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 이후 홀대받던 김유신계 후손들 억울함을 호소하다

779년(혜공왕 15) 4월 초여름, 송화산 김유신 장군릉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바람 속에 김유신 장군이 얼핏 보였다. 준마에 오른 장군과 무장한 군사 40명이 회오리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날아갔다. 바람은 대낮에 오늘날의 충효동 김유신장군릉에서 서천을 건너 곧장 시가지에 진입했다.
 

경주황성공원 독산에 세워진 삼국통일영웅 김유신 장군 동상.

황리단길을 가로질러 대릉원에 있는 죽현릉(미추왕릉) 안으로 들어갔다. 김유신이 죽은 지 106년 되는 해의 일이다. 왕릉 안은 소란스러웠다. 땅을 울리며 통곡하는 것 같기도 했고 간혹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하소연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김유신이 말했다.
“신은 평생 정치를 돕고 시국을 구제하며 삼국을 통일하는 데 공을 세웠습니다. 지금은 혼백이 되었지만, 나라를 지키며 재앙을 물리치고 환란을 구제하려는 마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죄도 없이 죽임을 당했고 임금과 신하들이 저의 공적을 생각해주지 않습니다. 신은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해 애쓰지 않겠사오니 원하건대 왕께서는 허락해주십시오.”

미추왕이 대답했다.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을 어떻게 하겠소. 공은 다시 이전처럼 힘써 주시오.”

김유신이 세 번을 청해도 왕은 세 번 다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회오리바람이 돌아갔다. 『삼국유사』 ‘기이’ 편 ‘미추왕 죽엽군’ 조에 나오는 이야기다.
 

김유신장군릉 입구에 조성된 흥무공원. 흥무대왕 김유신장군을 제향하는 숭무전 일대를 시민공원으로 조성했다.
김유신장군릉. 혜공왕은 김유신장군의 혼령이 미추왕릉을 찾아가 강하게 항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김유신장군의 릉에 사람을 보내 사과했다.

김유신 혼령이 죽은 지 100년이 지나 역시 죽은 지 500년이 다 돼가는 미추왕을 찾아가 거칠게 항의한다. 살아있는 동안은 삼국통일을 이뤘고 죽은 뒤에도 한시도 나라 걱정을 놓아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제는 그 걱정 훌훌 털고 떠나겠다. 그러니 허락해달라고 세 번이나 요청했다. 발단은 후손에 대한 탄압인 듯했다. 7년 전인 경술년(770)에 무슨 이유로 죄 없는 자기 후손을 죽음으로 몰아넣는가라고 하소연도 했다. 미추왕은 당신이 없으면 나라는 누가 지키냐며 붙잡았다.

김유신이 죽은 뒤 김유신계는 급격히 몰락했다. 최초로 환란을 입은 때는 신문왕이 즉위한 뒤다. 신문왕이 즉위하자마자 신문왕의 장인 김흠돌이 난을 일으키다 처형당했는데 김흠돌이 김유신의 조카다. 김흠돌의 난을 계기로 김유신계와 화랑 조직은 쑥대밭이 됐다. 난을 진압한 신문왕은 교서에서 ‘역적의 잔가지와 잎사귀, 흉포한 무리를 쓸어냈다’고 말했을 정도로 가혹한 숙청을 벌였다.

‘죽지랑굴욕사건’ 때 반전이 한 번 있기는 했다. 삼국통일의 영웅이며 4대 임금에 걸쳐 권력의 핵심 자리에 올랐던 죽지랑이다. 그 죽지랑의 부하를 모량부에 있는 부산성을 지키는 하급 관리가 제멋대로 징발해 데려갔다. 죽지랑은 부하가 걱정이 돼 찾아가서 익선에게 휴가를 달라고 당부했다. 익선은 갖은 모욕을 줬다.

김흠돌의 난 이후 김유신계와 진골 귀족의 본거지인 사량부는 몰락하다시피 했다. 사량부가 권력을 휘두르던 자리에 모량부가 들어섰다. 효소왕이 왕위를 이어받았을 때 쯤 모량부의 권력이 왕이 감당 안 될 정도로 커졌다. 죽지랑을 대하는 익선의 방자한 태도가 이 같은 사실을 잘 증명했다. ‘죽지랑굴욕사건’으로 빌미를 잡은 왕은 모량부를 초토화한다. 현직에 있는 모량부출신 관리는 모두 내쫓았다. 승려가 되려는 자는 승복도 입지 못하게 했다. 이미 승려가 된 사람은 종과 북이 있는 큰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해동의 고승 원측 같은 이도 자리를 잡지 못하자 중국으로 건너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효성왕의 이 같은 조치로 김유신계의 입지가 일시적으로 좋아졌는지는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는 않은 것 같다. 성덕왕 때 일이다. 왕이 한가윗날에 월성 마루에서 달구경을 하면서 잔치를 벌이다가 김유신의 적손인 대아찬 윤중을 불렀다. 그때 한 사람이 말했다. “지금 종실과 인척 가운데 좋은 사람이 많은데 어찌 유독 소원한 신하를 부르십니까” 윤중은 신라 귀족들 사이에서 왕따였던 것이다.
 

