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내 곳곳 시대를 풍미했던 명필들의 흔적 오롯이
문경의 유명한 절, 희양산 봉암사는 일반인들이 평소에 출입할 수 없는 곳이다. 십여 년 전 사월 초팔일 부처님 오신 날에 답사한 적이 있다. 마침 지난 10월 말에 답사객을 따라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국보와 보물이 깊이 간직된 봉암사
봉암사에는 귀중한 금석문이 여럿 있지만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여건이 아니어서 그 비중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감이 있다. 1963년에 보물 제138호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국보 제315호로 승격된 지증대사적조탑비와, 1963년에 보물 제187호로 지정된 정진대사원오탑비가 있고, 아직 지정되지 않은 조선후기 상봉대사의 탑비도 있다. 이 밖의 석비도 있을 텐데, 잘 알지 못한다. 절의 경내와 인근에 석각(바위 글씨)도 여럿 전하는데, 전해오는 이야기도 다양하다.
△지증대사 도헌의 탑비
지증대사적조탑비는 893년 신라 진성여왕 7년에 최치원에 의해 비문이 완성되고, 924년 경애왕 1년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지증대사적조탑과 짝을 이뤄 건립되었다. 세 칸으로 된 비각 아래 가운데는 비워두고 오른쪽은 지증대사의 승탑을, 왼쪽엔 탑비를 봉안했다.
비신은 남해에서 옮겨온 점판암으로 길이가 273, 폭이 164, 두께가 24cm 정도다. 전면에는 총41행, 각 행 89자 정도 새겨져 있고, 후면에도 비를 세우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다.
탑비의 주인공은 신라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문을 개창한 지증대사(824~882)이다. 속성은 김씨로 경주사람이다.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부석사에서 공부하다 17세에 경의율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지속적인 공부를 통해 중국 선종의 제4조 도신의 법맥을 계승하였다. 제자인 심충이 희양산 일대의 땅을 바치고 절 짓기를 청하여 주석하게 되었는데, 뒤에 신라왕이 봉암사란 절 이름을 내렸다. 헌강왕이 왕사로 삼았지만 사양하였고 봉암사에서 생을 마치니 왕이 지증이라는 시호와 적조라는 탑호를 내리고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였다.
△비문을 지은 고운 최치원
어릴 때부터 문장을 수련하고 당나라에 조기유학을 통해 과거에 급제한 천재, 고운 최치원(857~?)은 글씨와 문장에 두루 뛰어났다. 특히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령관 고병의 막하에서 4년 동안 일만여 편의 문장을 지었다고 술회하였다. 그 중 ‘황소를 토벌하는 격문’(격황소서)이 널리 알려졌다. 중국문학사에서 최치원은 사륙변려문에 뛰어난 작가로 인정되었다. 지증대사비문도 이러한 문체로 이루어졌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최치원이 귀국한 885년에 헌강왕이 이 비의 찬술을 명했는데, 8년이나 걸려 893년이 되어서야 비문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아 지은 것으로 지증대사의 생애와 업적은 물론, 신라 선종의 전래와 발전에 대한 역사가 심도 있게 서술되어 있다.
△83세 분황사 혜강 스님의 필력
비문의 글씨는 분황사의 83세 된 혜강 스님이 쓰고 새겼다고 비신 뒷면 끝부분에 나온다. 얼핏 보면 붓 가는대로 마구 쓴 것처럼 보이지만, 이모저모 자세히 살펴보면 상식적인 필체를 뛰어넘는 혜강 스님의 독자적인 서풍으로 상당한 수준의 명필이다. 더구나 83세의 고령으로 평생에 갈고 닦은 공력을 다 쏟아 쓰고 새겼을 것인데, 이를 고려하면 지나친 평가도 아닐 것이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이고 닳아 상한 모습으로 카메라의 줌 렌즈로도 선명한 필적을 확인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여러 탁본을 통해 아직까지 신채(神彩)를 잃지 않고 빛을 발하는 자태(字態)를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보물, 정진대사원오탑비
비는 고려 광종 7년(956) 이후에 이몽유가 왕의 명령으로 비문을 짓고, 당시의 명필 장단열이 써서 광종 16년(965)에 세웠다. 정진대사의 승탑은 봉암사 본사의 오른쪽 언덕 위 산 중턱에 있고 탑비는 절 입구 아래쪽 냇물 건너편에 있다. 귀부와 이수가 잘 갖춰져 있는데, 지증대사비와 건립시기와 거리가 멀지 않아서인지 겉으로 보기에 닮았다. 이수의 가운데 비액의 자리를 액자처럼 따내고, 거기에 ‘정진대사비명’이라 전서로 새겼다. 비신은 길이 273, 폭 164, 두께 26cm이다. 청석의 비신에 정간(井間)을 쳐서 2cm 내외의 글자로 비문을 새겼다.
