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부터 고속철도까지 수도권-영남 잇던 관문, 새로운 모습으로 열린다
한강 연안과 낙동강 연안을 따라 서울에서 부산에 이르는 가장 짧은 노선이라 1905년 1월 1일 경부선철도가 개통되기 이전까지 가장 번화한 관문이었다.
말(馬)에 의해 이뤄졌던 교통수단이 철마(鐵馬)라는 기차로 대체되고, 자동차가 출현해 발전하면서 경부선축이 지금처럼 됐다. 그 이전 걷거나 말 타고 다닐 때 경부선 중심축이었던 문경새재는 120여 년을 고요한 아침의 골짜기로 잠자고 있었다.
조선통신사가 넘나들었고, 왜적의 침략통로여서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던 이 길과 관문이 그렇게 퇴락하고, 그 이야기들이 전설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문경새재‘영남의 관문‘이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 2004년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개통되고, 20여 년 만에 중부내륙고속철도가 개통을 앞두고 점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험준한 산맥 사이로 터널이 뚫리고, 문경읍 마원리에 문경역이 건설되고 있다. 새로운 영남의 또 다른 관문이 만들어 지고 있다.
문경읍 마원리는 이곳을 통과하는 길이 생길 때마다 정거장이 되는 지정학적 위치에 놓여있다. 마원(馬院)도 말이 통과하던 길일 때 정거장이란 뜻이고, 마원은 문경현 읍성 앞에 있었다.
문경의 역사는 현재 문경읍으로부터 시작된다. 지금의 중심지인 점촌은 1925년 경북선 개통과 함께 근대에 들어 발전한 도시고, 1949년 군청이 문경에서 점촌으로 이전하면서 발전했다. 그 이전에는 문경이 문경시의 중심지였고, 마원리는 이런 문경의 읍성 밖 남쪽 가장 가까운 마을이었다.
읍치와 마원리 사이에는 문경새재에서 발원하는 조령천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조령천 남쪽 마원리는 1, 2, 3리로 구분돼 있는데, 1리는 오서골, 2리는 새터, 용막골, 3리는 우무실이다.
그중 1리, 2리는 소야천 서쪽 신남면(身南面)에 속했었고, 여기를 마포원리(馬砲院里)라 했다. 3리 우무실은 소야천 동쪽 신동면(身東面)에 속했었고, 정곡리(井谷里)라 했다. 그러다가 1914년 군면 폐합 때 문경면에 편입됐으며, ‘마판(馬板)’이라고도 했다.
△천지개벽 앞둔 마원리.
지금 마원리는 중부내륙고속철도 문경역이 들어서면서 천지개벽하고 있다. 크게는 영남의 또 다른 새로운 관문이며, 작게는 문경 신도시가 들어서게 되는 곳이다.
고속철도가 개통되면 서울까지 1시간 19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여객과 화물 운송을 주로 담당할 문경역은 총 승하차 인원을 1천 명대로 예상하고, 이곳에는 철도역사, 승강장, 화물 적하장, 주차장, 버스정류장 등의 부대시설도 갖춰진다. 역세권은 35만7천㎡ 면적에 주거, 상업, 기반시설용지 등을 조성한다.
이 철도의 개통이 다소 늦어지게 돼 2023년 개통이 불투명하지만, 멀지 않은 장래에 이 마을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을 사람들, 인근 읍치 사람들, 문경시민들은 아직 머지않은 미래의 마원리 변화에 대한 감각이 무딘지 문경역사 공사 현장 외에는 고요하다.
백두대간 구간에 우뚝 솟은 백화산 골짜기는 깊고, 그 자락은 넓다. 그곳에 마원리는 터를 잡고 문경의 진산 주흘산과 백두대간의 암봉 조령산을 등에 지고 있다. 마을 뒤로는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수십m 높이의 교각으로 놓여있고, 앞에는 3번 국도가 4차선으로 내달린다.
