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 마주하니 9개월의 여정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내려다 본 풍경

 


능성동 지경마을서 출발한다. 예부터 대구와 영천을 오갈 때 길목 역할을 했던 능선재(能城岾)는 지세가 성(城)과 닮은 데서 유래되었다. 오늘은 이곳서 팔공산 둘레길 종합안내 센터까지 총 3.69㎞를 여행한다. 태풍 마이삭과 하이선이 지나가고 한가위가 가까워져 오면서 9월은 더 깊어졌고 햇살은 얇아졌다. 불어오는 바람에서 가을 냄새가 난다.

 

석류는 농염하고

차로를 따라 길은 이어진다. 띄엄띄엄 농가와 카페가 보인다. 해바라기는 해를 찾아 고개를 돌리고 석류는 농염하게 익었다. 농가에 묶인 강아지는 아무 걱정 없는 천진함으로 서로 장난치며 꼬리를 흔든다. 모든 풍경이 오래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는 듯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익숙하고 평화로운 일상이 얼마나 행복한지는 코로나 사태가 일깨워주었다. 어제와 같은 하루, 오늘과 다르지 않은 내일.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에 큰 의미를 두지 않다가 냄새도 형체도 손과 발도 없는 바이러스로 평범한 일상이 멈추는 경험을 했다. 자유를 잃은 대신 소소한 행복의 중요성을 얻었지만 불안감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시간은 흐르고 삶은 지속되고 그 속에서 깨알 같은 즐거움이 싹을 틔운다.

예비군 교육장 벽화

곧이어 만난 예비군 교육장도 그중 하나다. 무표정한 회백색 벽을 그림으로 채워 분위기가 훨씬 화사하다. 핑크와 노랑, 살구, 초록은 색감이 부드럽고 웃는 고릴라와 교감하는 아이, 자전거, 풍선, 집과 별은 행인에게 즐거움을 준다. 벽화만큼 글도 사랑스럽다. ‘당신, 참 괜찮은 사람이야’, ‘오늘도 수고했어.’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기분 좋은 문구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란 시어는 울림통이 커서 감성을 툭 건드려 준다.

태풍 몇 개 벼락 몇 개

담벼락 사이 그 어디쯤. 시멘트 틈에 뿌린 내린 풀꽃을 발견했다. 정말이지 최악의 환경에 뿌리내렸다. 대추가 저절로 열리는 법이 없듯 이 풀꽃 또한 지금의 모습이 있기까지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인간은 동식물과 언어가 달라 교감이 쉽지 않다. ‘식물의 정신세계’란 책에서 백스터 박사는 식물도 기억할 수 있는지에 관한 실험을 했다. 이 실험에서 박사는 식물이 자기 동료를 잔혹하게 해친 범인의 얼굴을 기억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뿐만 아니라 교감과 지각 능력도 있었다. 해바라기가 해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넝쿨손이 허공을 더듬어 기생할 곳을 물색하듯 생득적 본능에 의한 풀꽃의 가녀린 몸짓이 치열해서 애틋하다.

이제 길은 직선에서 오른쪽 양방마을로 방향을 틀었다. 개울을 낀 임도를 걸었다. 동네 아저씨 한 분이 자신도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신다. 언제 받을지 어떻게 받겠다는 말도 없이 카메라를 향해 빙긋 웃으신다. 순박한 미소를 찍어드리자 커피 한 잔 마시고 가란다. 마음만 받겠다고 한 뒤 다시 길 위에 섰다. 이유나 대가 없이 정감 있게 다가와 호의를 베푸는 분을 가끔 만난다. 참 고맙다.

척박한 환경에 뿌리 내린 생명

늙은 호박이 밭두렁에 얹혔고 개집 앞에 납죽 엎드린 누렁이는 나그네야 지나가건 말건 심드렁하다. 동네 어귀엔 400여 년 넘은 부부 나무가 다정함을 자랑하고 벼는 누렇게 익어간다. 사람은 기껏 60년을 해로하는데 400년을 함께 한 나무는 어떨까. 부부 나무는 대부분 종이 다른 두 그루의 나무가 밑동이 붙은 채 자란 경우가 많은데 이곳의 나무는 서로 떨어져 같은 곳을 보고 있다. 봐라. 우린 이렇게 해서도 여태 살았다. 죽고 살기로 붙어 있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사랑의 의미를 생각하며 배추밭을 지나고 농가를 스쳐 도랑을 따라 걸었다. 둘레길이 아니었으면 볼 수 없을 콩밭과 고추밭이 있는 작은 두렁도 지났다.

풍경에 반하다

길의 끄트머리는 나무 계단이다.