정진대사 긍양(878~956)은 공주 출신으로 속성은 왕씨이다. 법명은 긍양이고 시호는 정진이며, 탑호는 원오이다. 어릴 때 출가하여 남혈원 여해의 제자가 되었고, 서혈원 양부에게도 배웠다.
899년(효공왕 3)에 당나라에 가서 도연선사에게 배웠다. 924년(경애왕 1)에 귀국하여 백암사에 주석하였으며, 935년(경순왕 9)에 봉암사에 자리하였다. 그 후 고려 태조와 광종에게 불법의 요체를 가르쳐 존경을 받고 956년 봉암사에서 입적하였다. 선종과 교종의 융합을 견지하였고, 고려 초 봉암사의 중창을 주도하였다.
△고려의 문장가 이몽유
비문을 지은이는 고려 초기 광종 대부터 성종 대의 뛰어난 문신으로 시호는 정헌이다. 현종 18년(1027)에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덕종 대에 사공에 추증되었다. 구체적인 생몰년이 미상이다.
△고려 초의 명필 장단열
광종 대의 가장 뛰어난 서예가로 문신인 장단열이 비문 글씨를 썼다. 이 비문을 쓸 당시(965, 광종 16) 한림원 서학박사의 직위에 있었다. 고려 초기의 서예가 중 가장 정제되고 세련된 글씨를 쓴 것으로 보인다. 초당(初唐)의 서예가 중 구양순 서풍의 토대 위에 우세남의 필치를 더해, 고려인의 미감으로 변용한 글씨이다. 이 비문과 아울러 쓴 고달원 원종대사혜진탑비(975, 광종 26년 건립)가 남아 있는데, 모두 지금 글씨를 배우는 교본으로 쓴다 해도 아주 훌륭하다.
△상봉대사비
정진대사비의 왼쪽에 휴휴암이 있고 그 왼쪽 언덕에 상봉대사비가 있다. 연꽃 장식을 조각한 비석의 받침인 대좌와 지붕 모양의 개석을 갖춘 조선 후기 탑비이다. 1709년(숙종 35) 이후 작성되어 1716년(숙종 42)에 세웠다. 올해 여름에 지방문화재 지정 심의 대상이 되었는데, 결과를 알지 못한다.
상봉대사(1621~1709) 정원은 속성이 김씨로 평안도 영변에서 태어나 일찍이 선천장로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여러 대사에게 배워 선지식과 화엄경에 정통하여 많은 제자가 있었다. 봉암사에 있을 때, 당나라 규봉 종밀 대사가 쓴 글과 보조국사 지눌의 저작을 연구하여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 후에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서 입적했다.
△이덕수가 짓고 윤순이 쓰다.
비문을 지은이는 숙종 연조 연간의 문장가 이덕수(1673~1744)이다. 박세당과 김창흡의 문인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 대사헌, 공조와 형조의 판서를 두루 거쳤는데, 특히 문장에 뛰어났기에 대제학을 역임했다.
비문의 글씨를 쓴 이는 백하 윤순(1680~1741)이다. 조선 후기 이른바 ‘동국진체’의 서장을 열어젖힌 옥동 이서의 친구인 공재 윤두서의 친척으로, 이들의 영향을 받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서법을 연구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제자인 이광사와 더불어 조선 후기 명필로 일컬어진다. 시문과 서화에 두루 뛰어났을 뿐 아니라, 과거에 급제해 이조참판으로 대제학을 겸하고 공조 예조의 판서를 거쳐 경기도와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이 비는 그가 30대에 쓴 것인데, 자신의 서풍을 정립한 초기의 글씨로 세련됨과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하다. 왕희지의 행서풍을 재해석하여 당시 ‘백하체’로 선망을 받아 많은 금석문과 왕실의 문자를 써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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