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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 36. 백광훈 옹기장
[명인] 36. 백광훈 옹기장
  • 최길동 기자
  • 승인 2020년 07월 12일 18시 11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7월 13일 월요일
  • 1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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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 영덕 옹기 맥 잇는 외길 인생
백광훈 옹기장
영덕군 지품면 오천리에는 4대를 이어온 옹기 집안이 있다. 2003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25-나호 영덕옹기장에 지정된 백광훈(67)씨가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주인공이다.

술독·고추장 옹기·된장 옹기·간장 옹기·김장용 옹기·효소를 발효시키는 옹기 등 그의 손으로 만들어진 옹기는 사람들의 생활공간에서 더 빛난다. 묵묵히 그 역할을 다하는 옹기에는 대를 이어 옹기를 빚어온 50년 외길 인생. 장인의 뚝심이 담겨있다.

오천옹기체험실
△ 14살 때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옹기장이’.

14살 되던 해 옹기를 배우기 시작한 백광훈 씨는 증조부 때부터 할아버지, 아버지, 형까지 옹기장이를 하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감자 키우고 나락 팔아 간신히 입에 풀칠하던 시절, 그나마 옹기를 만들어 팔면 돈은 만질 수는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렇게 옹기를 만들며 생업에 뛰어들었다. “어린 시절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옹기장이지만, 지금은 힘들어도 놓을 수 없는 천직”이라는 백 씨는 “아버님이 옹기 만드시는 것을 보고 자랐지만, 실질적으로 옹기 만드는 기술은 형님께 배웠다”고 말했다.

맏형은 40년, 둘째 형은 20년 정도 옹기 굽는 일에 종사했다.

그는 “크고 작은 옹기를 손으로 다 빚어 만드는 일이 지금도 힘든데 어릴 때에는 오죽했겠냐”며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는 처음부터 옹기 만드는 일에 소질을 보였다.

옹기를 배우기 시작한 지 20일 정도 지날 무렵 자신이 만든 옹기가 가마에 들어가게 됐던 것이다. 옹기 만드는 기술을 빨리 익혔고 완성도가 높았다는 얘기다.

10대 후반에는 서울과 강원도 등지에서 옹기 만드는 일을 도왔는데 당시 그가 옹기를 만들기 시작하면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옹기를 만드는 속도도 빠르고 완성도도 높았기 때문이었다. 작은 항아리 뚜껑 같은 경우 하루에 800~900개를 만들 정도였다.

실력으로 인정받은 만큼 일거리도 많았다.

여름 끝 무렵부터 김장철까지는 하루에 4시간도 채 잠을 못 잤다. 옹기를 만들어 내는 대로 바로 팔려 나갔기 때문이다.

20대 후반부터 40대까지는 옹기를 직접 만들지 못했다. 들어오는 주문 관리와 판매처 관리 등 영업, 관리, 마케팅까지 모두 혼자서 처리할 만큼 성황을 이뤘기 때문이었다.

옹기인생
△ 옹기의 전성기와 쇠퇴기.

영덕 일대에는 40여 년 전만 해도 4개 지역(영덕읍 화개리, 지품면 오천리, 삼화1리, 달산면 홍기리, 축사면 망골)에 옹기굴이 있었지만, 1985년 이후 변화하는 시절에 밀려 전부 문을 닫았다.

산업화로 플라스틱 붐이 일고부터 옹기를 쓰는 사람들이 점차 없어졌다. 20여 년 전부터는 옹기 만드는 일도 기업화돼 대량생산, 대량 판매되기 시작하자 전통옹기는 경쟁력을 잃게 된 것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옹기의 전성시대였죠. 인근 마을까지 치면 옹기 만드는 집이 30집이 넘었으니까요. 그만큼 옹기를 쓰는 사람들도 많았다는 거죠.”

198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옹기 만드는 집이 급격하게 줄었다. 플라스틱 용기가 싼값에 팔리니까 가격경쟁에서 도저히 버틸 수 없었던 것.

가볍고 쓰기 편하고 가격도 저렴한 플라스틱 용기가 급속도로 각 집안의 세간을 장악했다.

이 무렵 울산에서는 옹기에 화학약품이 들어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누군가 고발을 하는 바람에 옹기 만드는 사람 몇몇이 구속되는 일이 있었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백광훈 옹기장과 부인 박옥란.
그를 비롯한 옹기 만드는 사람들은 그대로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관련 기관에 의뢰해 옹기에 인체에 유해한 화학성분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고, 또 직접 실험을 해보는 등 대책을 마련했다.

옹기장이들은 옹기와 플라스틱, 고무대야, 유리 용기에 각각 물을 담아 뚜껑을 덮고 햇볕 아래 일정 시간 놓아둔 뒤 물맛을 보기로 했다.

