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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을 걷다] 14. 다양한 공생이 이루어지는 숲은 향기도 가지각색
[팔공산을 걷다] 14. 다양한 공생이 이루어지는 숲은 향기도 가지각색
  • 임수진 수필가
  • 승인 2020년 07월 30일 18시 47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7월 31일 금요일
  •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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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속에 있는 동안엔 욕심도 시기도 성냄도 희석된다
오라지

영천시 신녕면 오라지는 특별한 건 없다.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저수지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나무 그늘이 깊어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늘이 펄럭였고 좁은 임도는 돌이 많아 울퉁불퉁하다. 다양한 공생이 이루어지는 숲에선 향기도 가지각색이라 딱히 무슨 향이라 구분하기 힘들지만, 코끝에 자연의 냄새가 기분 좋게 달라붙는다. 여름은 자연에 있어 절정기. 번식하고 열매 맺고 익어간다. 그 치열함의 열기를 식히려 이따금 바람은 숲을 흔들어대는지 모른다.

신원리 캠핑장 가는 길

오늘은 11, 12코스를 동시에 여행한다. 부귀사를 거쳐 신원리 캠핑장까지 총 11.3㎞이다. 한적한 길을 오로지 자연의 소리에만 의존하며 걸었다. 오가는 등산객 한 명 없어 둘레길 표식조차 반갑다. 바람은 소심하고 햇볕은 직설적으로 볕을 쏘아대지만, 이따금 나무 그늘에 정수리를 숨길 수 있어 다행이다.

아카시아 꽃튀김

밤나무에 근본을 아는 나무라는 포목이 걸렸고 아까시나무에는 봄에 꽃 튀김을 해 먹으면 별미라 되어 있다. 아카시 꽃 튀김. 그 맛이 궁금하다.

부귀사 가는 길
숲에 가린 부귀사
부귀사 뒤태

부귀사 뒤태가 보였다. 봉인되었던 불안이 해제되었다. 오는 도중에 멧돼지가 땅을 파헤친 곳을 여러 번 보았다. 그로 인해 조금 긴장했다. 절 앞쪽으로 내려갔다. 부귀사는 1481년(성종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과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 그 이름이 남아 있다고 한다. 억불정책으로 절이 폐찰되고 승려에게 환속을 강요하던 시절에도 요행히 명맥을 유지한 것이다. ‘산부수귀(山富水貴)’라, 산이 풍성하고 귀한 물이 있다는 뜻의 부귀사는 불기 1135년 신라 진평왕 때 혜림 법사가 창건했다. 참으로 아스라한 세월이다. 과거의 흔적에서 우리는 현재를 읽고 다시 시간을 켜켜이 쌓으면서 미래로 나아간다. 이 거대한 순환의 고리. 불교는 ‘겁’의 인연을 얘기하는데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 서 있는 것 또한 인연의 이치가 아닐까.

산부수귀 & 산이 있고 물이 있는 부귀사
보화루를 향해 한 계단씩

부귀사가 앉은 자리는 가풀막졌다. 지대도 높고 석축도 높다. 수십 개의 계단을 올라 보화루 앞에 섰다. 고개를 숙이고 마음을 낮춰 다시 일곱 계단을 올라 극락전 앞에 섰다. 그곳서 마주한 보화루는 강건하고 예스럽다. 오래된 맛이 주는 편안함.

문고리에 걸린 놋숟가락이 정감 있다

닫힌 문고리에 꽂힌 놋숟가락이 정겹다. 저기 마루에 걸터앉으면 앞산이 잡힐 것 같고 얼굴을 내밀면 하늘이 이마로 쏟아질 것 같다. 불교의 가르침은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는 것인데 매번 깨닫고 또 잊는다.

부귀사 극락전에서 바라본 보화루

천년을 훌쩍 넘긴 고찰은 소박했다. 무엇보다 고요했다. 법당도 절 마당도 비었다. 댓돌에도 고무신 한 짝 놓여 있지 않다. 어디에도 없는데 어디에나 있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조심스럽게 사진 몇 컷을 찍고 물러났다. 뻐꾸기가 운다. 참 구성지게도 운다.

