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의 부름에도 두 임금 섬기지 않은 불사이군 충절 깃든 곳
사양서원을 가려면 파천면사무소 입구에서 청송로를 따라 남쪽으로 약 1㎞ 이동 후 중평리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중평부길을 따라 약 420m 직진한 뒤 갈림길에서 우회전하여 길을 따라 530m 이동하면 사양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서원 앞은 용전천이 흐르고 주변에는 약 300여 그루의 소나무가 심어진 중평솔밭이 있다. 서원이 위치한 중평리는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집성촌으로 서원에서 서쪽으로 1㎞ 떨어진 곳에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平山申氏 判事公派 宗宅)과 서벽고택(棲碧古宅), 사남고택(泗南古宅)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주벽에 모신 문정공은 여(麗), 원(元), 명(明) 삼조에 걸쳐 학문이 높기로 유명했으며 명나라 태조로부터 금자광록대부의 직위를 받고 문정이란 시호를 받았던 우리나라 성리학의 개척자이다.
그 후 태종이 누차 사람을 보내었으나 끝내 불응해 마침내 어가(御駕)가 심산 험로를 무릅쓰고 찾았으나 그래도 몸을 피하고 나타나지 않아 결국 태종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후일 사람들은 태종이 머물었던 자리에 주필대(駐畢臺))라 표적을 세우고 태종대란 비각을 세워 오늘에 이르렀다.
조선 이방원은 어지러운 정국을 수습하고자 죽은 정몽주를 사면하고 벼슬을 추서할 계획을 세운다. 이 소식을 들은 신현의 후손 신자악이 상소를 올려 살아 있을 때도 조선의 녹을 먹지 않기 위해 벼슬을 받지 않았는데 죽어서까지 조선의 벼슬을 받겠느냐며 이방원을 자극했다.
이에 노한 이방원은 평산 신씨 일가를 멸족시키라 명했다. 이 사실을 안 신현의 제자였던 운곡 원천석이 자신의 스승 일가의 멸문지화를 막기 위해 신득청의 손자인 쌍둥이 형제, 영석, 중석을 숨겨 대를 잇게 했다.
평산 신씨 여해파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운곡쪽 기록은 사실 없다고 전해지며 원운곡은 사문화액(師門禍厄)이 잇달아 일어나 지극히 위험할 때 나이 어린 문훤공의 증손형제를 데리고 원주에 숨어 살게 해 성취(成娶)까지 시켜줌으로 그 자손이 청송, 영덕에 수천 가구가 살고 있다.
다행히 1814년 원운곡, 범복애두 선생이 편집한 화해사전이 햇빛을 보게돼 수백년 동안 끊겼던 사적이 상세하게 드러나므로 오도유림통문(五道儒林通文)과 태학통장(太學通章)이 합치해 성무에 같이 모시게 하기로 결정되었으나 여의치 못하고 기호사림(畿湖士林)이 마음과 힘을 합해 먼저 사전을 발간해 반포하고 이어 충남 계룡산 성직동에 화해사를 창건해 향례를 봉행해 왔다.
사양서원을 가려면 청송군 파천면사무소 입구에서 청송로를 따라 남쪽으로 약 1㎞ 이동 후 중평리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중평부길을 따라 한 쪽에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다. 서원 앞은 용전천이 흐르고 주변에는 약 300여 그루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심어진 중평솔밭이 있다. 사양서원이 있는 중평리는 평산신씨의 집성촌으로 서원에서 서쪽으로 1㎞ 떨어진 곳에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과 서벽고택, 사남고택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서원은 강학 공간인 강당과 동재·서재가 전면에 배치되어 있고 제향 공간인 사당이 뒤에 자리 잡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이다. 사당인 화해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화해사(華海祠) 현판은 백범 김구의 친필이다. 강당인 선교당(宣敎堂)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동재인 함양재(涵養齋)와 서재인 극소재(克紹齋)는 건물의 규모가 동일하다.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정면에 툇마루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