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오디세이] 23. 진지왕의 행복과 불행
[삼국유사 오디세이] 23. 진지왕의 행복과 불행
  •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 승인 2021년 01월 27일 18시 22분
  • 지면게재일 2021년 01월 28일 목요일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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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대신해 오른 왕위…4년만에 일장춘몽으로 끝나다
신라 제25대 진지왕릉. 왕은 재위 4년 만에 폐위됐다.

신라제 25대 진지왕(眞智王)의 무덤은 선도산 자락에 있다. 경주 선도산은 고대 신라의 영웅들이 잠든 신후지지(身後之地)이며 산신에게 국가제사를 지내는 신라 왕경오악중 하나이다. 서악이라고 불렀고 서산이라고도 했다. 삼국통일의 초석을 다진 무열왕과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며 당시 최고의 외교관인 김인문, 민애왕을 죽이고 신무왕을 즉위시킨 김양, 정복군주 진흥왕의 무덤이 불교를 국교로 공인한 법흥왕의 무덤도 선도산 자락에 있다. 헌안왕, 문성왕, 진지왕릉도 이곳에 들어서 있다.

선도산 등산로의 시작점에 삼층석탑이 우뚝하다. 이 석탑은 모전석탑 형태로 만들어졌다. 1층 몸돌은 여섯 개의 면이 정육면체로 앞면 가운데 큼직한 네모꼴 감실을 파서 문을 표시했다. 문의 좌우에는 인왕상이 1구씩 조각됐다.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구절초 단지가 조성돼 가을철 경주의 새로운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진지왕릉 앞에 있는 서악리 삼층석탑.

등산로를 가운데로 놓고 삼층석탑의 반대편, 서쪽 언덕에 왕들의 무덤이 줄을 잇고 있다. 언덕 제일 위에 진흥왕릉이 있고 그 아래 진흥왕의 둘째 아들 진지왕의 무덤이 있다. 진지왕릉 밑에는 서쪽에 헌안왕, 동쪽에 문성왕의 무덤이 들어서 있다. 추사 김정희는 이 무덤의 주인이 진흥왕 등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김정희는 1817년 4월 하순~5월 초순 경주를 답사했다. 아버지 김노경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 중이었다. 추사는 이 답사를 통해 현재 선도산 초입에 있다고 알려진 진흥 진지 문성 헌안왕의 능은 남쪽에 있는 태종무열왕릉 위에 조성된 4기의 능이라고 주장했다. 최근 들어 무열왕릉 위에 있는 4기의 능 중 3기를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의 능으로 보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비형랑이 귀신과 어울려 놀았다는 귀들.

진지왕은 신라 제25대 왕이다. 강력한 정복군주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다. 이름은 사륜(舍倫)이다. 진지왕은 본래 왕위 계승자가 아닌데 형인 태자 동륜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왕이 됐다. 『삼국유사』도 『삼국사기』도 태자 동륜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내놓지 않는다. 동륜의 죽음을 설명하고 있는 유일한 전적은 『화랑세기』다. 화랑세기가 밝히는 동륜의 죽음 뒤에 가려진 비하인드 스토리는 충격적이다.

“당시 보명궁주가 태자의 연모를 받았으나 몸을 허락하려 하지 않았다. (동륜)태자는 이에 장사 수인과 더불어 (보명)궁의 담장을 넘어들어갔다. 궁주가 미실과 더불어 왕의 총애를 다툴 수 없음을 알고 감히 태자를 힘써 거부하지 않아 일이 성사됐다. 그 후 태자는 매일 담을 넘어들어왔다. 이레째 밤에는 태자가 아무도 거느리지 않고 혼자 들어갔다가 큰 개에게 물렸다. 궁주가 안고 궁중으로 들어갔는데, 동틀 무렵 죽었다.”

진흥왕에게는 다섯 궁주가 있었다. 사도와 미실, 보명, 옥리, 월화 등이다. 동륜태자는 아버지의 여자인 보명에게 반했다. 보명도 미실에게 빠져 자신을 돌보지 않는 진흥왕을 원망하며 동륜을 받아들였다. 동륜은 날마다 보명궁 담장을 넘었고 담장 넘는 일이 익숙해지자 수하를 물리치고 혼자 보명궁을 찾았다가 큰 개에게 물려 죽었다. 현직 왕인 아버지의 여자와 태자인 아들이 정을 통했는데 태자가 그 현장에서 개에게 물려 죽었다는 것이다. 날마다 담을 넘어 주인과 사통하는 사이를 개가 몰랐을 리 없을 터인데 동륜을 물어 죽인 큰 개는 진흥왕이나 다른 ‘연적’이 보낸 ‘저격수’는 아니었을까?

