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는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으리' 임전무퇴 정신으로 호남땅 지킨 장수

전북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웅치전투 현장에 있는 창렬사. 정담장군을 비롯한 웅치전투 순국선열들을 제향하고 있다.

△죽을 모퉁이에서 찾아낸 신의 한수, ‘불차채용’

조선 제14대왕 선조는 재위 내내 무능했다. 그의 40년 치세기간 중 사림이 동서로 갈라져 당쟁이 시작됐고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전쟁 중에는 제 몸 하나 살겠다고 도망만 다녔다. 그의 치세기간 동안 잘한 일 하나를 굳이 꼽으라면 ‘불차채용(不次採用)’이다. 서열에 관계없이 유능한 장수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발탁한 인사다. 이 파격적인 인사로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李舜臣)과 웅치전투의 영웅 정담(鄭湛·1548 ~1592)이 배출됐고 그들은 전쟁의 흐름을 바꿔 나라를 구했다. 불차채용은 죽을 모퉁이에서 찾아낸 ‘신의한수’였다.

선조는 1589년 1월 비변사에 불차채용 특명을 내렸다. 전군에서 이순신 등 49명의 장수가 선발됐다. 이때 웅치전투의 영웅 정담도 발탁됐다. 정담을 발탁한 이는 우의정 정언신이다. 정언신은 1583년 여진족 추장 니탕개가 난을 일으키자 함경도순찰사로 나아가 신립, 김시민, 이억기 등 당대의 명장을 지휘하며 적을 격퇴했다. 이때 하급 장수였던 이순신과 신립의 막하 돌격장이었던 정담을 눈여겨보았다가 불차채용에 천거했던 것이다.

정담의 자는 언결(彦潔), 본관은 영덕이다. 아버지는 내금위 선략장군 부사과 정창국(鄭昌國)이다. 평해군(현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해월 종택이 그가 태어난 집이다. 정창국은 그의 장인으로부터 집을 물려받아 사위인 황응징에게 물려주고 영덕 창수 인량으로 이사했다. 영덕 인량에 정담의 충렬비각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황응징은 아들 황여일(黃汝一)에게 물려줬는데 이 집이 뒤에 황여일의 호를 따 해월종택으로 불렸다. 영해 인량리에 살던 정담은 5살 되던 해 어머니가, 10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자 다시 울진 사동리 지금의 해월종택으로 와서 자랐다. 정담은 매형 황응징(해월 황여일의 아버지)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36세 되던 해 무과에 급제했다.

△호남으로 진격해 이순신을 고사시키라

1592년 6월 23일 충청도 금산성이 왜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왜군 6번대 고바야카와 다카케로부대는 한양을 떠나 충청도를 거쳐 경상도까지 내려온 뒤 다시 북상해 금산으로 들어왔다. 이제 전라도가 크게 위협을 받게 됐다. 그동안 전라도는 왜군이 발을 디디지 못하는 ‘금왜의 땅’이었다. 5월 초에 곽재우와 김면이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왜군을 크게 이겼고 이순신이 옥포·합포·적진포·당포·율포 해전에서 왜군 수군을 잇달아 격파하면서 전라도는 왜군이 한 번도 밟아보지 못했다. 금산성을 차지한 왜군의 1차 목표는 전주성이었다. 전주성을 함락시킨 뒤 광주를 거쳐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이 있는 여수를 초토화해 이순신을 바다 위에서 고사 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면 전쟁을 끝난다고 고바야카와는 생각했다.

고바야카와는 자신만만했다. 전라도감사 이광이 이끄는 5만 의병을 용인전투에서 무참히 깨뜨렸고 최원이 근왕병 2만여 명을 이끌고 경기도 지역으로 출전 나갔던 터라 전라도를 지키는 병력을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금산에서 전주성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다. 운장산과 마이산 사이의 좁은 고갯길 웅치와 운장산과 대둔산 사이의 고갯길인 이치다. 전라 감사 이광은 도절제사 권율이 이치를 막도록 하는 한편 웅치는 김제군수 정담을 지휘자로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이 막도록 조치했다. 정담은 청주목사로 있다가 2개월 전부터 전라도 방어를 위해 김제군수로 자리를 옮겼다. 동복현감 황진은 웅치와 이치를 오가며 적정과 아군의 형세를 파악해 권율과 정담에게 알렸다. 정담은 적들이 눈앞에 다가오자 황진과 함께 웅치의 지세와 적정을 살피는 한편 간첩활동을 하고 있던 금산 월옹사의 중을 잡아 처형했다. 산길 진입로에 목책을 세우고 진지를 구축하는 등 방어 준비를 갖췄다.
 

충렬사 앞에 서 있는 ‘약무호남시무국가’비석. 뒷면에 ‘살아서는 한걸음도 물러나지 않으리라’는 정담장군의 전사직전 어록이 새겨져 있다.

△임란초기 육전 최대의 전과를 올린 웅치전투

웅치고개는 용담에서 진안을 거쳐 전주로 넘어가는 목구멍 같은 곳이다. 좁고 가파른 길이다. 정담은 방어선을 3차로 구축했다. 산 아래 1차 방어선은 전 전주만호 황박이, 산 중턱 2차방어선은 나주판관 이복남이 맡고 3차방어선은 고개 꼭대기에서 정담이 지키기로 했다.

