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에 포로 잡혀가서도 변절 않고 절개 지킨 ‘충절의 아이콘’
‘김완이 쏘아 올린 불화살’ 임진왜란 해전 첫 승을 이끌다
1591년 12월, 이순신(李舜臣·1545-1598)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했다. 그때 김완(金浣·1546-1607)은 사도첨사(蛇渡僉使)였다.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사도첨사 김완의 첫 만남은 아름답지 못했다. 최악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1592년 2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2개월 전. 이순신은 관할 지역의 전쟁 준비상태를 일제 점검했다. 점검결과 전라좌수영 관할 여도·녹도·사도진 등 다섯 개 수군진 가운데서 사도진의 방비가 가장 허술했다. 군관과 서리를 처벌했다. 그것도 모자라 첨사를 보좌하는 교수를 파직하고 진영 총책임자인 첨사 김완을 잡아들였다. 이순신의 불신은 한 달이 지난 뒤에도 여전했다. 김완이 나로도, 외나로도, 대평도, 소평도를 모두 자신이 수색했다고 보고하자 이순신은 “겨우 반나절 만에 내나로도, 외나로도, 대평도, 소평도를 다 조사하고 그날로 돌아왔다고 보고하니 너무도 거짓이 심하다”고 ‘난중일기’에 적었다.
이들의 불화는 시쳇말로 라인(line)이 달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일본의 침략이 우려되자 선조는 1589년 무신 불차채용 명령을 내렸다. 연공과 서열에 관계없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우수한 인재를 요직에 앉히는 ‘발탁인사’였다. 녹둔도 전투 이후 파직돼 집에 있던 이순신은 영의정 이산해와 우의정 정언신의 복수 추천을 받아 종6품 정읍현감으로 복귀했다. 그 뒤 어린 시절 한양 건천동에서 함께 자랐던 ‘동네 형’ 류성룡의 추천으로 진도군수를 거쳐 정3품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고속 승진했다. 반면 김완은 이순신이 정읍현감으로 복귀했을 때 종3품 사도첨사였다. 김완을 사도첨사로 발탁한 사람은 전라도 관찰사인 이광(李洸·1541~1607)이었다. 이순신은 김완을 신뢰하지 않았고 김완을 신뢰하는 직속상관 이광을 떨떠름하게 생각했다. 김완 역시 고속 승진한 비슷한 연배의 상관이 달가웠을 리 없을 터였다. 실제로 조정내에서도 이순신의 고속승진을 놓고 낙하산 인사가 아니냐며 논란이 일기도 했다.
△옥포해전 척후장으로 왜선을 격파.
이순신에게 미운털이 박혔던 김완은 막상 전쟁이 벌어지자 눈부신 활약을 하며 이순신의 신뢰를 한몸에 받았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첫 해전인 옥포해전에서 김완에게 맡긴 첫 임무는 척후장이다. 조선의 운명을 바꾼 임진왜란의 첫 해전은 김완의 ‘불화살’을 신호로 시작됐다. 5월 7일 정오, 정찰 나갔던 김완이 옥포만에서 50여 척의 적 선단을 발견하고 신기전을 쏘아 올렸다. 이순신은 전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 등 모두 85척과 원균의 전선 4척, 협선 2척과 합세해 전함대를 동시에 출격시켰다.
상대는 일본 정예수군 선봉인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선단이었다. 적들은 옥포만에 배를 정박시키고 육지에 올라 노략질에 정신이 없었다. 조선 수군은 적들을 포위하고 포격을 퍼부어 26척을 격파했다. 임진왜란 첫 해전을 대승으로 이끌었다. 이후에도 김완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6월 7일 아침, 율포에 적선이 나타나자 이순신은 복병선을 출동시켰다. 적선 5척이 달아나자 사도첨사 김완이 그중 1척을 잡아 왜군 32명의 목을 베었다. 이로써 이순신은 김완을 완전히 신뢰하게 됐다.
김완은 경북 영천사람이다. 지금의 영천시 자양면 노항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언수(彦粹), 호는 사성당(思誠堂), 선조가 내려준 사호(賜號)는 해동소무(海東蘇武)다. 고조부는 청풍부사를 지낸 김계돈, 증조부는 예조판서를 지낸 김장미다. 조부 김준은 영릉참봉을 지냈다. 아버지 진사 김응생은 퇴계의 문인으로 동문인 정윤량과 함께 향리에 자양정사를 지어 후학을 가르쳤으며 정몽주를 제향하는 임고서원을 창건했다. 김완은 자양정사에서 정윤량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기골이 장대하고 비범한 기질을 지녔으며 손자와 오자의 병법에 정통했다고 한다. 몇 차례 문과에 떨어진 뒤 무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1577년 무과에 급제했다. 1589년 궁실과 어가를 호위하는 선전관이 됐다가 전라도 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돼 사도첨사로 부임해 임진왜란을 치렀다.
