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욕의 역사 함께한 '달구벌 젖줄'에 새희망 넘실넘실

▲ 신천에서 바라본 대구 중구 전경.
▲ 금호강 일출 전경.

금호강은 경산시를 지나 대구시를 감싸 안는다. 동구 팔공산 자락 아래 경부고속도로 북쪽에 대구 동구의 혁신도시(옛 반야월)가 우람하다. 율하천을 넘으면 동구 불로동에 공군비행장과 대구공항이 있다. 공군 전투기가 뜨고 내릴 때 굉음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대구 수십년 역사에 있어서 최대 숙원사업인 비행장 이전을 위해 유승민 국회의원이 수년째 매달려 씨름하고 있으나 결말이 나지 않고 있다. 두 지역은 1981년 대구시로 편입된 경산군 안심읍과 달성군 공산면 지역이다.

금호강은 남쪽으로는 수성구와 맞닿는다. 폐교된 고모역 부근에 '비내리는 고모령'이라는 노래비가 있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오.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 턱을, 넘어오던 그 날 밤을 언제 넘느냐…."

대구 동구 불로동 고분군. 금호강 북쪽 변두리에 있다. 약 10만평에 가까운 넓은 묘역. 4~5세기 원삼국시대 때 조성된 지배 세력의 집단묘지로 추정된다. 불로동에만 214기가 있고, 인접한 곳에 크고 작은 고분이 300기가 넘게 펼쳐있다.

야트막한 언덕에 옛 무덤들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어 둘러보기 좋다. 고분군 너머로 대구 도심의 빌딩 숲이 눈에 들어온다. 고대 국가의 고분과 현대의 도시가 밀레니엄이 훨씬 넘는 시간을 너머 한 공간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불로동의 동네 어귀에서 금호강의 지천인 불로천 물길을 따라가면 도동 측백수림이 나온다. 바위틈이나 메마른 땅에서 자라 큰 나무가 5~7m 정도이다. 제1호 천연기념물이다. 지금은 그저 그렇지만 예전에는 측백수림 일대의 경치가 아주 빼어났던 모양이었다. 조선 초기 학자 서거정이 대구십경 중 '북벽향림(北壁香林)'이 그것이다.

대구 동구는 견훤에게 비참하게 패한 왕건의 한이 서린 곳이다. 927년 왕건은 견훤의 동진을 견제하기 위해 남하하다 팔공산에서 벌어진 공산 전투에서 패전해 구사일생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왕건은 930년 고창성(안동)의 도움으로 견훤의 후백제군을 '고창지첩'에서 대파해 전국 판도를 뒤집었다.

'대구시사'등에 따르면 왕건은 금호강을 건너던 중 밤하늘에 달이 반쯤 떴다 하여 반야월(半夜月), 추격군이 없는 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하여 안심(安心), 장정들은 전쟁터에 다 나가고 아이들만 있는 마을을 보고 아니 불(不)자에 늙을 노(老)자 동명을 붙였다는 불로동 등등의 전설이 있다.

대구의 지명에는 시인 두보의 후손인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과 관련한 유래도 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이후 귀화해 살던 집터를 경상감영(중구 포정동)에 주고 중구 계산동으로 옮겨 뽕나무를 심고 길쌈을 해 '뽕나무 골목'(이상화 서상돈 고택 부근)으로 불린다. 현재 영남대병원이 있는 야산에 단을 쌓고 명 황제를 향해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단은 대명단(大明壇)이라 불렀다. 대구의 대표 동(洞 ) 대명동의 유래다. 수성구 만촌동에 1912년 지어진 재실이 모명재(慕明齋)다. 모명(慕明)은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의미다.

대구 중심부를 흐르다 금호강으로 합류하는 신천(新川)은 대구의 영욕의 역사와 함께 했다. 가창골을 지나서 용계동으로 나오며 팔조령서 내려온 물, 앞산의 강당골이나 삼정골 물을 합류한다.

신천 상류 달성군 가창면에는 임진왜란 때 귀화한 왜장을 기리는 녹동서원이 있다. 왜군의 선봉장 '사야가(沙也可)이 조선의 경상도 병마절도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저의 소원은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 그는 조선으로 귀화한 이후 왜군과의 싸움에 공을 세웠다. 벼슬을 받고 임금에게 김씨 성을 하사받아 '김충선'이란 이름을 얻어 조선에 살았다. 1970년대 일본 소설가 시바 료타로가 녹동서원을 방문해 책을 쓰고 김충선의 귀화 400주년이 되던 1992년 일본 NHK 방송이 '출병에 대의없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배반한 사나이 사야가'란 다큐멘터리를 방송하면서 그는 일본에서 '매국노'에서 '평화론자'로 부활했다. 달성군이 이곳에 '한일우호관'을 세웠다. 대구시는 두사충 김충선을 잇는 동양평화 관광벨트를 꾸며볼만하다.

