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인의 사랑·이별·삶의 애환 고스란히 전해주는 뮤지컬극장

남천 둔치에 조성된 해바라기 공원. 해바라기가 천관녀의 환생인가 하는 착각을 일으킨다.

신라 왕경의 남쪽에 왕궁인 반월성이 있고 반월성 앞을 흐르는 강이 남천이다. 강을 끼고 벌지지 요석궁 천관사지 오릉이 이어진다. 남천은 신라인의 삶과 사랑이야기를 고스란히 전해주는 뮤지컬극장이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흘간의 사랑, 사지를 향해 떠나는 남편을 그리며 피눈물을 흘린 여인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김춘추가 김유신의 동생 문희와 짝을 지은 곳도 이곳이고 김유신과 천관녀의 비극적인 사랑도 남천을 가운데 두고 전개됐다. 남천은 신라인들의 애절한 사랑의 기록이다.
 

경주 남천 전경. 사진 앞 쪽에 재매정지가 보이고 둔치에 해바라기 공원 멀리 월정교가 보인다.

경주 남천은 경주시 구정동 산지에서 발원해 불국사와 남산, 박물관과 반월성 오릉을 거쳐 서천에서 합류하는 고대 신라의 젖줄이다. 천의 길이는 21.78㎞, 형산강 수계에 속하는 2급 지방하천이다. 강은 삼국유사에 ‘문천(蚊川)’으로 등장한다. 신라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말이 신라팔괴다. 그중 하나가 ‘문천도사(蚊川倒沙)’다. 문천의 모래가 너무 부드러워 물은 아래로 흐르지만, 모래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문천은 시간이 지나면서 물이름 문‘汶’자를 쓰는 ‘문천(汶川)’으로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빼앗긴 경주성을 탈환하기 위해 영남 각지의 의병장들이 모여 마혈을 마시며 결사항전을 결의한 ‘문천회맹(蚊川會盟)’이곳에서 열리기도 했다.
 

장사벌지지. 박제상의 부인이 일본으로 떠나는 남편을 쫓아 율포까지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리를 뻗대며 일어서지 않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박제상 부인의 통곡이 들리는 ‘장사 벌지지’

벌지지는 동남산 코스로 진입하는 길목에 있다. 사천왕사에서 통일전 쪽으로 가면 경북산림연구원 못 미쳐 다리가 나오는데 화랑교다. 이 다리 앞에서 왼쪽 농로로 들어서면 효소왕이 낙성식에 참석했다는 ‘망덕사지’ 남문 입구다. 입구에 선 입석이 ‘장사 벌지지’ 표지석이다.

실성왕이 고구려와 일본에 보해와 미해를 각각 인질로 보냈다. 보해와 미해는 내물왕의 아들로 실성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눌지왕의 아우들이다. 눌지왕은 왕위에 오른 뒤 동생들 생각에 걱정이 많았다. 박제상이 나섰다. 박제상은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던 보해를 구해왔다. 왕이 돌아온 보해를 보고는 일본에 인질로 가 있는 미해를 그리워했다. 보해를 구해온 박제상은 집에 들르지도 않고 선 걸음에 길을 떠났다.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이다. 소식을 들은 박제상의 아내가 남편을 뒤쫓아 갔다. 지금의 울산광역시인 율포까지 쫓아갔으나 남편을 배를 타고 떠나며 손을 흔들었다. 기진맥진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부인은 망덕사 문 남쪽 강의 긴모래 위에 누워 통곡했다. 그 모래벌을 ‘장사’라고 한다. 부인의 친척 두 사람이 부인을 일으켜 세우는데 뻗친 두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지명이 ‘벌지지’가 됐다. 망덕사입구의 표지석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박제상은 일본에서 미해왕자를 구한 뒤 자신은 죽음을 택했고 부인은 치술령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됐다.

