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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오디세이] 22. 왕의 행차를 잡은 땅속 염불소리
[삼국유사 오디세이] 22. 왕의 행차를 잡은 땅속 염불소리
  •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 승인 2021년 01월 13일 18시 07분
  • 지면게재일 2021년 01월 14일 목요일
  •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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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면석불 솟구친 자리에 태평성대 기원하는 성지를 만들다
경덕왕이 백률사 행차를 가던 중 산아래서 염불소리를 듣고 절을 지었다는 굴불사지 사면석불.

굴불사지(掘佛寺址)는 경주 금강산 서쪽 자락에 있다. 7번 국도 포항- 울산간 노선을 타고 가다 경주시청으로 꺾어지는 삼거리에서 백률사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100m 정도 거리에 있다. 처음 이곳을 찾는 이라면 굴불사가 백률사를 지키는 곳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청량한 소나무 떡갈나무 숲길 끝에 백률사로 가는 돌계단 앞에 자리 잡고 있으니 말이다. 한걸음이면 건널 수 있는 골짜기에 돌다리가 놓여 있고 돌다리를 넘어서면 사면석불이 서쪽을 향해 서 있다. 앞에는 삼존여래가 서 있고 삼존여래 뒤에 자리 잡은 사각형 자연석 네 면에 불보살을 새겼다. 도심과 가까운 데다 접근성이 좋아 시민들 중에서 운동 삼아 길을 나섰다가 불공을 드리려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굴불사지 사면석불 남면 불보살상.

굴불사와 관련한 이야기는 『삼국유사』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조에 나온다. “경덕왕이 백률사에 행차하기 위해 산 아래 이르렀을 때 땅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그곳을 파게 하였다. 거기에 큰 돌이 있었는데 사면에 사방불이 새겨져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절을 세우고 굴불이라고 이름하였다. 지금은 잘못 불러 굴석이라고 한다.”

굴불사와 백률사 위에 있는 금강산 정상.

신라 제35대 경덕왕(재위 742~765)이 당초 행차하려던 백률사는 법흥왕 당시 이차돈의 순교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불교의 공인을 위해 이차돈이 순교했고 처형당한 이차돈의 목이 날아와서 떨어진 곳이 백률사다. 절이 세워진 지 200여 년이 지나도록 왕의 기도처였으며 숭배대상이었다는 것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굴불사지에서는 몇 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금동여래입상(국립경주박물관 소장)등 금동불 3구가 출토됐고 ‘동사(東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와편과 ‘굴석사(掘石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반자가 나와 고려시대에는 이 절을 굴석사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경덕왕대는 신라의 전성기였으나 실제로는 쇠퇴의 어두운 그늘이 드리우는 때이기도 했다.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 신문왕 효소왕 성덕왕 효성왕을 거치는 동안 통일 효과를 톡톡히 누렸으나 경덕왕대에 와서 불길한 조짐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며 쇠퇴의 전조를 보였다. 760년 정월, 도성의 동쪽에서 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은 이것을 ‘귀신의 북(鬼鼓)’라고 말하며 하나의 불길한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가뭄이 들었고 해가 두 개나 떠 10일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총애하던 신하 이순이 갑자기 세상을 피해 산으로 들어가 단속사(斷俗寺)를 세우고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이순은 왕이 음탕한 소리를 즐긴다는 말을 듣고 대궐로 가 왕을 나무랐을 정도다.

형 효성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경덕왕은 왕의 자리를 자신의 직계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첫 번째 왕비 삼모부인을 내보내고 만월부인을 후비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얻은 아들이 나중에 김지정의 난으로 죽은 혜공왕이다. 경덕왕이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건 개혁, 지방군현 정비와 관직정비도 모두 왕권강화와 안정적인 후계 세습을 위한 장치였다. 그러나 재정에 어려움을 겪어 관료에게 지급하던 월봉을 다시 녹봉으로 지급하면서 균열이 생겼고 왕위를 지켜줄 종실의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경덕왕이 왕궁 귀정루에서 충담대사를 만나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라는 주제의 안민가(安民歌)를 짓게 한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경덕왕은 문제를 해결할 아이디어를 이름 높은 스님에게서 구했다. 민원이 생기거나 인심이 흉흉할 때 이름 높은 스님을 만나 문제를 풀었다. 절을 짓는 일과 절에 시주하기를 좋아했다. 불교의 법력을 이용해 전제왕권을 유지하는 한편 후계문제를 원활히 해결하고 싶었다. 왕은 진표, 충담, 월명, 태현, 표훈, 이순, 영여 같은 이름 있는 승려에게 계를 받거나 훈수를 듣는데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충담사가 경덕왕을 만나기 위해 건넜던 월정교.

