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 외듯 문두루비법 기도 당나라 몰아내고 신라 지켜
668년,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신라가 그렇게 소망했던 한반도 삼국통일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이제 당태종이 무열왕에게 약속했던 ‘평양 이남 땅 신라 귀속’을 이행하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당태종도 무열왕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밀약을 했던 아버지들은 죽고 자식들이 대를 이어 전쟁을 마무리했다. 당고종 이치와 문무왕 김법민이 그들이다. 고구려가 문을 닫자 당고종 이치는 신라를 포함한 삼국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미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비롯한 5개 도독부를 설치하고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았을 때 의도를 비치기는 했다. 고구려가 망하자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어 한반도를 독점 지배하려고 했다. 선왕들의 약속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신라는 소리 없이 움직였다. 당나라와의 사대 외교를 유지하면서 시의적절하게 선제공격을 하며 군사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허허실실, 굽신굽신하면서 상대를 몰아붙이기도 하고 뒤로 빠지기도 했다. 신라는 백제의 옛 땅을 빼앗기 위해 군사를 동원했고 당나라 군사와 충돌했다. 당고종이 발끈했다. 문무왕은 동생 김인문을 사죄사로 보냈다. 당태종은 김인문을 가두고 설방에게 군사 50만 명을 훈련시켜 신라를 칠 계획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당나라에 유학을 갔던 의상대사가 김인문을 만나러 갔다가 이 사실을 듣고 급하게 귀국했다. 소식을 들은 신라는 조야가 발칵 뒤집혔다. 공포가 신라를 뒤덮었다. 신라는 자기들이 알고 있는 한 세계 최강의 군대와 일전을 불사하게 됐다. 이때 혜성같이 나타난 이가 명랑법사(明朗法師)다. 『삼국유사』 권2 ‘문호왕 법민’조에 나오는 이야기를 정리했다.
임금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신하들을 모아 놓고 방책을 물었다. 각간 김천존이 말했다. “근래 명랑법사가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수해 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 명랑이 왕 앞에 나와 말했다. “낭산 남쪽에 신유림이 있으니 그곳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개설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주(개성)에서 국경을 감시하던 연락병이 도착해 상황을 보고했다. “당나라 대군이 우리 국경에 와서 바다 위를 순찰하고 있습니다” 왕이 명랑을 다시 불러 물었다.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니 어찌하면 좋겠소.” “채색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지었으면 좋겠습니다.” 채색 비단으로 절을 짓고 풀로 오방신상을 만들고 유가명승 12사람이 명랑을 우두머리로 하여 문두루비법을 지었다. 그러자 당나라와 신라의 병사가 교전하기도 전에 풍랑이 사납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물에 침몰하였다. 그 후에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라 하였는데 지금껏 단석이 끊이지 아니하였다. 신미년(671)에 당나라 장수 조헌이 5만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왔으나 문두루비법을 쓰자 배가 전과 같이 침몰하였다.
『삼국유사』 기록만 놓고 본다면 나당전쟁(670~676년)의 영웅은 명랑법사다. 명랑은 나당전쟁을 앞두고 전쟁 사령관으로 전격 발탁되자 신유림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워달라고 했다. 절을 세우기도 전에 당나라 군사가 서해에 들이닥치자 채색비단으로 절을 만들고 670년과 671년 2차례나 문두루비법을 지었다. 서해에서 거친 풍랑이 일어났고 바다를 건너는 당나라의 병선이 침몰됐다. 배에 타고 있던 대군도 수장됐다.
어디서 본 듯한 장면이다. 무대를 중국 후베이성 자위현의 적벽으로 옮겨보자. 208년 겨울, 유비와 손권이 이끄는 촉오 10만 연합군은 조조의 위나라 80만 대군과 양자강 적벽(赤壁)에서 명운을 건 한판 승부를 벌인다. 연합군은 화공을 쓰기로 했으나 바람의 방향이 문제였다. 제갈량은 주유에게 “동짓날(음력 11월 20일)부터 3일 동안 거센 남동풍을 빌려 오겠다”며 제단을 세우고 기도에 들어간다. 약속했던 날에 남동풍이 불었고, 조조의 대군은 바람을 타고 쏟아지는 연합군의 불화살에 궤멸됐다. 명랑법사가 문두루 비법을 적어 기도하는 장면은 제갈량이 제단을 쌓고 기도를 하던 장면과 겹치며 ‘국뽕’에 빠지게 한다. 통쾌하다.
