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정 벗어난 젊은 왕, 불교사회 이상군주 '전륜성왕' 꿈꾸다

553년 진흥왕은 혈기방창한 스물한 살의 젊은이였다. 이때는 어머니 왕태후의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체제로 돌입한 지 3년째다. 이미 연호도 ‘개국(開國)’으로 바꿨다. 연호 ‘개국’에 걸맞은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지에 불타올랐다. 그는 희망으로 가는 출구를 인도의 아육왕에게서 찾았다.

황룡사 금당지에 있는 장육상 석가삼존상 대좌. 사진 앞에서부터 문수보살 대좌, 석가모니 대좌, 보현보살 대좌로 보고 있다.

아육왕(BC 265~238 또는 BC 273~232)은 아소카왕이다. 마우리아 왕조 3대 황제 중 한 명으로 인도 역사상 최고의 군주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불교사회의 이상적인 지배자를 뜻하는 전륜성왕의 모델이기도 하다. 왕위 계승 투쟁의 와중에 이복동생 99명을 죽인 피의 군주이며 무수한 정복 전쟁을 일으킨 정복왕이었으나 나중에 불교에 귀의해 성군이 됐다.

진흥왕은 700여 년 전 인도의 아소카왕을 롤모델로 삼았고 그를 뛰어넘는 군주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아소카왕이 피비린내 나는 살육 끝에 불교에 귀의해 전륜성왕이 된 것과는 다르게 그는 먼저 전륜성왕이 되고 나서 백성의 힘을 모으고 자신이 하는 모든 행위를 부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려 했다. 그 첫 사업이 황룡사 건립이었다. 신라 최대 규모, 민중들이 가장 우러러보는 사찰을 짓는 것이고 그 사찰 규모에 걸맞은 불상을 조성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이려면 민중의 고혈을 짜내야 한다. 불꽃처럼 터져 나올 지도 모를 민심 달래기가 최우선이다. 왜 우리는 황룡사를 지어야 하는가, 불상을 조성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은 『삼국유사』 ‘황룡사 장육’ 조가 잘 설명하고 있다.

구황사 모전 석탑지와 멀리 낭산 사이의 들판이 황룡사 장육상을 주조한 문잉림으로 추정된다.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왕위에 오른 지 14년 되는 계유(553) 2월 용궁 남쪽에 장차 궁궐을 지으려 하는데 황룡이 그 터에 나타나자 그만 고쳐서 황룡사라 불렀다. 기축년(569)이 되어서 주위에 담을 쌓으니 17년 만에 완공한 것이다. 얼마후 남쪽 바다로부터 큰 배 한 척이 와서 하곡현의 사포(지금의 울주 곡포이다)에 정박했다. 이 배를 조사해보니 첩문이 있었는데 거기에 씌어 있기를 ‘인도 아육왕이 황철 5만7000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장차 석가삼존상을 주조하려다 이루지 못해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운다’며 ‘부디 인연 있는 나라에 가서 장륙의 존귀한 모습을 이루소서’라고 축원했다. 아울러 부처상 하나와 보살상 둘의 모형도 실었다. 고을의 관리가 모든 것을 글로 써서 보고했다. 왕은 칙사를 보내 동쪽의 높고 밝은 땅을 골라 동축사를 세우고 세 불상을 모셔 안치했다.

구황사모전석탑지. 도림사지로 추정한다.

기다리던 봄이 왔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고 했다. 등극 3년 차의 왕은 새 궁궐을 짓겠다고 소문을 낸다. 그런데 궁궐터에 예기치 않게 황룡이 나타났다. 황룡은 오행사상에서 사방을 지키는 청룡 주작 현무 백호의 가운데 자리 잡는 성스러운 짐승이다. 중국에서는 황룡을 재수가 좋은 짐승, 서수라 불렀다. 왕은 황룡이 나타났으니 나라에 좋은 징조라며 궁궐 짓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그 자리에 황룡사를 세우겠다고 공약한다. 대역사에 동원돼야 할 민중들이 좋아했을지는 모를 일이나 왕은 절을 세워야 할 명분을 얻었다.

황룡사지역사문화관에 있는 황룡사 9층목탑 모형.