산자락 비탈에는 문경의 특산품인 사과 과수원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그 앞 들판 ‘새재들’에는 벼가 주종을 이루는 가운데, 사과 과수원, 연꽃 단지 등이 결실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이 ‘새재들’ 한복판인 마원리 176-3번지에는 ‘전도석불망비(錢道碩不忘碑)’가 있었다·18세기 초반 문경현에는 화전세(火田稅)를 함부로 거둬 사회문제가 됐는데, 이 문제를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兼 五衛將) 문경전씨(聞慶錢氏) 전도석(錢道碩·1751~1813)이 영구 해결하고, 흉년에 일천석을 희사해 난국을 해결했다. 또 그 아들 전덕래(錢德來)도 훗날 흉년에 이백석을 희사했다.
전도석 오위장의 이런 행적은 일성록(日省錄) 같은 공식적인 기록에 확인되고 있어 여느 불망비 주인공들과 다른 면을 보인다. 문경 9개 면민은 이런 전도석 오위장이 돌아가시자 4년 만인 1817년 3월에 이 비를 세웠다. 현재는 터만 있고, 비석은 마성면 모곡리 산69-3번지 문경전씨시조묘원으로 옮겨놓았다.
마원1리 입구 왼쪽 언덕에는 ‘천주교 마원성지’가 있다. 문경에는 이 외에도 천주교 성지가 많은데, 나라의 박해(迫害)를 피해 인적이 드문 산골로 교인들이 숨어든 탓이다.
이곳에는 천주교 안동교구 문경지구 사목협의회가 세운 ‘순교자의 피는 신앙의 씨앗’이라는 비석이 있고, 이 비석에는 마원성지 조성 내력이 기록돼 있다.
비석에는 ‘1784년 복음의 빛이 이 땅을 비추자 박해의 어둠은 이를 가로막았다. 이에 충청도의 많은 교우들은 문전옥답도 마다하고, 소백산 기슭에서 화전(火田)을 일구며 애주애인(愛主愛人)의 신앙생활을 했다. 병인년 대박해 때는 문경의 한실, 여우목, 건학, 불억이 등지에 살던 많은 교우들도 홍주, 상주, 대구에서 순교했다. 그중 순교복자 박상근 마티아의 묘를 마원1리 박시록 야고보와 함께 문중 산에서 찾아 순교자의 신앙을 기리며 본받기 위해 1985년 9월 순교자 성월(聖月)에 이곳으로 옮겨 모셨다’고 기록돼 있다.
마원성지는 결국 ‘순교복자 박상근 마티아의 묘’를 기반으로 조성됐으며, 묘비에는 박상근 마티아의 순교 내력이 다음과 같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박상근 마티아(1836~1866)는 문경현 아전(衙前)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했고, 관아(官衙)에서 신자들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많은 도움을 주었다.
평소 숙모 홍 마리아와 친척들은 물론 이웃 사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열심히 가르쳤고, 어린이들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으면 언제든지 그곳으로 달려가서 대세(代洗)를 주었다.
칼레(N.Calais, 姜) 신부로부터 정사를 받는 행운을 가졌던 박 마티아는 병인박해가 일어나던 1866년 3월 중순경 좁쌀을 사기 위해 지금의 경북 문경시 마성면 상내리의 한실로 갔다가 그곳에서 칼레 신부를 만나 문경읍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모셔와서 숨겨드렸다.
3일째 되는 날, 칼레 신부가 이웃 주민들에게 들키자 급히 한실로 되돌아가기 위해 산길을 오르던 중, 칼레 신부는 허기가 지고 지쳐 도저히 동행할 수 없는 마티아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했다. 그러자 마티아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신부님! 제가 신부님을 떠나다니요? 혹시 한실도 포졸들이 급습해 폐허가 됐다면 신부님께서는 어디로 가시렵니까? 은신할 곳이 없지 않습니까? 신부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함께 가겠습니다. 신부님이 이 험한 곳에서 돌아가신다면 저도 기꺼이 같이 죽겠습니다.”
