역시 우두머리가 서로 싸우면 몰락하게 되는데 국가라고 다르랴. 권력을 잡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 나라는 이미 망조가 들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참을 올라가니 희강왕릉(250m)과 민애왕릉(150m)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보인다. 함께 하다가 서로를 져버리는 운명을 말하듯이 오르는 길은 같았는데 이곳에서는 서로 반대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먼저 희강왕릉 쪽으로 발길을 놓았다. 길인지 산인지 구분이 안 가는 좁은 오솔길을 걷고 또 걸었다. 밥을 먹지 않았다면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조금 크지만 민묘 비슷한 무덤이 보인다. 설마 이것이 희강왕릉! 맞나보다. 희강왕릉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다. 표지석도 있지만 정말 초라하다. 편편한 땅도 아니다. 경사가 져서 비가 오면 쓸려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다. 지금까지 이렇게 비참한 왕릉은 보지 못했다.

희강왕릉(僖康王陵)//사적 제220호//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 34

이 능은 신라 제43대 희강왕(僖康王, 재위 836~838, 김제륭/김제옹)을 모신 곳이다. 얕은 구릉의 중간 부분에 있으며 바닥면이 남북방향으로 약간 경사져 있다. 이 능은 둘레 14m, 높이 2.8m로 흙을 둥글게 쌓은 봉토분이며, 묘표석이 있다. 일반 무덤에 비해 조금 클 뿐 별다른 특징은 없다.

희강왕은 원성왕(元聖王)의 손자인데, 흥덕왕(興德王)이 자식 없이 죽자 조카로서 왕위다툼을 거쳐 재위하였으나, 상대등(上大等) 김명(金明)이 난을 일으키자 자살하였다. '삼국사기'에 "소산(蘇山)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소산이 어느 산인지 확실하지 않다.

조선 영조(英祖) 때 경주 출신 화계(花溪) 유의건(柳宜健)은 '화계집(花溪集)'에서 1730년 이후에 17기의 왕릉이 추가로 지정된 것에 대하여 문제점이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왕릉도 그 중 하나이다.

아무리 반란 속에 자살한 왕이지만 시호도 받고 소산에 장사지냈다는 기록도 남아있는데 어떻게 이런 곳에 묘를 썼을까? 왕릉으로 지정되기에 문제점이 제기된 능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희강왕릉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밋밋한 왕릉을 둘러보며 찾는 이 없는 곳에 쓸쓸히 누워있는 희강왕이 무척 외롭다는 생각을 하며 갔던 길을 되돌아 나왔다.

희강왕릉에서 돌아나와 갈림길에서 민애왕릉 쪽으로 난 숲길에 들어섰다. 제법 굵은 몸통을 가진 소나무들 사이로 100여m를 가니 그리 크지 않은 봉분이 나타난다. 그래도 희강왕릉보다는 나은 모습이다. 3단으로 쌓은 둘레돌 위에 갑석을 둘렀고 지대석이 전체를 받치고 있다. 봉분 앞에는 낮은 상석도 갖추어져 있다.

전 민애왕릉(傳 閔哀王陵)//사적 제190호//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 산 42

이 능은 신라 제44대 민애왕(閔哀王, 재위 838∼839, 김명)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다. 능은 높이 3.8m, 지름 12.6m로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이다. 봉분의 하단에는 1.6m높이로 둘레돌을 돌린 다음, 반육각형으로 다듬은 지주석(支柱石)으로 받치게 하였다. 바로 앞에는 판석 2매로 만든 상석이 있다.

민애왕은 희강왕(僖康王)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가, 재위 1년 만에 다시 김양(金陽)에 의해서 피살되었다. '삼국사기'에 반정왕으로서 피살되었지만 "군신들이 왕의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고 시호를 민애라고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84년 왕릉 수리공사 때, 분구에서 원화십년명(元和十年銘, 815) 뼈단지[골호형] 토기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민애왕릉이 아니고 헌덕왕(憲德王)의 앞 시기 어느 왕의 능으로 추정된다.

이 왕릉도 정확한 주인을 알기는 어렵다고 하니 힌트 하나 남기지 않은 신라인들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희강왕과 민애왕. 왕 한번 하고는 이름을 남겼으니 여하튼 성공한 삶이었나? 그래도 씁쓸한 기분은 가시지 않는다.

내려오는 길은 훨씬 빠르다. 할머니의 말씀대로 둘째 아들네에 가서 문을 두드렸다. 예쁜 둘째 며느리가 반갑게 맞이해준다. 젊은 사람도 시골에 살면 따뜻한 정이 살아나는가 보다. 며느리는 말도 참 예쁘게 한다. 시부모님이 옆에 살아서 힘들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좋은 분들이라 도움을 더 많이 받는다고 한다. 우리는 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쓸쓸한 왕릉에서 느꼈던 기분은 마을의 따뜻한 인심에 밀려 난 것 같다. <계속>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