명랑법사는 금수저였다. 아버지는 사간 김재량, 어머니는 남간부인이다. 외가가 중고기 신라를 대표하는 가문이었다. 외조부가 선덕여왕의 친족인 소판 김무림이다. 무엇보다 외삼촌이 자장 율사다. 어머니 남간부인의 오빠다. 자장은 636년 당나라에 유학해 7년 만에 귀국한 뒤 선덕여왕대에 대국통을 지냈다. 자장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신라를 둘러싼 일본, 당, 오월, 탐라, 백제 고구려 등 주변 아홉 나라가 항복하고 조공을 하여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어령은 황룡사 9층탑을 오늘날의 ‘통일문제연구소’나 ‘국가안전보장회의’ 같은 구실을 했다고 봤다.
외가의 후광을 입은 덕인지 개인의 능력이 출중했던지 명랑의 3형제가 당대 신라에서 모두 한몫을 했다. 국교대덕은 명랑의 큰 형이다. 대덕의 지위에 있으면서 국왕의 자문역을 맡았다. 둘째 형은 의안대덕. 문무왕대에 대서성을 지냈다. 의안은 나당전쟁기간 중 백제와 고구려에서 흡수된 고급인력의 마음을 모으는 중요한 직책을 수행했다.
나당전쟁 사령관 발탁…백제·고구려 고급인력 마음 모으는 중책 수행
명랑이 나당전쟁에서 전쟁 지휘를 맡게 된 데는 집안 배경도 한몫을 톡톡히 했겠지만 나름대로 쌓은 독특한 스팩이 작용했다. 그는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 사는 용의 요청으로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수해줬다. 명랑은 용왕으로부터 황금 천냥(혹은 천근이라고도 한다)을 시주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올 때 땅 밑으로 잠행하여 자신의 집 우물 밑에서 솟아 나왔다. 집을 절로 만들고 용왕에게서 받은 황금으로 탑과 불상을 꾸미니 광채가 특별히 뛰어났다. 하여 절 이름을 금광사(金光寺)라 했다.
금광사가 있던 곳은 경주 탑동 남간사 당간지주 근처로 추정된다. 금광지라는 못이 있었는데 1970년경에 매립하는 바람에 절터가 논이 됐다. 매립 당시 초석이 남아있었고 선정인을 한 석조여래상 1구가 출토됐다. 이 일대는 명랑이나 명랑 외가의 장원이나 영지로 추정되기도 한다. 명랑의 어머니 남간부인의 이름이 남간사의 남간과 같은 것도 그렇고 당간지주 뒤쪽 산을 넘어가면 마애불상군이 있는 탑곡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신인종의 조사인 명랑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 일대는 신라의 첫 왕인 박혁거세가 탄생한 ‘나정’과 ‘신라의 히포크라테스’ 혜통스님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또 남간사 당간지주 남동쪽 산기슭에는 박혁거세왕의 첫 궁궐터인 창림사지가 있는 성스러운 곳이다. 삼국유사 이야기가 풍성한 곳이다.
명랑이 불법을 전수해준 용궁은 어디일까? 인도나 동남아시아라는 주장도 있지만, 나당전쟁의 길목인 서해 그 자체일 수도 있다. 명랑은 당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당나라의 한반도 침입 루트인 서해의 섬과 해로, 파도, 기상 등에 대해 충분히 연구했던 것은 아닐까. 돌아오는 길에 ‘땅속으로 잠행해 자기 집 우물에서 솟올랐다’는 기사도 비밀 프로젝트를 수행했다는 추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다. 사천왕사를 짓고 문두루비법을 지을 때 이미 당나라 병선의 움직임 등 군사정보를 파악하고 기상 상황, 파도의 크기 등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도는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 요식행위였을지도 모르겠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