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순 서풍 수용한지 200년만에 독자적인 문화로 꽃피우다

흥덕왕은 통일신라에 재위한 제42대 국왕이다. 흥덕왕릉은 국가 사적 제30호로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에 있다. 왕릉은 왕비인 장화왕후와 합장릉으로 왕릉을 둘러싼 안강 소나무와 더불어 널리 알려져 있다.

왕릉은 십이지신상으로 호석(護石)을 둘렀고 네 마리의 사자가 사방을 지키고 있다. 왕릉의 초입에 화표(華表)가 있고, 한 쌍의 무인상과 문인상도 왕릉을 호위하고 있다.

왕릉으로 진입하는 오른쪽에 흥덕왕릉비의 받침돌인 귀부(龜趺)가 여기저기 훼손된 채로 남아 있다. 귀부는 봉분(封墳)과 함께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크기를 자랑한다. 수많은 비편(碑片)으로 남은 비신과 사라진 덮개돌인 이수(螭首)도 컸으리라 짐작한다.

흥덕왕릉.

흥덕왕은 재위기간(826~836)이 그리 길지 않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기록물은 적지 않다. 많이 알려진 내용으로는 장보고에게 청해진을 설치하고 제해권을 장악하도록 한 것이다.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수입한 차를 재배토록 했다는 일도 알려져 있다. 정치적으로는 사치 금지령을 내리고 골품제를 신라 하대(下代) 현실에 맞게 정비하도록 하면서 개혁을 추진했지만 10년 재위 후반부의 일이라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흥덕왕릉비 귀부(가로346, 세로296, 높이140, 목둘레230, 비좌180×70cm).

흥덕왕은 소성왕과 헌덕왕의 친동생인데, 헌덕왕과 같이 소성왕의 아들 애장왕을 죽이고 차례로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흥덕왕의 왕비 장화부인은 소성왕의 누나였고, 정변이 일어났을 때 소성왕의 동생도 죽임을 당했다. 흥덕왕이 즉위한 지 두 달 만에 왕비가 세상을 떠났으니 그간 왕후의 상처 입은 마음을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보면, 흥덕왕이 재혼하지 않고 죽은 뒤 합장한 것을 순애보로만 볼 수 없을 것 같다. 흥덕왕이 끝내 재혼하지 않았고 왕비와 합장하라는 유언으로 같이 묻혔지만, 정작 왕비가 바라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왕릉을 지키는 사자상.

△웅장한 거북 받침돌

흥덕왕릉비는 흥덕왕이 세상을 떠난 836년 이후 세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비편으로만 남은 비문의 내용을 재구성하기도 어렵고 모두 전하는 것도 아니어서 정확한 연대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872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흥덕왕이 죽은 시기와 거리가 멀다.

왕릉의 십이지신상 중 용(龍)상.

어쨌거나 661년 이후에 세워진 무열왕릉비와는 200여 년의 차이가 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귀부의 크기가 비교할 상대가 없을 만큼 크지만, 그 조각 솜씨는 많이 뒤떨어진다. 또한, 엄청난 크기로 웅장함을 표현했지만 세밀함이 그에 따르지 못했다. 왕릉 호석의 십이지신상이나 네 마리의 사자상의 조각 솜씨는 매우 뛰어난데 왕릉비가 이렇게 보이는 점은 세월의 모진 풍파에 마모된 까닭인지 모를 일이다.
 

삼랑사비 비편.

△산산이 부서져 남아있는 비편

흥덕왕릉비는 폭이 180cm, 두께가 70cm에 이르는 거대한 비신이 있었을 것인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비편으로만 남아있다. 수습되어 전하는 비편에 대한 기록이 자료에 따라 다르다. 60여 개의 비편이라는 기록과 70여 개라는 기록, 심지어 90여 개에 이른다는 기록도 있다. 2002년 9월 ‘문자로 본 신라’라는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에 흥덕왕릉비편이 상당수 전시됐다. 소장처가 개인과 대학박물관, 경주박물관 등으로 나눠어 있어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흥덕(興德) 비액 탁본.

남은 비편을 통해 확인할 수 있거나 추정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내용이 있다. ‘태조 성한’이라는 비편을 통해 흥덕왕의 태조가 성한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태조 성한의 24대손이 흥덕왕이라는 점도 추정할 수 있다. ‘무역지인(貿易之人)’이라는 비편의 글씨도 있어 장보고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짐작되며, 수많은 다른 관직의 명칭도 등장한다.

