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모 대신 덕을 갖춘 아내를 선택해 세가지 복을 받다
경문왕이 왕위에 오른 때는 정국이 국내외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을 때였다. 당나라는 17대 황제 당의종 이최(재위 859~873)가 집권 3년 차를 맞고 있었다. 의종은 환관 왕종실과 짜고 아버지 선종의 유지를 조작해 동생 이자 대신 황제에 올랐다. 정적인 동생 이자를 죽이고 주색잡기와 사치에 빠져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당나라는 의종 집권기에 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신라라고 형편이 나을 턱이 없다. 혜공왕이 시해당한 이후 경문왕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100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13명의 왕이 바뀌었고 5명의 왕이 시해당했다. 삼촌이 조카를 죽였고 당질이 당숙을 죽인 뒤 왕이 됐다. 죽이고 죽는 사람이 모두 8촌 이내 혈족이었다.
860년(헌안왕 4) 9월 가을, 왕이 임해전에 문무백관을 불러 연회를 베풀었다. 약관의 젊은이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희강왕의 손자이며 아찬 김계명의 아들인 응렴이다. 나이가 20세(삼국사기는 15살로 기록하고 있다)이었다. 그는 18세에 국선이 된 뒤 화랑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는 촉망받는 젊은이였다.
헌안왕은 연회를 핑계 삼아 중신들을 불러 모았다. 응렴을 사위로 결정하는 한편 사실상 후계구도를 확정하는 자리다. 왕은 이미 건강에 문제가 있었으므로 일찌감치 후계자를 정해 뒤에 있을 혼란을 피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사위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일인 만큼 반발을 고려해 백관들에게 우선 선을 보이며 선제적 조치를 취한 것이다. 나중에 있을 반발의 충격을 최소화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건물로 치자면 내진 설계를 한 것이다. 왕비와 두 딸의 안전을 위한 최소의 장치이기도 했다.
왕이 물었다. “그대는 국선이 되어 사방을 두루 다니며 많은 일을 보고 배웠다고 들었다. 배울 만한 일이 있었는가?”
응렴이 대답했다. “신은 행실이 아름다운 자 셋을 보았습니다.”
“말해보라.”
“남의 윗자리에 있어도 될 사람이 겸손하여 남의 아래에 있는 이를 보았습니다. 부자인데도 검소하게 옷을 입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권력이 있는데도 위력을 부리지 않는 사람도 만났습니다.”
왕이 드디어 속내를 드러냈다. 왕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나에게 두 딸이 있는데 그대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한다.”
여기까지는 『삼국유사』 기록이다. 『삼국사기』는 좀 더 구체적이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잠잠히 있다가 왕후에게 귓속말로 “내가 사람들을 많이 겪었지만 응렴 만한 이는 없었소”라고 말한 뒤 응렴을 돌아보고 다시 말했다. “그대는 삼가 몸을 아끼라. 나에게 딸자식이 있으니 큰 아이는 올해 스무 살이고 작은 아이는 열아홉 살이다. 그저 그대 마음에 드는 대로 장가를 들라.”
응렴은 작은딸이 마음에 들었다. 남자들이 아내를 선택하는 방식은 대개 시대 불문하고 정해졌다. 미모다. 응렴이 집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가족회의가 열렸다. 만장일치로 작은딸을 배우자로 결정했다. “첫째 공주는 외모가 무척 못생겼고 둘째 공주는 매우 아름다우니 둘째를 아내로 맞는 것이 좋겠다.”