원효가 요석공주를 만나기 전에 물에 빠진 다리는 문천교다. 징검다리와 월정교 사이에 문천교가 있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3일간의 사랑 ‘문천교’

문천교는 월정교 아래쪽 20m 지점에 있다. 1986년 월정교 복원을 위한 조사를 벌이던 문화재 관계자가 발견했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월정교가 원효가 요석공주를 찾아갈 때 지나가던 다리가 아니다. 월정교는 경덕왕 때 건설됐으므로 시차가 100년쯤 난다. 원효와 요석공주의 스캔들을 매개한 다리는 문천교이다. 느릅나무 다리라고 해서 유교라고도 했다. 원효는 딱 3일을 현재의 경주향교 자리로 추정되는 요석궁에서 지냈는데 파계의 대가로 신라 10현 중 한 사람인 설총이 탄생했다.

원효가 어느 날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기를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는가? 나는 하늘을 받칠 기둥을 다듬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중략) 그 때 요석궁에 홀로 사는 공주가 있었다. 궁중의 관리를 시켜서 원효를 찾아서 (궁중으로) 맞아들이게 하였다. 궁중의 관리가 칙명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려고 하는데, 벌써 (그는)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고 있어 만나게 되었다. (원효는) 일부러 물에 떨어져 옷을 적셨다. 관리는 스님을 궁으로 인도해 옷을 벗어 말리게 하니, 이 때문에 (그곳에서) 묵게 되었다. 공주가 과연 태기가 있어 설총(薛聰)을 낳았다.”『삼국유사』 권4 의해5 원효불기

김유신 고택의 우물터 재매정지. 김춘추와 문희가 이곳에서 만났다.

△김춘추와 문희가 짝을 지은 곳, 재매정지

월정교 하류에 동쪽으로 교촌마을, 교촌교가 있고 교촌교 하류에 남천을 끼고 재매정지가 있다. 김유신장군 집터의 우물터가 재매정지다. 김유신이 백제와의 전쟁에 승리하고 귀환했을 때 다시 백제의 대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전투에 나서면서 집 앞을 지나치다가 이 우물에서 물을 마시고 “우리 집 물맛이 아직도 옛날 그대로구나”라고 했다는 그 우물이다.

이 집에서 역사적인 스캔들이 일어났다. 김유신이 김춘추와 축국을 하면서 김춘추의 옷깃을 떼어 냈고 자기 집으로 초청해 문희에게 옷깃을 꿰매도록 했다. 부인이 있었던 김춘추는 문희와 야합했고 처남 매부로 얽힌 두 사람은 선덕여왕 때 비담의 난을 평정하면서 권력을 틀어쥐었다. 김춘추는 진골로서 최초의 왕이 됐고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영웅으로 태대각간이 됐으며 죽어서는 흥무왕으로 추존됐다.

천관사지. 김유신에게 버림받은 천관녀가 죽음을 택하자 김유신이 만년에 이 집에 절을 짓고 천관사라 했다.

△남천 둔치의 해바라기는 천관녀의 환생인가

2021년 여름 경주의 핫플레이스는 교촌교 아래에서 오릉까지 이어지는 남천 둔치의 해바라기 공원이다. 공교롭게 이 둔치는 천관녀의 집이었던 천관사와 김유신의 고택 재매정지 가운데 있다. 해바라기는 천관녀의 환생인가. 그럴듯하게 여겨지는 것이 해바라기의 꽃말 중에 숭배 애모 기다림이 있기 때문이다.

이인로(李仁老·1152~1220)의 ‘파한집(破閑集)’에 전해오는 김유신과 천관녀의 사랑은 ‘새드 무비 sad movie)에 언해피 앤딩(unhappy ending)이다. 출세를 꿈꾸는 청년 김유신은 기생 천관녀를 버린다. 술에 취해 졸면서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말이 천관녀의 집으로 그를 데려왔다. 김유신은 단칼에 말을 쳐죽이고 결별을 선언했다. 마음을 크게 다친 천관녀는 목숨을 끊었다. 출세 가도를 달리며 이룰 것 다 이룬 김유신은 만년에 천관녀가 살던 집에 절을 세웠다. 그녀가 늘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 절이 천관사다.

2021년 여름 남천 둔치를 꽉 채운 해바라기가 1300여 년 전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고 죽음을 결행해야 했던 여자와 출세를 위해 사랑을 포기해야 했던 청년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들려준다. 경문왕 때 대나무가 바람이 불 때마다 ‘왕의 귀는 당나귀’라고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해바라기를 배경으로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는 저 많은 사람들 중 해바라기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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