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마다 다른 매력…'동양의 피카소' 남관 화백 감수성 자라난 곳

청송 명품 자작나무 숲

봄·여름·가을·겨울, 철마다 새로운 빛깔로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향기를 뿌리고 나들이 가는 처녀의 설렘을 간직한 고장 부남면 구천리는 ‘동양의 피카소’라 불리는 남관 화백이 태어난 곳이다. 그가 태어나고 묻힌 곳을 따라가다 보면 물과 산, 들이 어우러져 자연이 만드는 섭리가 미치지 않는 골이 없다. 구천(九川)이라는 지명은 한자로 아홉 구와 내 천 자를 쓴다. 이 골짝 저 골짝 물이 구천리에서 만나 아홉 구자 형태로 마을을 감싸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쪽에서 흐르는 천이 아홉 구 자로 마을을 감싸고 있어 가뭄이 들지 않는 동네다. 1959년 태풍 사라호 때 특히 경상도가 큰 피해를 봤는데 다행히 이 곳은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나오지 않았다. 섬 같은 동네치고 사람이 다치지 않는 걸 보면 물길이 가파르지 않고 순해서 그랬을 게다.”

“옛날에는 구천이 면 소재지였는데 그 당시 문자 꾀나 쓰던 양반들이 장날 때 시끌벅적함이 싫다고 해 지금의 대전리로 면 소재지가 옮겨갔는데 그 때만 해도 공자 왈 맹자 왈 하던 양반들 눈에는 이골 저골에서 모이는 장꾼들의 투박함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마을 최고 어르신 장영세 (88세)씨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 올라간다.

오랜 세월 동안 구천리에 터 잡은 사람들은 하늘에 기대어 땅만 바라보고 살아온 지라 온화하고 순박해 땀 흘리지 않은 것은 탐하지 않는, 농부의 마음이 뼛속까지 차 있다. 전국 최고 품질을 자랑하는 사과의 고장 청송이기에 부남면 구천리 주민 대부분은 사과농사 로 생계를 꾸리고 있어 가는 곳마다 길 양쪽을 따라 사과나무가 가로수처럼 늘어서 있다.

봄에는 새하얀 사과꽃이 벚꽃이 시샘할 정도로 흐드러지게 피고 가을이면 빨강 노랑 사과가 뜨거웠던 여름 햇살 속에서 단단하게 담금질 되어 주렁주렁 탐스러워 길손들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세월이 가고 시대가 변하면서 도시로 떠난 사람들은 돌아올 줄 모른다. 동네마다 덩그렇게 서 있는 덩치 큰 학교는 옛날의 전성기를 추억하듯 외로워 보인다. 고향이 싫어 떠난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대부분 먹고 먹이는 문제로 떠났을 것이다. 1년에 딱 두 번, 추석, 설이면 고향을 찾는 사람들이 하는 옛이야기로 모처럼 생기를 띤다. ‘일년내내 이랬으면 좋으련만’ 짙은 아쉬움은 고향 정을 바리바리 담아 다시 도시로 떠나는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 눈 속에 가득하다. 캄캄한 밤하늘 총총히 박혀있는 별은 점점 희미하게 비어가는 마을을 위로하듯 더 초롱초롱 빛난다.

구천리와 이웃하고 있는 대전리 항일의병기념공원에서 출발해, 구천이 낳은 대 예술가 남관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본다.

청송 항일의병기념공원

△항일의병기념공원(부남면과 주왕산면 경계, 꽃밭등에 위치)
전국에 하나뿐인 항일의병기념공원이 작은 지자체 청송에 세워진 이유는 청송이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의병 유공 선열들이 전국에서 가장 많이 배출한 충의의 고장이기 때문이다.

신식 일본제국주의 군대 위력에 굴하지 않고 호미, 쟁기 대신 죽창 들고, 낫 들고 산불처럼 일어났던 의병들은 훈련된 군인이 아니라 오랜 세월 이 터에서 욕심 없이 소박하게 살아가던 농민들이었다.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터를 부모 자식처럼 섬기는 그 애착이 분노로 화해 우리 민족의 터를 노략질하러 들어온 왜놈들에게 성난 혼불처럼 번졌을 것이다.

죽을 자리가 확실할 때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 자리로 뛰어들었던 그 숭고한 의병정신은 항일의병기념공원에서 생생히 살아 숨 쉰다.

청송 남관 생활 문화센터

△남관화백기념관
세계적인 비평가 가스통 디일은 “남관은 동서양 문화 어느 일부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둘을 융합시킬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대예술가” 라는 극찬을 하였다. 남관화백기념관에 가면 한국의 피카소 남관이 남긴 불멸의 작품들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개인으로서 남관 화백 작품을 다량 보유하고 있는 조위래 씨(59)는 “남관이 태어난 고향에 이런 예술의 장이 생겨 감격스럽다” 며 “오랫동안 남관의 작품을 수집했는데 기회가 되면 이 곳에 전시하고 싶다” 는 포부를 밝힌다.

