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달라왕이 죽은 뒤 728년 만에 '박씨 왕'이 즉위하다

삼릉. 앞에서부터 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 순이다.

경주 동남산 자락에 있는 삼릉은 천년 왕국 신라의 패망을 증언하는 기록이다. 삼릉의 주인은 제8대 아달라왕,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이다. 삼릉 남쪽에 1기의 왕릉이 더 있는데 55대 경애왕릉이다. 4기의 왕릉은 모두 박씨릉이다. 신덕왕은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고 경명왕과 경애왕은 신덕왕의 아들들이다. 이 왕릉의 주인을 놓고 논란이 많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언급된 왕릉 위치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왕릉 주인의 진위와 관계없이 삼릉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선명하다. 이들은 모두 박씨왕이며 아달라왕이 죽은 뒤 728년 만인 신라 말기에 박씨 3인이 다시 신라의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제17대 내물왕 때부터 김씨세습제가 확립된 이후 52대 효공왕까지 556년 동안 지탱해오던 김씨 왕조가 막을 내리고 다시 박씨 왕조가 시작된 배경은 무엇일까. 삼릉은 그 이야기를 품고 있다.
 

경애왕릉 가는 길.경애왕릉은 삼릉 남쪽에 있다.

신라는 진성여왕대에 들어 급격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사실상 여왕의 남편 역할을 하던 각간 위홍이 죽자 여왕은 젊은 미남들을 끌어들여 방탕한 생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국정을 맡겼다. 재정이 궁핍해졌고 세금을 걷기 위해 독촉을 하자 지방호족들이 벌떼 같이 일어났다. 원종과 애노가 대표적인 반발 세력이다. 북원의 양길이 변방을 괴롭혔고 견훤이 완주에서 후백제를 일으켰다.

이 시기에 등장한 인물이 김효종(金孝宗)이다. 김효종은 제3재상 서발한 김인경의 아들로 화랑의 우두머리를 지냈고 대야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효공왕 때 집사성 중시를 맡을 정도로 권력의 핵심에 깊숙이 발을 들였다. 그는 화랑시절 벌써 신라인들의 존경을 받을 정도로 두각을 드러내 자식이 없는 진성여왕을 이을 왕의 재목으로 꼽혔다.
 

분황사와 분황사 동쪽 들판. 효녀 지은의 집은 분황사 동쪽마을에 있었다고 한다.

효종랑이 남산의 포석정(혹은 삼화술)이라고도 한다)에서 놀고 있을 때 문객들이 매우 급히 달려왔는데 오직 두 사람만 뒤에 왔다. 효종랑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했다 “분황사의 동쪽 마을에 나이가 스무 살쯤 된 여인이 눈먼 어머니를 껴안고 서로 목놓아 슬피 울고 있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여자의 집은 가난하여 음식을 빌어서 어머니를 봉향한 지 몇 해 되었는데, 마침 흉년을 만나 문전에서 걸식하기도 어려워지자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팔아 곡식 30석을 얻어서 주인집에 맡겨 놓고 일을 하였습니다. 날이 저물면 쌀을 싸 가지고 집으로 와서 밥을 지었고 (어머니와) 함께 자고 새벽이면 주인집에 가서 일하였습니다.(중략) 여인이 그 사실대로 말했더니 어머니가 통곡하고 여인은 자기가 다만 어머니의 입과 배만 봉양하고 마음을 살필 줄 모르는 것을 한탄하여 서로 붙잡고 울게 된 것입니다.” 『삼국유사 권5 ‘빈녀양모’.

이 여인이 『삼국사기』권 제48 ‘열전’ 편 ‘효녀 지은’의 지은이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김효종은 눈물을 흘리며 곡식 100곡을 지은에게 보냈다. 효종의 부모도 옷 한 벌을 보냈으며 효종을 따르는 화랑 무리들도 모곡 운동을 벌여 조 1000석을 거둬 주었다. 진성여왕이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곡식 500석과 집을 한 채 내려줬다.
 

효공왕릉. 효공왕은 헌강왕의 서자로 진성여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김효종은 이 일로 진성여왕의 신임을 얻어 여왕의 오빠인 헌강왕의 두 딸 중 맏딸과 결혼한다. 김효종은 경문왕가의 일원이 됐고 왕위계승 영순위에 올랐다. 김효종은 화랑의 이끈 경력에다 효녀 지은에게 보인 자비심과 대야성 전투에서 승리를 이끈 군사적 역량 등으로 신라인들의 신망을 한 몸에 얻고 있었다.

