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언제나 강자의 화폐로 가격을 매겨왔다. 고대에는 황금이, 근대에는 파운드가 그 자리를 차지했듯 지금은 달러가 세계의 기준이다. 국제 무역에서도, 국채 발행에서도, 심지어 디지털자산의 영역에서도 달러는 여전히 모든 가치의 저울이 된다. 화폐의 역사는 곧 힘과 패권의 역사였고 지금 이 순간도 예외가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 스테이블코인은 블록체인 기술이 낳은 새로운 결제 수단처럼 보인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결국 달러 표시 채권, 다시 말해 미국 통화체계의 연장선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금융 주권과 직결되는 문제다. 국내 금융의 흐름 속에 달러 질서가 깊게 스며드는 순간, 원화의 자율성은 조용히 잠식된다. 눈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통화 체계의 균열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해법은 어디에 있을까. 의외로 답은 가까운 곳, 바로 우리의 손안에 있다. 한국인이 가장 익숙하게 사용하는 금융 창구이자 생활 플랫폼인 스마트폰에서 시작되는 P2P 기반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결제를 넘어 통화주권을 지키는 디지털 무기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삼성이나 네이버, 카카오와 같은 거대 기업이 의지만 보인다면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빠르게 일상 속에 뿌리내리고 국민의 지갑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는 곧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지난 7월, 업비트와 네이버페이가 전략적 제휴를 발표했다. 겉으로는 단순한 협업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디지털 금융의 최전선을 겨냥한 대담한 행보였다. 결제·자산 보유·투자를 아우르는 생태계를 설계하려는 시도였고, 이는 곧 한국식 스테이블코인의 씨앗이 뿌려지는 순간이었다. 작은 합의가 미래를 바꾸는 전환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제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국내 시장을 잠식하지 않도록 막는 동시에,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동남아 등 해외 시장에 선보여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디지털 확장이 아니다. 한국이 글로벌 금융 질서 속에서 입지를 넓히고 디지털 통화의 미래를 주도할 수 있는 전략적 기회다. 나아가 이는 금융·산업·기술을 융합해 국가 전체의 경쟁력을 높이는 발판이 될 것이다.
통화는 언제나 조용히 움직인다. 신문에 대서특필되지 않는 흐름이 있고, 사람들의 지갑 속에서 은밀히 시작되는 변화가 있다. 이 작은 물결의 방향을 먼저 읽어낸 나라만이 달러의 뒤를 쫓는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디지털 화폐의 중심을 설계하는 주역으로 떠오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지금, 그 가능성의 문이 우리 앞에 열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