대화가의 고향임을 말해주듯 남관이 태어난 구천 삼거리 생가터 맞은편에는 박순옥 할머니의 작고 소박한 화방이 있다. 구천삼거리가 남관 선생 생가터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지만 50년이 넘는 세월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이 작은 구멍가게를 모르는 이가 없어 오가는 사람들에게 작은 쉼터가 되어준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지만 남관 생가터라는 작은 표시 하나가 아쉽다.

청송 병암서원

△범더미에서 병암까지 물길 따라 걷는 올렛길, 그 끝에 병암서원
남관 화백이 태어난 구천리에는 구천숲이 있다. 옛날에는 몇 미터 앞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 풀과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차 범이 살지도 모른다고 해 붙은 이름, 범더미. 지금은 과할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범 대신, 텐트 여행객들이 계절마다 꽉 꽉 들어차 있다.

청송 병풍바위.

맑고 시원한 물과 온종일 머무는 그늘이 좋아 여름이면 자리 쟁탈전이 벌어진다고 한다.
여름이면 누구보다 바쁜 박재철 구천이장은 “ 범더미는 마을 청년회에서 자치로 관리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며 “공짜다 보니 이용 규칙도 없고 오는 사람들도 무질서한 경우가 많아서 관리에 어려움이 있는데, 지자체에서 구체적인 조례를 만들든지 해서 적정한 이용요금을 받으면 마을 자치로 하는 숲 관리가 훨씬 수월하겠다” 고 말한다.

청송 구천숲과 병풍바위로 이어지는 올렛길

범덤 숲에서 기암 절벽 병암까지는 편한 나무데크로 연결되어 오른쪽으로 물길을 따라 걷기에 좋은 곳이라 마을 주민들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병풍을 두른 듯 하다’ 해 병암이라 하였다. 가을이면 여름 내내 파랗게 절벽을 기어오르던 넝쿨들이 빨갛게 물들면서 멋진 포토존을 만들어 낸다.

병암을 왼쪽으로 바라보고 있는 병암서원은 숙종 28년에 지역 유림이 건립해 사액을 받았다. 나라 경제를 좀먹는다는 명분으로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882년 복원되었다. 몇 번 이전을 거쳐 1993년 본채와 동, 서재를 현재 자리에 건립하였다.

청송 명품 자작나무 숲

△숨어 있는 하얀 진주 같은 곳, 명품 자작나무숲 (부남면 화정리 무덤실)
병암에서 5㎞ 정도 떨어진 남관이 잠들어 있는 곳, 무덤실 이라는 동네가 있다. 부남면에서도 오지 중에서 오지로 꼽힌다. 무덤이라는 비호감 이름과는 달리 ‘춤을 추는 산 능선’ 이 실재 뜻이라 다행이다. 불편함 없는 임도를 따라 2㎞ 정도 산길을 오르면 별 기대 없이 찾았던 이들의 시선을 압도하고도 남을 만큼 명품 자작 숲이 나타난다. 불과 2~3년 전 만 해도 조개껍질 속에 조용히 숨어 있는 하얀 진주 같은 곳이었는데 요즘은 띄엄띄엄 사람들과 마주친다.

일주일에 두 세 번은 꼭 이 곳을 찾는다는 황미영 씨(52, 여)는 “ 집 가까운 곳에 이런 멎진 숲이 있다는 사실이 큰 행운이다” “길이 나쁘지 않아 나이 많은 어머니도 먼저 나서서 가자고 한다” 며 “이제는 제법 입소문으로 알려져 꽤 많은 사람들이 찾지만 처음 마주쳤던 그 모습 그대로 잘 보존이 되었으면 좋겠다” 고 말한다.

계절마다 나름 색다른 매력을 품은 숲이다. 자작이 뿜는 하얀 빛은 여름에는 청량감을 주고 겨울에는 생동감을 준다. 눈이 오는 날이면 산 전체가 겨울왕국으로 변해 아무도 밟지 않은 원시림의 고요함을 간직한 숲이 된다.

윗길, 아랫길이 있다. 둘 다 좋지만, 의미와 재미는 다르다. 윗길은 하늘과 맞닿은 느낌, 파란 하늘과 하얀 자작이 깔끔한 조화를 이룬다. 아랫길은 그늘이 깊다. 짙은 흙냄새, 풀냄새를 품었다. 윗길은 하늘과 친하고 아랫길은 땅과 친해,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룬 명품 자작 숲이다. 이 길을 가고 싶을 때가 있고, 저 길을 가고 싶을 때가 있다. 우울할 땐 윗길로 가기를, 즐거울 땐 아랫길로 가기를 추천한다. 우울할 땐 밝은 기를 불어넣고, 즐거울 땐 차분한 기를 불어넣는 것, 이 또한 음과 양의 조화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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