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서비스

[팔공산을 걷다] 13. 물도 흐르고 역사도 흐르고 사람도 흐르네
[팔공산을 걷다] 13. 물도 흐르고 역사도 흐르고 사람도 흐르네
  • 임수진 수필가
  • 승인 2020년 07월 16일 19시 38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7월 17일 금요일
  • 15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팔공산 둘레길 11코스 인근 수도사∼군위 인각사
치산 폭포 등산로에 위치한 '수도사'…화산의 뿔 자리에 세워진 '인각사'
저녁놀 얹힌 절간은 고즈넉하고 강물에 반영된 학소대, 물 밖보다 더 고요
인각사 앞 뜰

영천시 신녕면 치산 2리 동구 밖 당산나무 아래다. 이곳에서 치산 계곡 방향으로 100미터쯤 가면 왼쪽에 전봇대가 섰고 ‘가보고 싶은 곳’이란 옻닭 식당 플래카드와 함께 둘레길 이정목이 섰다.

영천 관광 안내도

안내판에는 10코스 종착지가 치산 캠프장으로 되어 있지만 실재 끝 지점은 치산마을 보호수이다. 큰길 따라 무심코 걷으면 이정목을 지나칠 수 있으니 둘레길이 목적이라면 당산나무 지나서부터 왼쪽을 유심히 살피는 게 좋다.

치산관광지 표석
치산계곡 상치산교 아래서 더위를 식히는 사람들

오늘은 팔공산 둘레길 11코스 인근에 있는 수도사와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에 있는 인각사를 둘러보는 것으로 일정을 짰다. 널찍한 차로를 따라가면 치산계곡 아래 상치산교가 나온다. 도로 양옆에 차들이 빽빽이 주차되어 가던 길을 멈추고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물가에 사람들이 들어찼다. 아이들은 물에 발을 담그고 찰박댔다. 해맑은 웃음소리가 계곡을 타고 흘렀다.

치산지 하부

석축을 쌓은 계곡을 건넜다. 치산지는 괴석과 어우러져 신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둑을 타고 흐르는 물은 뽀얗게 수직으로 떨어졌다.

치산 캠프장

치산 관광지 표석을 지나 왼쪽은 캠핑장이다. 파라솔 아래서 어떤 이는 고기를 굽고 어떤 이는 땀을 뻘뻘 흘리며 땡볕에 발야구를 하며 이열치열의 극한 맛을 제대로 즐긴다.

치산지에서 낙하나는 물

수도사는 치산 폭포 가는 등산로에 있었다. 이 길로 쭉 가면 신령재와 약사신앙의 성지인 갓바위와 만난다. 치산폭포는 산 위쪽 1km 지점에 있고 동봉은 신령재 입구서 우측이다. 금당사(金堂寺)라 불리기도 했던 수도사는 서북쪽에서 동남쪽을 바라보는 방위에다 폭포가 위쪽에 있어 정기가 모이는 곳이라 했다. 신라 진덕왕 (647년) 때에 자장(慈藏)과 원효(元曉)가 함께 창건하였다는데 이듬해에 원효는 승려가 되었기에 자장이 지은 것으로 본다. 보화루 앞에 섰다. 마음과 몸을 낮춰 아홉 개의 계단을 올라 마주한 절 풍경은 시원함이었다. 팔공산을 울타리 삼아 극락전과 원통전, 산령각과 승방이 일정 거리를 두고 올망졸망 들어 앉았다.

수도사 입구
팔공산 자락을 배경으로 자리잡은 수도사

원통전 안에는 관세음보살이 앉아 계시고 효종·숙종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괘불탱화가 있다하여 찾아보았다.

수도사 괘불탱화

노사나불 괘불탱 축소판은 보화루에 있었다. 보물 제1271호로 거친 삼베바탕에 굵게 표현되었음에도 정밀한 묘사와 치밀한 구성이 돋보인다는 평이다. 붉은색이 많고 색감은 강렬한데 노사나불 주위의 일곱 화불은 그 모습이 퍽이나 다감하다.

일연스님 초상화

서쪽 하늘로 기운이 쏠리면서 오후 햇살은 더 바빠 보인다. 일연스님을 만나기 위해 서둘렀다. 가는 길에 화산마을 표지목을 보았다. 이곳에서 7㎞ 거리다. 두 곳을 방문하기에는 시간이 빠듯했다. 오늘도 나머지 한 길은 남겨 둘 수밖에 없겠다. 가지 못한 길은 언제나 아쉬움이 남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인각사로 향했다.

인각사 풍경

화산의 뿔에 해당하는 자리에 위치하여 ‘인각’이라 불리는 인각사는 전체가 오픈된 환경이다. 큰길가에 있어 땀 흘리며 산을 오를 일도 없었다. 일주문도 담장도 없어 그냥 쓱 들어갔다. 저녁놀이 지고 있는 절간은 휑한데 하늘빛을 받은 접시꽃은 예뻤다. 황량한 뜰을 잠시 걸었다. 고즈넉한 느낌이 좋았다. 뭔가 어수선하고 정리가 되지 않은, 어째 빈 여백이 많다하였더니 그럼 그렇지 지금도 발굴중이고 복원사업도 진행 중이란다.

