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오디세이] 27. 손순이 아들을 묻으려 하다
[삼국유사 오디세이] 27. 손순이 아들을 묻으려 하다
  •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 승인 2021년 03월 31일 18시 34분
  • 지면게재일 2021년 04월 01일 목요일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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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어머니를 향한 지극한 효심, 하늘마저 감동시키다
손순이 살았다는 유허지에는 유허비각과 350년된 회화나무 팽나무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효자 손순(孫順)이 경주시 현곡면 소현(小見)마을에 정착한 때는 대략 1400년 전쯤이다. 흥덕왕(재위 826~836)이 손순의 효행에 감동해 소현리에 집을 마련해줬다. 마을 입구에 있는 ‘신라효자문효공손순유허비’ 비각이 있는 자리가 그 집터다. 소현마을의 옛이름은 ‘순우정(順友亭)’이다. 마을에 손순의 이름을 딴 정자가 있었는데 그대로 마을 이름이 됐다. 뒤에 도성인 경주에서 보니 이 마을이 자그마하게 보인다고 해서 소현이라 이름을 고쳐 불렀고 오늘날에 이르렀다. -‘경주풍물지리지, 김기문’

마을은 작고 아담하다. 4·50여 호 정도나 될까. 경주 손씨 집성촌이었지만 지금 남아 있는 손씨 일족은 약 10여 호 정도가 된다고 한다. 마을에서 100m도 채 안 되는 하구리 일대에 최근 2500여 세대의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대비효과가 뚜렷하다. 아파트가 들어선 쪽은 활기찬 반면 소하천을 사이에 둔 소현리 쪽은 정적이 흐른다. 아파트 단지가 마을 남쪽에 있어서 해가 중천에 뜨면 아파트 그림자가 마을 쪽으로 길게 드리운다. 마을에서는 이 그림자를 긍정적인 신호로 여기는 듯하다.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그 자리에 있던 이웃 여럿이 부자가 됐다. 덩달아 소현리의 땅값도 많이 올랐다.

작은 하천이 아파트 단지가 있는 하구리와 소현리를 경계 짓는다. 그 경계 위에 소현교가 있고 다리를 건너면 마을 입구다. 입구에 손순 유허지가 있다. 유허지는 고색창연하다. 가운데 비각을 중심으로 키가 20m나 되는 350살 된 회화나무와 역시 비슷한 높이에 그만큼 풍파를 겪은 팽나무가 시립해 있다.

문효사 전경.

유허지 옆에 손순과 부인을 제향하는 문효사(文孝祠)가 있다. 출입문이 ‘홍효사(弘孝寺)’다. 손순이 소현리에 있는 집을 옮기면서 남사리에 있는 옛집에 절을 지었는데 그 절이 홍효사다. 출입문 현판이 그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이다.

문효사 마당에 있는 돌종 조각. 손순이 아들을 묻으려고 땅을 파자 돌종이 나왔다고 한다.

홍효사 마당에 석종 조각이 있다. 손순이 자식을 땅에 묻으려고 할 때 땅속에서 솟아 나온 돌종설화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손순과 부인의 위패와 대효 편액.

사당 안에는 손순 부부의 위패가 나란히 놓여 있고 위패 위쪽 벽에 ‘대효(大孝)’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대효는 지극한 효도를 말한다. 손순의 지극한 효성은 『삼국유사』 ‘손순매아/손순 아이를 묻다’ 편에 나온다. 원문이 번잡해 정리한다.

“손순은 모량리(牟梁里) 사람으로 아버지가 죽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아 얻은 곡식으로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철없는 어린 자식이 늘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 게 늘 마음에 걸린다. 그는 ‘아이는 또 얻을 수 있으나 어머니는 다시 얻을 수 없다’고 부인을 설득한 끝에 자식을 버리기로 했다. 아이를 업고 취산(醉山) 북쪽에 가서 묻으려고 땅을 파니 기이한 돌종 ‘石鐘’이 나왔다. 나무에 걸고 두드려보았더니 그 소리가 들을 만했다. 이게 다 아이의 복이거니 생각하고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종을 들보에 달고 두드리니 그 소리가 대궐까지 들렸다. 왕이 종소리를 듣고 사람을 보내 경위를 알아본 뒤 ‘옛날 곽거가 아들을 묻으려 하자 하늘에서 금솥을 내려줬고 지금 손순이 아들을 묻으려 하자 땅에서 돌종이 솟구쳤구나. 효가 하늘과 땅의 귀감이구나’라며 집을 한 채 내리고, 매년 벼 50석을 주었다.”

남사리 북삼층석탑. 손순이 옛집을 희사해 지은 홍효사로 추정된다.