17년의 오랜 기다림 끝에 황룡사가 완공되자 남쪽 바다에서 하곡현 사포로 큰 배 한 척이 들어왔다. 엄청난 양의 황철과 황금이 실려 있었고 이 철과 금으로 장륙을 건립해달라는 아육왕의 편지까지 나왔다. 전륜성왕의 모델인 아소카왕이 장육상 건립에 실패했다. 진흥왕은 불상 건립을 통해 자신이 부처님의 지지를 받는 위대한 군주임을 입증하려 했다. 인도의 서천축(西天竺)에 대해 신라가 동천축(東天竺)이라는 자부심을 민중들에게 심어주려고 했다. 그리하여 동쪽의 밝고 높은 땅을 골라 동축사를 세우고 장육상의 모형인 세 불상을 그 절에 안치했다.

아육왕이 보낸 장육상 삼존불 모형을 안치했다는 울산 마골산 동축사.

현재 동축사는 울산시 동구 마골산(麻骨山)에 있는 조계종 통도사의 말사다. 동축사 가는 길은 절 아래까지 도로가 나 있지만 가파르고 험하다. 절 바로 아래 주차장에 도착하고서도 가파른 계단 길을 10분 이상 숨 가쁘게 올라야 한다. 규모가 작은 절이지만 절을 찾았을 때는 부처님 오신날 행사 준비로 바빴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칠성각·서향각·무량수전·범종각·요사채 등이 있다. 이들 건물이 들어선 마골산 터는 창건 당시 유행하던 평지가람형은 아니다. 따라서 창건 당시에는 사찰이 해안가나 평지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당시의 동축사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 유물로는 고려 중기에 제작된 동축사삼층석탑이 전한다. 범종각 뒤에서 동쪽으로 동해 바다가 한눈에 내려 보인다.

동축사 범종각 뒤에서 보는 울산 앞바다.

574년 황금과 구리가 든 총 무게 3만5007근의 부처와 두 보살상이 완성됐다. 불상은 황룡사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문잉림(文仍林)에서 조성됐다. 문잉림은 장육상을 만들고 130년 뒤 혜통스님이 독룡을 쫓아낸 곳이다. 신유림 천경림과 같이 신라의 성소였다. 높이 5~6m, 무게 21t 규모의 거대한 불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숲이 상당히 훼손됐을 것으로 보인다. 130년이 지나서 숲이 우거졌던 성소는 독룡이 살 정도로 무시무시하고 으스스한 곳으로 폐허화 됐던 것은 아닐까.

이 거대한 불상을 조성한 문잉림은 어디에 있을까. 정민 한양대 교수는 ‘정민 교수의 삼국유사 깊이 읽기 불국토를 꿈꾼 그들’(문학의 문학 간)에서 구황동모전석탑지(도림사지) 주변을 문잉림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했다. 정 교수의 주장대로라면 문잉림은 산업로를 가운데 두고 황룡사와 마주 보고 있다. 산업로 넘어 동쪽에 있는 들판을 말하는 것이다. 도림사지에서 낭산 북쪽 끝 지점까지의 들판이 문잉림일 가능성이 높다. 6세기 고대국가 기술로 21t 무게의 거대한 불상을 옮기려면 무엇보다 거리가 가까워야 한다. 장작을 마련하는 일도 우선 과제다. 금과 구리를 녹이려면 엄청난 양의 목재가 소용된다. 반드시 숲이 있어야 한다. 나무를 베어낸 공간은 불상을 주조하기 위한 다양한 작업장으로 활용하였을 것이다. 대역사를 소화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곳으로 문잉림이 가장 적당한 것이다.

장육상을 세운 진흥왕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큰아들의 이름을 동륜, 둘째를 사륜 또는 금륜, 셋째를 국륜으로 지었다. 이로써 왕은 하늘로부터 보륜을 얻어 세계를 통치한다는 전륜성왕이 됐다. 칼과 무력 없이 정의의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절대적 군주다. 진흥왕이 신라 제일의 정복군주로 우뚝 선 배경에는 이 같은 자부심이 동력이 됐을 것이다.

그는 이 같은 자부심을 바탕으로 재위 기간 동안 한강 유역과 함경도 일부 지역까지 영토를 크게 넓혔다. 북한산 창녕 황조령 마운령의 진흥왕 순수비와 단양적성비 등이 진흥왕의 위대한 업적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드디어 장육상이 황룡사에 들어섰다. 553년 황룡사 건축에 들어간 지 21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이듬해 불상에서 눈물이 발뒤꿈치까지 흘러 땅이 한 자나 젖었다. 그리고 한 해가 더 지나 576년 진흥왕이 죽고 진지왕이 왕위에 올랐다. 진흥왕은 선도산 자락에 묻혔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