둘레길 빨간 리본만 봐도 반갑다

다시 배낭을 짊어진다. 절 뒤편에서 이정목이 좁다란 오솔길을 가리켰다. 12코스 시작점이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잡목이 우거졌다. 사람이 낸 길이지만 사람이 찾지 않으면 자연은 금방 길을 지운다. 이곳은 멧돼지가 파놓은 구덩이가 더 많이, 더 자주 보인다. 놈들과 한번은 마주칠 것 같은 싸한 느낌. 구원자가 필요한데 등산로는 있지만 등산객이 없는 길이 한없이 이어진다. 그러다 만났다. 다행히 측면이었다. 더 다행인 건 새끼를 거느린 암컷은 아니었다. 크르렁. 놈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놈이 주둥이를 아래위로 흔들더니 숲 쪽으로 천천히 커다란 몸을 움직였다. 가슴이 쿵쾅거렸지만 뛰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고 조용히 걸음을 재촉했다.

향원에서 바라본 팔공산 능선
향원, 오색마루 마당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이정목이 반겼고 곧이어 정원이 예쁜 집이 보였다. 둘레길은 그 집 마당을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사유지라 잠시 머뭇거렸다. 마당에 사람이 보였다. 인사를 건넸다. 가정집은 아니었다. 향원, 오색마루라는 간판이 걸린 그곳은 천연염색과 민화 체험 교육을 하는 곳이었다. 안채에는 다양한 작품을 전시, 판매했다. 집 마당을 내주는 게 쉽지 않았을 거라고 하자 “길은 다니라고 있는 거지요.” 주인이 웃으며 말했다. 한때 등산 마니아였다는 그는 영천시에서 협조를 요청했을 때 흔쾌히 허락했다고 한다.

그에게 멧돼지 이야기를 했다. “홀로 떠돌아다니는 놈은 다 수컷이에요. 암컷은 새끼를 낳고 나면 수컷을 밀어냅니다. 새끼들도 고환이 발달하면 어미가 내쫓아요. 근친 간 짝짓기를 막기 위함이죠.” 그와 이야기를 하며 자연생태계의 사생활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보리수 열매 따 먹고 가요.” 뒤통수에 대고 그가 말한다. 빨갛게 잘 익은 보리수 열매는 낯선 이를 반겨준 주인의 인심만큼이나 달았다.

담쟁이 넝쿨이 휘감은 전봇대

거조사 들어가는 입구, 둘레길 정자와 이정목이 아기자기 조화가 기막히다. 파란 하늘을 장식한 뭉게구름은 갖가지 모양을 만들어냈고 팔공산 능선은 부드러운 곡선이 섹시했다. 신원리 오토캠핑장은 호암농원 방향으로 이어졌다. 도로는 넓었지만 포장은 고르지 않았다. 문제는 몸을 숨길 그늘이 없다는 것, 땡볕이 쏟아지는 길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칡넝쿨은 도로까지 손을 뻗었고 담쟁이는 전봇대를 휘감아버렸다. 넝쿨손에 청개구리 발가락처럼 생긴 흡반이 있어 뭐든 잡히면 집요하게 타고 오르는 담쟁이의 번식력이 놀랍다. 다행히 전봇대는 풍화될 염려가 흙집보다는 작아 보인다.

살구가 익어가고

개울을 옆에 낀 도로가 이어지고 군데군데 예쁜 전원주택도 보인다. 개발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은 옛 멋을 잃어버리지 않은 동네.

밭을 지키는 독수리 파수꾼

개망초 군락지에 우뚝 선 소나무는 정물화 같고 과일과 콩이 무럭무럭 자라는 널따란 들판은 허수아비 대신 독수리 연이 지킨다.

신원리 오토캠핑장

신원리 캠핑장은 계곡에 송림이 울창한데다 팔공산 기슭에 사는 바람이 시원해서 피서객은 더위를 한 방에 날려버린다. 들어오는 길이 꼬불꼬불 좀 멀지만 아름아름 찾아든 젊은 피서객으로 빈자리가 거의 없다. 만개한 그들의 행복을 훔쳐보다 개울에서 손을 씻었다. 손만 씻었을 뿐인데 발가락까지 시원하다. 자연 속에 있는 동안은 욕심도 시기도 성냄도 희석된다. 부적절한 지성으로 정신이 황폐해질 일도 적어 송림에서 나갈 땐 이성의 힘을 또 믿을 수밖에 없다.

임수진 수필가

◇근처에 가 볼만 한 곳

△ 거조사 (경북 영천시 청통면 거조길 400-67) =팔공산 둘레길12코스에 있는 거조사 영산전은 국보 제 14호이다. 불전 안에 석가 삼존을 중앙에 모셔두었고 총 526구의 석조 나한상을 봉안하고 있다. 무엇보다 조각상 한 분 한 분 모양이 다르며 표정에 각각의 특색이 있는 만큼 영험함도 소문이 자자하다.
 

그늘없는 길이 끝없이 이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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