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준호 (주)선이한국 대표
▲ 문준호 (주)선이한국 대표

요즘 자금시장은 예전과 사뭇 다르다. 과거의 양털깎이는 가격을 단숨에 무너뜨려 공포를 퍼뜨렸지만, 지금의 양털깎이는 보이지 않는 칼날을 들고 천천히 다가온다. 이름은 인플레이션이다. 이제는 가격이 붕괴되기보다 물가가 끊임없이 치솟고, 산업과 기업, 개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의 압력에 시달린다. 버티는 쪽만이 다음 사이클에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쪽은 자연스레 밀려난다. 코로나 이후 경기 사이클이 짧아진 것도 사실이지만, 지난 5년간 쏟아부은 재정이 남긴 높은 물가의 고착이 더 큰 이유로 작용한다. 결국 지금의 시장은 겉으로는 잔잔해 보이지만, 안쪽에서는 더욱 거센 파고가 치는 셈이다.

이런 환경에서 경기 회복은 K자형 곡선을 그렸다. 위쪽 곡선에는 인플레를 버텨낸 강자들이 자리하고, 아래쪽에는 힘을 잃은 약자들이 고개를 떨군다. 격차는 이미 크게 벌어졌고, 앞으로 더 넓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정책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서울 부동산을 기준으로 금리를 정하면 지방 경제는 가혹한 겨울을 맞고, 자영업자를 돕겠다며 재정을 풀면 고급 외식 물가만 더 오르는 기현상이 생긴다. 정책의 한 걸음은 누군가에겐 구원의 손길이 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무거운 짐으로 돌아온다.

미국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기준금리는 높지만, 빅테크가 쌓아둔 현금을 AI 투자에 쓰기에는 여전히 낮다. 반대로 주택시장에는 너무 높아 서브프라임 대부업체가 줄줄이 파산해도, 나스닥은 태연히 신고가를 향한다. 같은 경제 안에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 두 편이 동시에 전개되는 셈이다. 이 불균형은 글로벌 금융의 체질 자체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 증시는 전통적으로 경기 회복 초입에서 강했다. 불황기에 가격 대비 품질이 뛰어난 제품이 세계시장에서 잘 팔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완연한 회복 자체가 사라졌다. 애매하게 오르고 애매하게 꺾이는 사이클만 반복된다. 그래서 과거엔 따로 움직이던 반도체와 바이오가 동시에 치솟는 장면도 가능해졌다. 예전과는 다른 패턴이 시장의 새 질서로 굳어지고 있는 것이다.

만약 KOSPI가 5000선을 넘어선다면, 그것은 세계 경제가 뜨겁게 성장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회복은 미약하고, 효율적 생산이 중시되며, 소비는 위축돼 가성비가 최고의 가치로 떠오르는 순간일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불완전한 회복의 시대가 오히려 한국 증시에 새로운 문을 열어줄 수 있다. 양극화된 K자 궤적 속에서 한국 시장은 전인미답의 고지를 향할 가능성을 품는다. 그것이 지금 시장이 전하려는 흥미롭고도 의미심장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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