사륜은 이런 곡절 끝에 왕위를 이어받아 신라 제25대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4년 만에 국인들에 의해 폐위됐다. 『삼국유사』는 이렇게 썼다.

“제25대 사륜왕은 시호가 진지대왕이니, 성은 김씨다. 왕비는 기오공의 딸인 지도 부인이다. 대건 8년 병신년(576)에 정치가 어지럽고 황음에 빠져 국인이 이를 폐위시켰다.”

진지왕릉으로 가는 서악동 초입에 있는 서악서원. 김유신, 최치원, 설총을 배향하고 있다.

‘정치가 어지러웠다’는 대목은 진지왕 즉위 3년차와 4년차에 잇따라 일어난 백제와의 전쟁을 말한다. 삼국유사는 진지왕이 ‘황음에 빠진’ 사례로 도화녀와의 사랑을 꼽았다. 요약하면 이렇다. 사량부에 사는 서녀가 자색이 몹시 아름다워 사람들이 도화랑(桃花娘)이라 불렀다. 왕이 궁중으로 불러들여 관계를 하려 했으나 여자가 지아비가 있는 유부녀라며 관계를 거절했다. 왕이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자 죽어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며 버텼다. 그해에 왕이 폐위돼 죽고 2년 뒤에 그 남편도 죽었다. 죽은 왕이 평소의 모습대로 나타나 여자와 한방에서 7일을 지내고 떠났는데 여자가 임신해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비형랑(鼻荊郞)이다.

진지왕이 죽은 뒤 2년 뒤에 도화녀를 찾아가 정을 통하고 비형랑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 황당한 이야기의 내막을 푸는 열쇠는 화랑세기에 있다. 진지왕이 579년 폐위되고 죽었다는 삼국유사 기록과는 달리 화랑세기는 진지왕이 폐위된 뒤 3년 동안 유궁에 살다가 죽었다고 전한다. 이에 대해 이종욱은 “진지왕이 비록 폐위되기는 하였으나 새로이 왕위를 이었던 진평왕의 작은 아버지였고, 아직 진지왕의 어머니 사도 태후가 살아 있으며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진지왕을 폐위와 동시에 죽였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에 적고 있다.

추사 김정희는 무열왕릉 위에 있는 4기의 왕릉이 진짜 진흥왕 진지왕 헌안왕 문성왕릉 주장했다.

그러면 진지왕은 무슨 이유로 폐위를 당한 것일까. 정민은 ‘불국토를 꿈꾼 그들’에서 불교 신앙을 놓고 생긴 신라왕실의 갈등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23대 법흥왕은 불교를 국교로 공인했고 뒤를 이은 진흥왕은 황룡사에 장륙존상을 조성해 신라의 불국토설을 확산시켰다. 법흥왕도 진흥왕도 머리를 깎고 법복을 입었으며 왕비를 출가시키는 등 불법을 숭상하고 불교에 귀의했다. 진흥왕은 또 큰아들의 이름을 동륜, 둘째를 사륜 또는 금륜, 셋째를 국륜으로 지었다. 이는 하늘로부터 보륜을 얻어 세계를 통치한다는 전륜성왕을 말한다. 칼과 무력 없이 정의의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절대적 군주다. 진흥왕이 신라 제일의 정복군주로 우뚝 선 배경에는 이 같은 자부심이 동력이 됐을 것이다.

신라 제26대 진평왕릉. 진지왕의 아들을 키웠으며 선덕여왕의 아버지다.

그런데 진지왕은 달랐다. 여색을 밝혔고 백제와의 전쟁으로 나라에 혼란을 가중시켰다. 귀족들이 중심이 된 화백회의는 왕을 신뢰하지 못했다. 왕의 폐위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화백회의는 동륜 태자의 아들이며 진지왕의 조카인 진평왕을 추대했다. 진평왕은 삼촌 진지왕의 실패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았다. 자신의 이름을 백정, 부인의 이름을 마야로 정하고 불교를 신봉했다. 54년간 재위했다. 진평왕은 아들이 없이 선덕여왕에게 왕위를 물려줬고 선덕 역시 후사가 없어 사촌 동생 진덕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진지왕계에서는 아들 용춘이 춘추를 낳았고 춘추가 진골으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삼국유사에 반은 귀신 반은 인간으로 묘사됐던 비형랑은 용춘과 동일인물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비형랑이 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가 되는 셈이니 경천동지할 일이다. 김춘추가 왕이 되면서 왕위계승의 길이 끊어진 줄 알았던 진지왕의 후손들이 36대 혜공왕까지 왕위를 이어갔으니 이것도 진지왕에게 행운이라면 행운이겠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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