이제 둘째 딸을 아내로 맞겠다고 왕에게 통보만 하면 된다. 이때 범교사(삼국사기에서는 이 승려를 흥륜사스님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라는 중이 찾아와 큰딸을 배필로 삼으라고 강력하게 권고했다. 범교사는 김응렴이 이끄는 화랑 무리 속의 승려로 추정된다. 그는 “낭이 아우에게 장가를 든다면 (나는)낭의 면전에서 죽을 것이고 언니에게 장가든다면 반드시 세 가지 좋을 일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응렴은 둘째 공주와 결혼하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범교사의 ‘협박’을 받고 첫째 공주와 결혼했다. 3개월 뒤 헌안왕은 죽음을 앞두고 신하들을 불러들였다. “과인은 불행히도 아들이 없이 딸만 두었다. 우리나라의 옛일에 비록 선덕과 진덕의 두 여왕이 있었다고 하나, 그것은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일에 가까운 것이니 본받을 수 없다. 사위 응렴은 나이는 비록 어리나 노성한 덕성을 가지고 있으니 그대들이 왕으로 옹립해 섬긴다면 반드시 조종의 훌륭한 기업을 잃지 않을 것인바 과인은 죽더라도 마음을 놓을 것이다.” 『삼국사기』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른 뒤 끊임없이 당나라의 조롱을 받았다. 당태종 이세민은 “너희 나라는 여인을 주군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웃 나라들로부터 경멸을 받는다”며 당나라 황족이 임시로 신라국왕을 맡아 당나라 군대가 신라를 보호해주다가 신라가 안정되면 국왕 자리를 돌려주는 것은 어떻겠느냐며 모욕적인 제안을 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비담이 여왕 무능론을 내세우며 쿠데타를 일으켰고 내전 상황 속에서 왕이 죽었다. 헌안왕은 그 일을 얘기하며 사위 김응렴에게 왕위를 넘긴다고 유조를 남긴 것이다.
861년 응렴이 왕위에 올랐으니 제48대 경문왕(재위 861∼875)이다. 왕이 된 지 2년 뒤인 863년 겨울에 기상이변이 속출했다. 음력 10월에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가 꽃을 피웠고 한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았다. 왕은 이 불길한 징조가 속출하는 때에 둘째 부인을 맞아들였다. 자신이 그토록 사모했던 둘째 공주, 처제로 불러야 했던 출중한 미모의 여인과 결혼했다.
범교사가 말했다. “제가 세 가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 지금 모두 이뤄졌습니다. 첫째 맏딸에게 장가를 들어 왕이 됐고 두 번째는 전에 흠모하던 둘째 공주를 쉽게 얻을 수 있어서입니다. 마지막으로 왕과 왕비를 기쁘게 했던 것이 세 번째 좋은 일입니다.”
경문왕은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화합정책을 펼쳤다. 둘째 공주를 받아들이던 3년에 민애왕의 극락왕생을 위해 동화사 비로암에 삼층석탑을 세웠다. 이 사실은 사리를 담은 납석제 항아리에 새겨진 글에서 밝혀졌다. 최대정적인 민애왕계와 화합하며 정국을 이끌어가겠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한편 감은사를 찾아 문무왕에게 망제를 지내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위대한 왕의 유업을 잇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황룡사에서 백관에게 잔치를 베풀어 화합의지를 실행했다. 왕권을 상징하는 임해전을 중수했고 국가안보관제탑 역할을 하는 황룡사 탑에 벼락이 떨어지자 공을 들여 탑을 고쳐 만들었다.
경문왕 재위 기간 동안 3차례의 반역이 일어났고 지진 등 자연재해가 잇따랐으나 화합정책을 펼친 덕인 지 왕위 계승이 순조로웠다. 두 아들 헌강왕과 정강왕, 딸 진성영왕이 차례로 왕위를 이어받았고 전성여왕 이후에는 헌강왕의 서자인 효공왕이 왕위에 올랐으니 그에게는 서손이다. 혈족간 죽고 죽이는 혼란한 정치 상황을 고려하면 경문왕 혈통이 상당히 롱런을 한 셈이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첫째 공주를 맞으라는 부하 범교사의 지략을 수용한 덕이다. 그는 자하의 현현역색(賢賢易色, 아내를 선택할 때는 미모보다는 덕행을 중시하라)을 받아들였다. 경문왕이 아내를 고르는 법이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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