감은사지. 혜공왕은 재난과 반란이 줄을 잇자 감은사에 행차해 망제를 지냈다.

혜공왕대에 들어서자 정국이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지진이 일었고 별들이 궁궐에 떨어졌다. 우레와 우박이 내려 초목을 해쳤고 호랑이가 궁중에 들어왔다. 민심이 급격히 흉흉해진 가운데 5번의 반역이 일어났다가 무산됐다. 문제의 770년, 김유신이 말했던 경술년에 호랑이가 집사부에 들어왔고 가을에 대아찬 김융이 반역을 시도하다가 처형당했다. 김유신의 혼령이 미추왕릉에 들어가 ‘지난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죄도 없이 죽임을 당했고’라고 말했던 그 자손이 김융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김유신의 주장대로라면 혜공왕이 어지러운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김융을 제물로 삼았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김유신은 왜 함께 전장을 누비며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뤘던 무열왕이나 문무왕을 찾아가지 않고 미추왕을 찾았을까. 신라의 시조왕이라면 박혁거세도 있는데 왜 미추왕이었을까. 이 의문에 대한 열쇠는 신라가 오랫동안 김씨의 나라였다는데 있다. 신라는 내물왕이 김씨 세습제를 고착시킨 뒤 김씨의 나라가 됐다. 미추왕이 김씨 최초의 왕이 된 뒤 마지막 왕 경순왕까지 38명이 왕위에 올랐다. 17대 내물왕부터 52대 효공왕 때까지 550년을 한 번도 다른 성씨에게 왕위를 넘겨주지 않았다. 그러자 시조묘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시조묘는 본래 박혁거세의 오릉이다. 변화의 시작은 신문왕이었다. 김흠돌의 난 이후 신문왕은 강력한 전제정치를 펼치고 있었다. 신문왕이 사실상 5묘제를 도입하면서 김씨 선조만 5묘에 모셨다. 미추왕릉을 5묘의 가운데 모셨다. 박혁거세를 제치고 미추왕을 사실상의 시조왕으로 올린 것이다.
 

경주 황남도 대릉원 앞에 있는 미추왕릉.779년 4월 김유신장군의 혼령이 능 속에 들어가 자신의후손이 죄도 없이 죽었다 미추왕에게 항의했다.
미추왕릉 옆 고분에 있는 대나무숲. 미추왕릉은 대나무를 꽂은 군사들이 적을 물리쳤다고 죽현릉이라고도 한다.

미추왕에게 호국의 상징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도 추가했다. 제14대 유리왕 때 이서국 군사들이 금성을 공격해왔다. 전세가 불리했는데 귀에 대나무를 꽂은 군사들이 나타나 적군을 격파했다. 군사들은 홀연히 사라졌는데 미추왕릉 앞에 대나무 잎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선왕의 공덕인 줄 알고 그 능을 죽현릉이라 불렀다.

김유신이 미추왕을 찾아간 이유가 명확해졌다. 김씨가 왕위에 있는 동안 미추왕은 신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존숭받는 선조왕이었다. 김유신의 미추왕릉 불시방문은 홀대 받고 있는 김유신계의 집단 청원이었던 것이다.

김유신 또한 미추왕과 함께 신라의 지키는 호국의 수호신이다. 삼국을 통일의 주역이고 신문왕 때는 이견대에서 문무왕과 함께 만파식적을 만들 대나무를 신문왕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미추왕 위패를 모시고 있는 숭혜전. 문무왕의 위패와 경순왕의 영정도 모시고 있다.

나라의 두 수호신이 만나 소란했다는 소식을 들은 혜공왕은 혼비백산했다. 상신 김경신은 장군의 능에 보내 사과하고 공덕보전 30결을 취선사에 보내 장군의 명복을 빌게 했다. 김유신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한 미추왕의 덕을 생각해 3산과 함께 제사를 지냈으며 서열을 박혁거세의 오릉 위에 두어 대묘라고 불렀다.

소요는 원만하게 봉합되는 듯했으나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다. 혜공왕이 김경신을 김유신의 능에 보내 사과하게 한 것은 그만큼 그를 믿었기 때문이다. 이게 김유신의 저주로 돌아왔다. 김경신은 이 일이 있는 다음 해인 780년 김양상과 함께 혜공왕을 시해한다.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켜 두 달 동안 왕궁을 점령하자 난을 진압한다며 군사를 데려와 김지정은 물론 혜공왕도 함께 죽였다. 김양상과 김경신이 혜공왕에 이어 돌아가며 왕위에 올랐으니 선덕왕과 원성왕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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