『삼국유사』는 경덕왕이 법상종의 고승인 진표를 만나 보살계를 받는 장면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진표는 753년(경덕왕 12) 2월 15일에 아슬라주(강릉)에 이르렀다. 이때 섬 사이를 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 그를 무속으로 맞아들이므로 불법을 강설하고 계를 주었다. 경덕왕이 이 소문을 듣고 그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보살계를 받고 조 7만7000석을 내렸으며 왕후와 외척들로 모두 계품을 받고 명주 500단과 황금 50량을 보시했다. 진표는 이것을 모두 받아서 여러 절에 나누어 보시하여 널리 불사를 일으켰다.” (권4 의해편 진표전간)

753년(경덕왕12), 여름에 극심한 가뭄이 들자 태현 스님을 내전으로 초청해 ‘금광경’을 강설케 하고 비를 빌었다. 잠깐 사이에 우물물이 7장가량 솟아났다. 경덕왕은 법해스님을 황룡사에초대해 ‘화엄경’ 강설하기도 했다. 이 법회에서 스님이 동해의 물을 기울이는 법력을 보이자 일어서서 절을 했으며 실제사의 영여스님을 대궐로 초청해 국사로 추대하기도 했다. 영여스님은 국사로 추대되자 사라져 버렸는데 그 사라진 자리를 국사방이라 불렀다. 남산의 국사골이 국사방에서 유래됐을 것을 보고 있다.

760년 4월 2일에 두 해가 나란히 나타나 10일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왕이 청양루에서 인연 있는 승려를 기다렸다. 월명사와 줄이 닿았다. 월명사에게 발원문을 부탁했다. 왕의 부탁을 받은 월명사는 ‘도솔가’를 지었고 골머리를 아프게 하던 두 개의 해가 사라졌다. 표훈대덕에게는 후사를 이을 아들을 부탁했다. 표훈이 천제에게 아들을 청했으나 천제는 딸을 낳을 운명이라고 대답했다. 왕의 간곡한 청을 받고 표훈은 다시 하늘에 올라가 천제에게 아들을 부탁한다. 천제는 아들을 낳을 경우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전제하에 아들을 점지해 준다. 그 아들이 혜공왕이다. 혜공왕은 8살에 왕위에 올라 여자아이처럼 소꿉놀이를 즐기다 김지정의 반란 때 죽었다. 혜공왕은 『삼국사기』가 구획한 신라 중기의 마지막 왕이며 나라가 쇠퇴기로 접어드는 지점이다.

굴불사 위에 있는 백률사 대웅전.

왕이 굴불사를 세운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백률사는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공인한 불교의 성지다. 효소왕 때 국선 부례랑이 말갈족에게 잡혀갔고 천존고에 보관하고 있던 만파식적이 도난당했다. 국가적 대사건을 백률사의 관음보살에게 기도해 해결했다. 부례랑도 만파식적도 돌아왔다. 경덕왕은 자신만의 성지를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왕경 오악의 하나인 금강산에 백률사의 위엄과 권위를 고스란히 이어받고 자신의 치적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부처님의 권위를 빌어 굴불사를 세웠을 것이다.

성덕대왕신종. 아들인 경덕왕이 아버지의 공덕을 기려 제작했으나 혜공왕 때 완성됐다.

경덕왕대에는 이와 함께 여러 가지 불교와 관련돼 에피소드가 많았다. 우금리 여자 보개의 아들은 장춘인데 바다로 나아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오나라를 표류했다. 민장사 관음보살에게 빌었더니 아들이 돌아왔다. 이 소식을 들은 경덕왕이 절에 밭을 시주하고 재물을 바쳤다. 웅천주에 사는 향득은 가뭄이 들어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어버이를 공양했다. 왕이 벼 500섬을 내려줬다. 황룡사 종을 만들고 분황사 약사동상을 세웠다. 성덕대왕신종을 만든 사람도 경덕왕이다. 경덕왕이 이 종을 완공하지 못하고 죽자 아들 혜공왕이 종을 완공했다.

경덕왕의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뒤를 이은 혜공왕은 김지정의 난 때 죽었다. 이후부터 신라는 친척 형제간에 죽고 죽이는 왕위쟁탈전을 벌이며 멸망의 길을 걸어갔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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