결국 칼레 신부의 ‘돌아가라’는 간곡한 명에 순종해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온 박상근 마티아는 얼마 후 숙모 홍 마리아와 친척 박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돼 상주 관아로 끌려가 온갖 문초와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분명하게 ‘천주교를 봉행한다’는 대답으로 신앙을 증거했다.
당시 상주 옥에는 문경 근처에서 잡혀 온 교우들이 많이 있었는데, 형벌을 받고 옥으로 돌아온 마티아는 교유들에게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자’고 권했고, 많은 교우들이 용기를 내어 순교하기에 이르렀다.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 마티아는 30세의 나이로 상주 옥에서 교수(絞首)형으로 순교했는데, 형이 집행되기 전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를 불렀다고 전한다.
순교 후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고향에 안장했고,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으로부터 시복(諡福)의 영예를 얻었다.
묘 뒤에는 ‘장한 믿음, 장한 우정’ 동상이 서 있다. 대형 십자가 좌우에 사도 칼레 신부와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상을 세운 것이다.
경북의 사도 칼레(Calais, 姜·1833~1884)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1860년 7월 5일 사제서품을 받고, 이듬해 4월 7일 한국에 입국해 1866년까지 5년 동안 경상북도 서북지역에서 사목활동을 했다.
1866년 병인박해로 여러 차례 체포될 위기를 넘기고 한실 부근 산속에 숨어 있다가 그해 10월 페롱(Feron, 權) 신부와 함께 한국을 탈출해 중국으로 갔다. 그 후 여러 차례 재입국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병인박해 때 얻은 병까지 악화 돼 프랑스로 귀국했다.
1869년 4월 시토회 수도자가 돼 모백(Maubec) 수도원에서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일생을 바쳤다.
칼레 신부가 파리외방선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와의 우정 어린 이야기를 전해 이 성지가 종성된 것이다. 문경시 문경읍 마원리 599-1에 있다.
마원리 인근 마성면 모곡리에 거주하다 돌아가신 독립운동가 외재(畏齋) 정태진(丁泰鎭) 선생은 마원리를 배경으로 ‘차 이운경 신기10영(次李雲卿新基十詠)’을 읊었다.
마원리에서 보이는 고모성(姑母城), 취적대(吹笛臺), 봉명산(鳳鳴山), 옥녀봉(玉女峰), 주흘산(主屹山), 쌍천(雙川), 조천(潮泉), 금대(琴臺), 성주봉(聖主峰), 백화산(白華山) 등 열 곳을 7언절구(七言絶句) 한시로 읊은 것이다.
본래 신기십영을 읊은 이운경 선생은 마원2리에서 선비로 살다가 2000년에 돌아가신 남강(南岡) 이원영(李源榮) 선생의 아버지, 양전(良田) 이상호 (1883~1963) 선생이다.
외재 선생은 1940년대 말부터 10년 이상 마성면 모곡리에 거주하다 돌아가셨으며, 1919년 4월 우리나라 유림들의 3.1운동인 ‘파리장서’에 서명한 137인 중 1인으로 학식이 뛰어나고, 기개가 있었으며, 외세에 굴하지 않은 꼿꼿한 선비였다.
외재와 양전은 젊은 시절 영주와 안동에 살면서 한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했고, 일제강점기 때 외재는 마성면 모곡리로, 양전은 문경읍 마원2리로 이주해 가까이에서 만년을 보냈다.
그래서 두 선비는 수시로 왕래하면서 시를 짓고,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우리나라 현대화 직전까지 전통 선비들의 생활 모습을 이 지역에 이어 보였다.
그런 분들이 교유하던 흔적이 사라졌다. 문경역이 들어서고 있는 바로 그곳에 남강 선생의 작은 서재가 있었는데, 문경역 공사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루아침에 사라졌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마원리 동산 서쪽 기슭에 대나무 울타리 속에 작은 집에 하얀 학같이 계시던 어르신들의 모습이 마원리 역사 공사 현장에 어른거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