7월 7일 새벽, 왜군 1만여 명이 웅치로 밀려 들어왔다. 조선군은 대략 1000여 명 정도. 어둠 속에서 간신히 버텼으나 날이 밝자 1차방어선이 무너지고 잇따라 2차선 방어선도 무너졌다. 산 정상의 정담 부대는 사력을 다해 맞섰다. 정담이 화살로 직접 적장을 쏘아 죽이면서 한때 기세가 올랐고 그사이 날이 저물면서 왜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물러나 있던 왜군에게 첩보가 날아들었다. ‘조선군의 화살이 다 떨어졌다.’ 왜군은 다음날 새벽 어둠 속에서 재차 공격해왔고 2차 방어선을 지키던 나주판관 이복남이 정담이 지키는 3차 방어선으로 밀려왔다. 그는 화살이 다 떨어진 상황에서 버티는 것은 무의미하다며 전주성으로 물러나 다음 전투를 준비하자고 정담을 설득했다. 정담은 “적을 하나라도 죽이고 죽을 것이며, 살아서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겠다. 내 갑옷에 내 이름을 써놓았으니 그대들은 살아서 시신을 수습해다오”라며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웅치전투가 벌어졌던 전북 진안군 세동리 산골짜기에 서 있는 웅치전적 종합안내도.

왜군은 8일 웅치고개를 넘어 전주성이 보이는 안덕원까지 진출한 뒤 진을 쳤다. 왜군은 웅치를 넘는 과정에서 전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안덕원에는 2차방어선을 지키다가 물러나 있던 나주판관 이복남이 매복하고 있었다. 그때 황진 부대가 안덕원에 도착했다. 황진은 적들이 장수를 지나 남원으로 향하고 있다는 첩보를 듣고 이치에서 남원으로 가던 중 적들이 방향을 바꿔 웅치로 향하자 뒤늦게 합류했다. 황진과 이복남은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전진에 쳐들어가 지쳐 있던 왜군을 닥치는 대로 쏘고 베었다. 쓸어버렸다는 게 적당한 표현이다. 살아남은 적들은 혼비백산해 웅치를 넘어 달았다. 이날 전투로 3000여 명의 왜군을 죽였지만 아군 피해는 미미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3개월 만에 육전으로는 최대의 전과를 올린 전투였다.

백사 이항복은 권율의 사위다. 그는 ‘백암집’에서 이 전투에서 정담의 공로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나의 장인 권율 장군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내가 주도한 행주싸움의 공이 크다고 하나 사실은 전라도 웅치싸움을 주도한 정담이 가장 크고, 다음은 행주싸움이다. 그가 일천 명도 안 되는 약한 군사를 데리고 10배가 넘는 대적을 맞아 잘 싸우다 죽었고, 그러므로 호남이 보전되었으니 어찌 그 공이 적다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왜군은 웅치에서 패한 뒤 이치고개로 넘어왔으나 이 전투에서도 황진이 맹활약해 적들을 물리쳤다. 이로써 왜군의 전라도 침략을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고 육로를 통해 이순신의 수군기지를 무력화하려던 시도도 무위로 돌아갔다.
 

영덕군영해읍 인량리에 있는 정담 장군의 충렬비각.

△정담의 유적지

전북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는 웅치전투가 벌어졌던 전장이다. 산길 한쪽에 있는 창렬사는 당시 김제군수로 웅치전투를 지휘하다 전사한 정담장군을 제향하는 사당이다. 사당 앞에 ‘적을 하나라도 죽이고 죽을 것이며, 살아서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으리라(영가살일적이사 불가퇴일보이생·寧加殺一賊而死不可退一步而生)’는 전사 직전의 진중어록을 새긴 비석이 서 있다. 비석 뒷면에는 ‘만약 호남이 없다면 나라도 없다(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이순신 장군의 어록이 새겨져 있다. 완주와 진안을 가르는 웅치고개 정상에는 국가지정문화재 전북웅치전적지 기념비가 있다.

영덕 인량리에 있는 창렬비각은 정담이 어린 시절 이곳에서 살았던 흔적이다. 정담의 아버지 정창국이 울진 평해에 있는 지금의 해월종가를 사위인 황응징에게 주고 인량리에 이사 와서 살았는데 정담이 죽자 후손들이 그 흔적으로 남긴 것이다. 본래는 사당을 건축했는데 후손이 영양으로 옮겨가면서 비석만 남아있다.
 

영양군 영양읍 일원면에 있는 야성정시 참판공 종택. 정담장군의 불천위 신주를 모신 사당이 있다.

영양읍 일월면 가곡리 야성정씨 참판공 종택은 정담의 9대손 정치묵이 영덕 인량에서 1810년 이곳에 옮겨왔다. 1846년 지금의 위치에 정면 4칸 측면 5칸의 ‘ㅁ’자형 가옥으로 지었다. 사랑채에는 정덕현(1840~1896)이 쓴 ‘매포정사(梅圃精舍)’현판과 정윤영(1868~1938)의 당호인 ‘괴음당(槐陰堂)’ 편액이 각각 걸려 있다. 종가 옆에는 참판공 정담의 불천위 신주가 모셔진 사당이 있다. 정면 3칸과 측면 1칸의 맞배지붕 장렬공 사당이다. 나라는 호남을 방어한 그의 공을 높이 평가했다. 사후 병조참판으로 추증됐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사진=김동완 작가·한국국학진흥원 집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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