김완은 옥포·당포·한산도 해전 등에서 줄곧 척후장으로 활약했다. 이순신에게 김완은 믿고 맡기면 해내는 ‘믿을 맨’이었다. 김완이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우자 이순신은 장계를 올려 김완을 절충장군으로 임명했다. 김완은 전쟁만 잘하는 게 아니라 살림살이도 알뜰하게 잘 챙겼다. 미리 소금을 사두었고 양식 500석을 비축하기도 해두었다가 식량으로 군사들에게 내놓아 배 곯리는 일이 없었다.
이순신이 김완을 얼마나 신뢰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더 있다. 1596년 2월 6일 김완이 파면됐다. 이때 이순신은 삼도수군절제사였다. 조도어사가 장계를 올려서 파면을 주도했다. 이순신은 김완이 파면된 뒤 뒤늦게 소식을 들었다. 그러자 그해 3월 23일 이순신은 김완을 조방장으로 발탁하는 과감한 인사를 단행했다. 조정에서 파면한 장수를 한달 반 만에 참모장으로 불러 들인 것이다.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 구사일생 탈출하다.
이순신의 휘하에서 연전연승하던 김완에게 불운의 먹구름이 몰려왔다. 선조가 이순신에게 부산포 출정을 명했다. 이순신은 조정이 일본군의 반간계에 빠졌음을 눈치 채고 명령을 거부했다. 이순신은 투옥됐고 사돈인 윤두수의 후원을 업은 원균이 절도사로 부임했다. 원균은 이순신의 사람을 모두 내쳤는데 김완의 능력을 인정해 전선에 배치했다. 7월 7일 부산포로 향하던 중 다대포 앞바다에서 일본함대 10척을 만났다. 김완은 홀로 돌진해 왜선 10척을 모두 격파하고 말까지 빼앗았다. 행운은 여기까지였다. 부산포에 도착했을 때 바다를 건너온 적선 1000여 호가 바다를 뒤덮고 있었다. 아군은 판옥선 280척 뿐인데다 갑자기 엄청난 풍랑이 불어 배가 속수무책으로 해안으로 밀려갔다. 해안은 왜구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거기서 배와 병력을 많이 잃었다. 칠천량으로 물러났다. 7월 16일 새벽, 적군이 사방에서 기습했다. 3만여 명의 조선수군이 몰살했다.
아군은 모두 도망치고 김완이 지휘하는 전선만 홀로 남아 적들과 싸웠다. 김완은 오른쪽 다리에 총알을 맞고 싸우다가 바다에 떨어졌다. 뗏목을 타고 내서도에 닿았다. 수풀 속에 엎드려서 불길에 타오르는 아군의 전선을 바라보며 밤새 울었다. 다음날 저녁, 내서도에 들어온 간손 등 7명과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아가다 풍랑을 만나 창원 앞바다 마산포까지 떠내려갔다가 적에게 붙잡혔다. 7월 26일 배가 부산에서 출발해 대마도(對馬島)·일기도(壹岐島)·나고야를 거쳐 고쿠라에 도착했다. 일본에 잡혀간 지 보름 만에 배를 타고 탈출하다가 잡혀 죽을 뻔했다. 5개월을 죽은 듯이 지냈다. 바다로 탈출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도망쳤다. 고쿠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배를 훔쳐 타고 돌아왔다. 뱃길로만 두 달,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지 2년 만에 탈출에 성공했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영정 모신 영천 동린각.
선조는 김완이 포로로 잡혀가서도 절개를 지키고 적의 동태를 살펴 정보를 제공하려 했다는 점, 조선에 돌아와서도 군인으로서 적들과 싸워 포로의 치욕을 씻겠다고 다짐한 점 등을 치하하며 그에게 ‘해동소무(海東蘇武)’라는 호를 내렸다. 그리고 함안군수로 임명했다. ‘소무’는 중국 한나라의 외교관으로 흉노에 억류된 상황에서 변절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충절의 아이콘이다. ‘해동소무’는 조선의 소무라는 뜻이다.
김완은 1606년 향년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후손들이 동린각을 지어 추숭했다. 동린각(東麟閣)은 영천시 임고면 삼매리 개평들 언덕에 있다. 동린각 충의사에는 이순신과 김완 두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동린’은 한나라 소무의 기린각(麒麟閣)에서 따온 이름이다. 김완을 해동소무라 불렀으므로 ‘동쪽에 있는 기린각’ 동린각으로 이름했다. 본래는 김완의 고향인 자양면 노항리에 세웠는데 1785년 건물이 소실됐다. 그 후 자양현 성곡동으로 이건됐으나 영천댐에 수몰되면서 1976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동린각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썼다. 매년 4월에 추모제를 연다. 동린각 옆의 자양서당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던 김완의 아버지 김응생(金應生)과 역시 퇴계의 문인이었던 정영생이 지은 서당으로 김완이 여기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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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소개= 김동완 작가는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경북일보 기자를 거쳐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집필위원 및 작가, 한국여행작가협회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로 역사기행관련 저술활동을 하고 있으며 저서로 ‘홀로 된 자들의 역사’(글항아리), ‘효자가문에서 충신을 구하다’(한국국학진흥원), ‘忠과 孝, 불후의 향기를 남기다’(한국국학진흥원) 등이 있다. ‘홀로 된 자들의 역사’는 2021년 세종도서에 선정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