“고무대야와 플라스틱에 담긴 물과 옹기에 담긴 물맛은 누가 맛을 봐도 달랐습니다. 그나마 유리 용기에 담긴 물맛은 조금 나았지만 옹기에 담긴 물보다는 못했어요. 해당 기관에 맡긴 실험도 인체에 해롭지 않다고 결론이 났죠. 구속됐던 사람들도 당연히 풀려났고요.”

이 일로 옹기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이 사라지고 옹기 자체가 다른 재질의 용기보다 좋다는 게 알려지게 됐지만, 값싼 플라스틱 용기의 공세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더욱이 돈벌이가 시원치 않자 옹기장이들은 점차 마을을 떠나거나 다른 일을 하게 됐다. 그렇게 옹기를 만드는 일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어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그의 작업장(지품면 오천리 316-2)만이 남아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옹기가마
△전통옹기 제조법 고집.

플라스틱 용기의 등장으로 옹기가 사양길로 접어들자 그는 옹기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대부분을 어쩔 수 없이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직접 옹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옹기 제작 주문은 전보다 줄었지만 그만큼 옹기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늘었다. 그 시간에 더 좋은 품질의 옹기를 만들었다.
가마에서 구운옹기를 꺼내고 있는 백광훈 옹기장
특히 그가 태어난 영덕 오천의 옹기는 경북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서 깊은 것으로 그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 재래식 옹기 제조법을 전승해가고 있다.

흙을 고르는 일에서부터 옹기를 빚고 굽는 일까지, 연기와 탁한 공기 속에서 하루 종일 땀을 흘리면서도 이 일을 천직으로 생각하며 그만의 고집스러움을 이어가고 있다.
영덕옹기장 작업장
“산에서 흐르는 냇물이 좋고, 지품면 눌곡리에서 용덕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농로 길의 흙이 옹기 흙으로는 아주 우수해서 지금도 이용됩니다. 유약용 약토는 타 지역 옹기공장에서도 많이 이용하는 오천 기계들 천수답의 흙이 좋아서 캐거나 사 와서 재료로 삼지요.”
옹기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 백광훈 옹기장.
그는 나무를 태운 재를 섞어 잿물(천연 유약)을 만들어 입힘으로써 천연 무공해 옹기를 100% 수작업으로 제작하고 있다. 지금도 1년에 한 번 장작가마에서 옹기를 굽는다. 한번 작업을 하면 3000개 정도의 옹기가 탄생한다.

장작가마에서 굽는 것과 기계식 가마에서 굽는 것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옹기전수교육관
△“물건이 다르다” 인정받은 옹기.

이때부터 소비자와 직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좋은 옹기는 소비자가 더 잘 알아봤다. 주문도 점차 늘었다.

처음에는 값싸고 겉이 반지르르한 기계식 대량생산 옹기를 찾던 소비자들로부터도 차츰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기계화, 대량생산이 밀어닥친 지 꼬박 3년 만이었다.
완재품옹기
“물건이 다르다.” 그의 옹기를 써 본 사람들의 입소문을 통해 옹기를 사러 오는 사람들이 점점 늘기 시작했고, 20년이 훌쩍 지난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영덕전통옹기의 명맥을 체계적으로 전승하기 위해 지난 2010년 문화재청·경북도·영덕군의 지원을 받아 전수교육관을 건립했다.

총 사업비 9억원을 들여 연면적 328.42㎡(99.3평) 규모로 지어졌으며, 1층에는 사무실, 회의실, 전수교육관이, 2층에는 옹기제작 전 과정을 디오라마로 보여주는 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유치원생부터 초·중·고교생들은 전수교육관에서 직접 1일 옹기장이 돼 물레도 돌려보고 전통옹기가마, 전수교육관 견학 등을 통해 영덕 옹기의 역사를 공부한다.

백광훈 옹기장과 장남 백민규.
△ 장인의 뚝심, 아들에게 전수.

7년 전부터 그의 아들 민규(40)씨가 뒤를 이어 아버지와 함께 옹기를 빚고 있다.

1년에 1가마를 굽는 것도 이제 힘에 부치는 그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아들 민규 씨다.

민규 씨는 7년 전부터 그의 옆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옹기제작의 모든 것을 전수 받고 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어깨너머로 옹기 일을 보면서 커서 꼭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고 다짐하곤 했지만, 그는 아들을 작업장에서 내쫓고, 가마 근처엔 얼씬도 못 하게 했다. 이토록 힘든 옹기장의 삶을 아들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서도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는 아들의 확고한 결심과 300년 영덕 옹기의 맥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그를 움직였다. 그는 “옹기는 한국 사람이라면 꼭 필요하다. 앞으로도 우리 부자가 만든 옹기를 찾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해 전통옹기에 혼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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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길동 기자 kdchoi@kyongbuk.com

영덕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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