충렬왕 21년에 세워진 일연스님의 부도

보각국사 탑과 비는 절 마당 한쪽에 나란히 섰다. 탑은 받침돌 위에 몸돌과 지붕을 얹었다. 지금은 경내에 있지만 원래는 절에서 2㎞쯤 떨어진 둥딩마을이라 불리는 부도골에 묻혀 있었다. 구한말에는 사리를 훔치려 부도를 고의적으로 넘어뜨리는 일본인도 있었다고 하니 어쨌건 발견되어 다행이다. 경내를 돌아보니 까마득한 세월과 바투한 느낌이다. 깊고 깊어 그 너머 세계를 짐작조차 할 수 없어 가늘어진 햇살을 받으며 가만 서 있었다. 그림자가 마당에 길게 누웠다. ‘보각국사 정조지탑’에서 ‘보각국사’는 일연 스님에게 내려진 칭호이고 비에는 일연 스님의 일대기를 담았다. 하지만 비각 속에 보관중인 비는 생각보다 초라했다. 부서지고 깨져 설명이 없으면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좌우 대칭이 심한 돌덩이가 서로 마주 보는 형상이다. 이것이다, 생각하고 봐도 원형을 짐작하기 어렵다.

인각사 극락전과 삼층석탑

비는 스님 입적 6년 후에 세워졌다. 글은 당시 문장가인 민지가 왕명을 받들어 지었고 글씨는 명필가로 유명한 황희지 글씨를 집자(集字)하였다. 문제는 스님이 돌아가시자 제자들이 너도나도 황희지체를 모아 비문으로 새겼고, 황희지 글씨에 탄복한 선비들은 줄을 서서 탁본에 열을 올렸다. 탁본을 잘 뜨려고 욕심을 부리다 비석을 넘어뜨리는가 하면 중국 사신들까지 경쟁적으로 탁본을 하는 바람에 심하게 마모된 데다 왜병들 손에 심하게 파손되었다.

이런 일화도 있다. 삼국유사에 ‘효선편’을 넣을 만큼 효를 중요시한 스님은 사후에 어머님 가까운 곳에 있기를 소망했다. 스님이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부도 자리를 두고 고민했다. 그러자 스님이 벌떡 일어나더니 사리탑 위치를 정해주었다고 한다. 그곳은 돌아가신 어머니 묘소와 가까운 곳이었다. 아침이면 부도에서 광채가 나면서 그 빛이 어머니 묘소로 반짝반짝 날아갔다고 한다.

일연스님은 삼국유사를 여든넷에 썼다. 첫머리는 단군신화로 시작된다. 하늘의 아들인 환웅과 웅녀가 결합하여 단군을 낳고 단군은 태백산에 나라를 세우고 그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 그 신화로 우리민족은 단번에 정체성이 확립되었고 뿌리는 완벽해졌다. 당시 몽고의 침입으로 굴욕적인 위기에 처했던 나라에 민족혼을 불어넣은 것이다. 신기하고 기묘한 이야기라 현실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지만 흔적 없이 사라질 수도 있었던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문화재청은 ‘삼국유사’의 4권과 5권‘을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보로 지정할 예정이라고 한다.

일연스님 삼국유사 특별 전시관

세월에 스치고 쓸려 얼굴이 뭉개진 석불좌상과 단아하고 소박한 삼층석탑, 그리고 일연스님의 생애기념관을 둘러본 뒤 학소대로 갔다. 산을 정확히 반으로 자른 형상이다. 그 아래로 위천이 흐르고 학소대가 반영된 물속은 물 밖보다 고요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저 반쪽이 있을 것 같다. 아침부터 밤까지, 봄부터 겨울까지 허리 아래를 강물에 담근 모양이 평생 자신을 담금질하며 성찰적 삶을 산 큰스님 같다. 물도 흐르고 역사도 흐르고 사람도 흐른다. 학소대는 강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정의할까.

글·사진= 임수진 수필가

◇주변에 가볼 만한 곳

△화산마을 (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북4리)= 해발 800m인 화산, 정상에 조금 못 미치는 높이에 둥지 튼 마을. 하늘 아래 첫 동네로 청정 지역이다. 바람개비 언덕에 풍차가 돌아가는 고즈넉한 낭만.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으면 군위댐이 절경. 맑은 날에는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볼 수 있다. 총총히 밝힌 별. 다 세지 못할 수도.

참고 문헌 : 한국관광공사, 둘레길 및 사찰 내 해설 안내판

수도사 마음을 낮추고~ 보화루를 통과해 극락전으로
수도시 원통전 관세음보살
인각사 뜰
인각사 보각국사비
인각사 보각국사탑과 석불좌상
인각사 비각 속 보각국사비
인각사 앞 학소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