순한 길이 이어지고
아름다운 둘레길

오르막이 이어지는데 힘들지 않은 건 산이 높지 않은데 다 고요하고 순한 지형이기 때문이다.

솔가리가 쌓여 푹신하다

약간 위험하다 싶은 곳은 난간이 잘 설치되었고 솔가리가 수북이 쌓인 길은 푹신했다. 사람의 외모가 제각각이듯 산도 개성과 특징이 있다. 이곳의 매력은 가장 둘레길답다는 것이다. 사람의 인체에 비교하면 골반과 허리 중간쯤. 그 언저리를 기분 좋게 한 바퀴 도는 느낌이랄까.

예비군 사격장 표지기

딱 하나 조심할 것은 근처에 예비군 사격장이 가까이 있으니 출입 금지 안내문이 있는 곳은 들어가지 않는 게 좋다.

갓바위 초입 & 둘레길 캐릭터와 완주기념 촬영

산 아래서 사람 소리가 두런두런 들린다, 이어서 나선형 나무 계단이 나왔고 내려서니 둘레길 시작과 끝 교차점인 만남의 광장이다. 9개월 전 이곳에서 여행을 시작했다. 완주 기념으로 다람쥐 캐릭터와 사진을 찍었다. 사실 며칠 전 운동하다 발목을 삐어 복숭아뼈에 실금이 갔다. 걱정했는데 마지막 코스를 기분 좋게 마무리해서 다행이다. 애초의 계획은 마지막 날 비로봉에 올라 비경을 관망하는 것이었는데 조금 아쉽다.

케이블카 타고~

대신 케이블카를 이용했다.

파라솔마다 행복이

야외식당 하얀색 파라솔 아래는 사람들로 빼곡하다. 음식을 먹는 사람들 이외는 대부분 마스크를 했다.

비로봉 철탑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주봉인 비로봉은 구름에 휩싸였다. 신림봉에는 세 개의 바위가 있는데 코끼리, 고인돌, 달마 바위이다. 날개를 펼친 봉황이 알을 품은 형상이니, 기(氣)가 맑을 수밖에 없다.

하트속에 가두다

식당 테라스를 내려와 소원바위를 지나 신림봉 바위 위에 섰다. 구름은 아직 비로봉을 보여주지 않는다. 주봉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봉과 서봉이 보였다. 낙타봉과 염불봉, 그 아래 골짜기를 타고 염불암이 들어 앉았다.

명산과 마주하니 머릿속이 비워지면서 지난 9개월간의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논두렁 밭두렁, 기암, 크고 작은 암자, 천년고찰, 계곡과 돌담길, 마을과 꼬부랑길 성벽과 석불까지 골고루 다 만났다. 덤으로 멧돼지와 뱀과 마주치고 벌에 쏘이기도 했지만 삶은 움직임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기에 팔공산 자락 자락을 기억 창고에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바위에 서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며 보이는 걸 본다.

잠시 멍 때리기

가끔 멍 때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사이 구름이 비로봉을 내놓았다.

하늘, 구름 그리고 솟대
팔공산과 솟대

솟대는 또 어쩌자고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비친 하늘빛과 저리도 궁합이 잘 맞는지. 가을로 가는 팔공산에 바람이 맞춤하게 분다.

서봉과 비로봉, 낙타봉을 배경으로

오늘로 팔공산 기행을 모두 마친다. 지지하고 응원해준 독자 여러분께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리며 주말마다 동행하여 사진 촬영을 도와준 남편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끝> 

글 : 임수진 수필가 · 사진 :박성규

◇주변에 가 볼만 한 곳

△염불암 (대구 동구 도학동 124)= 팔공산 염불봉 아래에 있는 절이다. 928년(경순왕 2)에 지어졌고 중창과 중수, 중건을 거듭해 오늘에 이르렀다. 염불암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많다. 옛날 이 암자에 있던 승려 한 분이 바위에 불상을 새길 것을 발원하였다. 며칠이 지난 뒤 암자 주변에 안개가 끼기 시작하였는데 사나흘이 지나도 걷히지 않더니 7일째 되는 날 안개가 걷혔다. 신기함과 범상치 않은 예감에 바위가 있는 곳에 가 보니 발원하였던 불상이 바위 양쪽에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염불암이라는 이름은 이 불상이 새겨진 바위에서 염불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갈림길에서 왼쪽
갓바위 가는 길
나선형 나무 계단
능성동 지경마을
늦여름 해바라기
당신 참 괜찮은 사람이야
벼는 익어가고
식당안에서 주봉을 훔치다
부부나무
사색하기 좋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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