특히 ‘흥덕(興德)’이라는 비석의 제목이 새겨진 비편도 탁본과 기록으로는 남아있는데 현 소장처를 알 수 없다. 또 비편을 통해 비문을 쓴 사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바로 통일신라 9세기 중반 최고의 명필 요극일이다.
 

요극일(姚克一) 비편.
요극일(姚克一) 비편 탁본.

△명필 요극일(姚克一)

요극일은 9세기 중반에 신라에서 활약한 서예가이다. 그의 생몰년은 미상이다. 『삼국사기』 열전 제48에 김생에 대한 전기가 실려 있는데, 그 말미에 요극일에 대한 기사가 다음과 같이 덧붙여져 있다.

“또 요극일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벼슬이 시중 겸 시서학사(侍書學士)에 이르렀다. 글씨에 드러난 힘이 힘차고 굳세었으며, 구양순의 필법을 터득하였다. 비록 김생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또한 보기 드문 솜씨였다.”

『삼국사기』 열전에 서가로 전기가 실린 인물은 김생과 요극일뿐이다. 이것은 삼국사기의 편찬자가 전문서가로 적극적인 평가를 내린 인물이 두 사람이라는 것으로 그들의 서예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사 중에 그가 시중을 맡았다는 기록이 없어 역사학자들은 ‘시중’이 아니라 ‘시랑’을 역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요극일의 서풍(書風)은 9세기 중반에 해당하는 상당수의 금석문에서 볼 수 있다. 이는 당시 요극일 서풍의 수요가 매우 많았으며 많은 사람이 이를 선호한 증거이며, 아울러 그의 서사 능력이 뛰어남을 증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서거정(1420~1488)의 ‘필원잡기’에서는 우리나라 필법으로는 김생 다음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이수광(1563~1629)의 ‘지봉유설’에서도 우리나라 서가의 이름 가운데 요극일을 들고 있다.

872년(경문왕 12) 8월 14일에 만들어진 곡성 동리산 태안사 ‘대안사적인선사탑비’의 글씨를 썼다. 이때 관직명은 중사인(中舍人)이었다. 그리고 3개월 뒤인 11월 25일에 완성된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를 썼다. 여기에는 그의 관직을 숭문대랑겸춘궁중사성(崇文臺郞兼春宮中事省)으로 표기하고 있다. 아마 문한 기구인 숭문대의 낭으로서 중사인 직책을 겸한 듯하다. 이 밖에도 박거물(朴居勿)이 지은 ‘삼랑사비’(三郞寺碑)를 쓴 것으로 『삼국사기』에 나온다.

요씨는 당나라에서 귀화한 성씨로 보이는데, 성덕대왕신종(771) 명문을 쓴 요단(姚湍)과 요극일이 통일신라에서 비교적 저명하다. 요단도 문한의 직책을 맡아 글씨를 남겼는데 요극일도 마찬가지이다. 이 둘은 재세기간이 1세기 정도 차이가 있으므로 요극일이 후손이 아닐까 생각한다.
 

태조성한(太祖星漢) 비편.

△시대를 뛰어넘은 가장 아름다운 글씨

흥덕왕릉비는 비록 수많은 조각으로 글씨가 남아있지만, 그 수준은 단연 최상이라고 생각한다. 비편의 글자를 보면 구양순 서풍의 뼈대를 잃지 않으면서도 붓끝을 살리고 있어, 유려하고 세련된 필치를 단번에 느낄 수 있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통틀어 이 글씨에 견줄 만큼 아름다운 구양순 서풍의 해서(楷書)는 아마 없을 것이다. 특히 세련됨과 치밀함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을 보여주는데, 한국과 중국과 일본을 막론하고 역대의 글씨 가운데 그에 필적할 만한 것이 드물다고 해도 지나친 평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흥덕왕릉비 비편.
흥덕왕릉비 비편 탁본.

요극일이 이런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통일신라의 서사 역량이 꾸준히 발전하면서 이루어졌다. 구양순 서풍을 본격적으로 수용한 무열왕릉비 이래, 왕실과 관련된 금석문에 줄곧 쓰이면서 변용되어 고도의 세련미가 응축(凝縮)된 결과로 보인다. 이런 요극일의 서풍은 9세기 중반 통일신라의 유행 서풍을 이끌었던 주요 작가라는 점에서도 중시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사진= 진복규 박사(포항중앙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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