땅에서 파낸 돌종이 일종의 신문고 역할을 해 왕으로부터 포상을 크게 받았다. 그때 받은 집이 앞서 말한 소현리 손순유허지다. 손순은 옛집을 희사해 ‘홍효사’라는 절을 세웠다. 옛집이 있는 곳이 오늘날 남사리 북골이다. 북골은 1500년 전 밀양박씨가 개척한 마을인데 손순이 땅속에서 돌종을 얻었으므로 돌종이 나온 취산을 북골, 종곡(鐘谷)이라 하고 그 마을을 북골, 종동이라 불렀다. -‘경주풍물지리지’

남사리삼층석탑. 북삼층석탑에서 산길을 따라 한참을 가야 한다. 역시 홍효사지로 추정하고 있다.

홍효사지는 현곡면 남사리 종동 폐사지로 비정(大板金太郞, 1931; 한국불교연구원,1974)하는데 문제는 종동폐사지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유력한 추정지가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호인 경주남사리 북삼층석탑이 있는 곳이다. 이 탑은 경주경찰서 신청사 준공 당시 경찰서 정원에 옮겨 보존하다가 지역주민의 건의에 따라 1995년 부족한 탑재를 보충해 복원한 것이다. 건립 시기는 통일신라기로 추정되고 있다.(경주시사편찬위원회, 2006) 그러나 이것도 추정에 불과하다. 동쪽 산기슭에 있는 남사리 삼층석탑이라는 말도 있고 그 뒤쪽 산이 홍효사지라는 말도 있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보니 설왕설래, 말이 많다.

손순은 모량부 사람이다. 신라가 건국될 때 모량부는 무산대수촌이었다. 촌장이 구례마(仇禮馬)로 손씨의 득성조다. 따라서 손순은 왕경 6부 촌장의 한 사람인 손구례마의 후손이며 6두품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6두품 성씨를 가진 손씨 부부가 남의 집 왜 날품팔이로 전락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신라 귀족간 치열한 권력 다툼에 있다.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6부의 위상과 권력의 부침이 심했을 것이다. 특히 무열왕 이후 진골이 왕위에 오르는 시대가 열리면서 왕에 오를 자격을 가진 자의 수가 엄청나게 늘었다. 권력쟁탈권이 치열하게 펼쳐졌다. 신문왕 때 왕의 장인 김흠돌이 일으킨 반란이 대표적이다. 6부촌 중에서 양부와 사량부는 왕실이 직접 장악하면서 다른 촌락에 비해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 특히 사량부와 모량부는 오랜 경쟁 관계였다. 사량부는 왕의 직계가, 모량부는 왕비의 가계가 장악하고 있었다. 효소왕대에 ‘죽지랑모욕사건(2020.6.11 삼국유사 오디세이 ‘부산성의 굴욕’ 참고)을 겪으면서 사량부는 권력을 틀어쥐었고 모량부는 권력의 중심부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모량부 출신의 손순도 그 파고를 피해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 경제적으로 몰락하면서 6두품 성씨를 가지고도 남의 집 날품팔이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손순이 살던 흥덕왕대에는 지진과 흉년이 겹쳐 사회가 극도로 혼란했다. 재위 6년에는 지진이 일어났고 7년에는 가뭄이 들어 땅에 남아난 곡식이 없어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왕이 평상시보다 음식 가짓수를 줄이는 등 초긴장 상태에 들어갔다. 재위 8년에도 큰 기근이 들었고 전염병이 나돌아 많은 사람이 죽었다. 손순이 어머니라도 배불리 먹이기 위해 자식을 생매장하려 했던 때가 이때쯤이었을 것이다.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던 흥덕왕은 정통성문제로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가뭄이 들어 도적이 들끓고 전염병이 나돌아 민심이 흉흉해지자 민심을 잠재울 돌파구가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맞춰 손순이 나타났다. 왕은 집과 곡식을 주고 효이데올르기를 활용해 정권 안정을 추구했을 것이다. 효와 충은 같은 프레임에 갇혀 있는 동질구조다. 효이데올르기는 고려와 조선을 거쳐 왕조 정권이 두고두고 활용하면서 충성이데올르기에 편입시켰다.

신라효자 문효공 손순 유허비.

손순 유허에 있는 ‘신라효자 손순 유허비’는 손순의 후손인 경주 밀양 평해 손씨들이 1970년 세웠다. 유허지의 동쪽에 있는 문효사는 1992년 건립됐다. 매년 음력 3월 3일 춘향제를 지낸다. 건천읍 모량역 부근에 있는 ‘효자무덤’은 본래 주인이 없었는데 후손들이 ‘월성손씨대동보’의 기록과 마을 노인들의 이야기를 근거로 1967년 손순의 묘로 비정했다. 매년 음력 10월 3일 제사를 지낸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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