대구시가지내에 용두산에서 봉덕동, 수도산, 건들바위, 동산동, 달성공원으로 흘르는 하천이 홍수만 나면 평지에 있는 대구읍성에 피해를 줬다. 1778년 대구 판관 이서가 용두산 물을 막아 물길을 오늘날 신천 쪽으로 흐르게 했고, 후로는 물이 시내로 범람하지 않았다고 한다. 신천이란 말은 새로 만든 개울이란 뜻도 있고 사이천, 새천 등으로 사이 강이라는 뜻도 있다. 상동교 부근에 '李公堤'(이공제) 혹은 '李公逝 公德碑'(이공서 공덕비)가 세워졌다.

상동교 부근에는 대구의 최고의 명물로 주말에 인산인해를 이루는 수성못 유원지가 있다. 수성 들판에는 늘 논물이 모자라자 1914년 일본인 미즈사키 린타로(水崎林太朗)가 못을 새로 설계해 10년 공사로 오늘날 수성못을 만들었다.

신천대로 둑길 아래 방천시장을 끼고 있는 자그마한 골목이 '김광석 길'이다. 가수 김광석이 어린 시절을 보낸 시장골목 옹벽에다 2009년 화가들이 그를 추억하는 벽화를 그렸다. 요즈음 젊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곳이다.

당초 옹벽에 그려질 벽화의 주인공으로 가수 김광석과 함께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이 물망에 올랐단다. 김 전 회장은 6·25전쟁 당시 대구의 3대 시장 중의 하나인 방천시장에서 신문배달을 했던 인연이 있었다. 김광석 길이 어쩌면 김우중 길이 될 뻔했던 셈이다.

신천이 금호강에 합류하기 전에 남쪽벌(북구 침산동 일대)에 만든 공업단지가 대구 제1공단이다. 이후 2, 3공단이 들어서며 대구 공업을 이끌었다. 산업화 유산인 제1공단의 중심에 한국 공업화기념관을 세운다면 대구를 넘어 한국의 역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던 한국 공업화가 실제로는 신천 같은 작은 한강이 모여서 상징적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제일모직은 1954년 고(故) 이병철씨가 북구 침산동 일대 24만7천여㎡(7만5천여평)의 부지에 자본금 1억원을 들여 설립 56년부터 공장을 가동했다가 1995년 구미로 이전했다. 삼성그룹의 모태다. 현재 고성(古城)을 연상케 하는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건물이 여자기숙사다. 한 때 이 기숙사에는 당시 경상북도 여러 고을에서 온 여학교의 수재들이 기거했다. 진심·선심·숙심(眞心·善心·淑心)이라는 기숙사 이름이 향수를 자아낸다. 61년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방문해 "이 정도면 딸을 맡길 수 있겠군"이라고 했던 일화가 전해진다.

신천을 남쪽으로 두고 있어 남문을 신천변에 둔 두 기관이 있다. 곧 안동·예천으로 옮겨갈 경북도청과 한 때 한강이남 최고 명문 경북대학교다.

신천은 침산(砧山)을 보며 금호강으로 흐른다. 침산은 다듬잇돌을 닮았다고 침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신천의 수구를 막아 대구를 부유하게 해 주는 곳이 풍수지리상 침산(砧山)이라고 한다. 지금 '내로라' 하는 대구의 부호들은 대개 공업화시절 1, 2, 3공단에서 원형이 만들어졌다. 빌딩들에 의해 산들이 잘 보이지 않지만 대구는 풍수지리상 앞산의 막내인 중구의 봉산(연귀산·連龜山·현 제일중)은 대구의 진산이고, 용두산(龍頭山·수성구 상동 신천변 서쪽 고산골)은 대구를 지켜 주는 산이고, 대구읍성 남쪽 남산(아미산·峨嵋山·대구 남산교회와 대구관덕정 순교기념관 부근)은 안산이다.

전영권 대구가톨릭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가 저술한 '살고 싶은 그곳, 흥미로운 대구 여행'에서 "북쪽으로는 팔공산과 남쪽으로 비슬산이라는 고도 1천m가 넘는 산지로 둘러싸인 대구, 그런 자연의 혜택을 입은 도시는 세계에서도 보기 드물다"고 말한다.

다만 아쉬운 것은 파리의 세느강, 런던의 템즈강, 베를린의 슈프레강 못지 않은 대구의 금호강은 환경보존과 개발을 조화롭게 가꾸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금호강과 팔공산은 대구의 북동 쪽을 감싸며 대구시 달서구 파호동에서 낙동강 본류로 흘러든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