돌발 변수가 발생했다. 있는 지도 몰랐던 헌강왕의 서자 요(嶢)가 나타났던 것이다. 진성여왕에게는 왕위를 물려줄 배다른 동생이 나타난 것이다. 헌강왕은 겨울에 사냥을 갔다가 길옆에서 자태가 고운 여자를 만나 장막에서 야합을 했는데 그 아이가 요였다. 진성여왕 9년에서 그 사실을 알고 궁으로 데려왔다. 여왕은 13살짜리 소년의 등을 쓰다듬은 뒤 “이 아이의 등위에 두 뼈가 솟아 있으니 정말 헌강왕의 아들이겠구나”라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태자로 삼았다.

헌강왕의 서자가 십수 년 만에 등장한 배경에는 예겸이 있었다. 예겸은 킹메이커를 자처했던 것 같다. 예겸은 헌강왕 즉위 때 시중으로 발탁돼 상대등 위홍과 나라를 이끌다 위홍과 갈등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진성여왕이 즉위하고 국정을 좌지우지하던 위홍이 죽으면서 원종 애공 등 반란 세력 들불처럼 일어나자 정계에 복귀했다. 그는 여왕 7년에 자신의 의자(義子) 박경휘(삼국사기는 아들이라고 기록)를 헌강왕의 둘째 딸과 결혼 시킨다. 이로써 김효종과 박경휘는 죽은 헌강왕의 사위가 됐고 경문왕가의 일원이 됐다. 왕위를 놓고 각축을 벌이는 상황이 됐던 것이다.

박경휘는 김효종에 비해 스펙이나 지명도에서 확연히 떨어졌다. ‘듣보잡’에 불과했다. 헌강왕의 버려지다시피 한 서자 카드는 이런 구도 속에서 나왔을 것으로 보인다. 예겸은 시간을 끌어 김효종을 맥 빠지게 하고 그동안 자신들의 세력을 구축할 계획이었다. 진성여왕은 재위 11년 여름에 요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해 겨울에 죽었다. 요는 52대 효공왕에 등극했다. 예겸은 자신의 딸을 효공왕과 결혼시켰다. 국정을 쥐락펴락하던 예겸이 이제는 왕의 장인이 됐다. 이제 나라는 완전히 예겸의 손아귀에 들었다.

김효종은 효공왕 6년까지는 어느 정도 세력을 유지했던 것 같다. 그해에 집사부 시중에 올랐다. 그러나 그 이후 어떤 기록에도 그의 행적을 보이지 않는다.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죽었거나 병들어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박경휘의 의부 예겸도 효공왕 말년에 죽었지만, 박경휘가 왕위에 오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예겸이 이미 길을 잘 닦아 놓은 데다 박경휘 말고는 경문왕가의 일원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참포에서 동해물과 참포물이 부딪쳐 60m로 치솟았다고 한다. 지금의 포항 흥해 곡강천.

박경휘가 53대 신덕왕이다. 신덕왕은 존재 자체가 미미했다. 『삼국유사』 ‘왕력’편에 간단히 가계가 몇 줄 소개됐을 뿐이다. 『삼국사기』에서도 일체의 정치적 기사는 없고 천재지변에 관한 기사만 언급됐을 뿐이다. 서리가 내렸고 지진이 쳤으며 참포(지금의 포항 흥해 곡강)에서 동해의 물과 참포의 물이 부딪쳐서 물결의 높이가 60m(20장) 치솟았다는 기록이 눈에 띈다. 이후 신덕왕의 아들 경명왕이 왕위를 이었고 나라는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사천왕사지. 경명왕 때 사천왕사 오방신의 활줄이 끊어졌고 벽화 속의 개가 짖었다

일길찬 현승이 반역을 하다가 처형당했고 호국의 아이콘 사천왕사의 소조상의 활시위가 끊어지고 벽화 속의 개가 짖었다. 경명왕이 죽고 왕의 아우 경애왕이 왕좌를 물려받았지만 이미 기울어진 나라를 바로 세우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재위 4년만인 927년 신라를 쳐들어온 견훤에게 죽임을 당했다. 728년 만에 박씨가 정권을 잡았지만 3명의 왕이 15년 만에 막을 내렸다.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견훤에게 죽임을 당했고 왕비는 능욕을 당했다. 왕좌는 다시 김씨에게 돌아갔다. 경애왕에 이어 왕에 오른 이는 김효종의 아들 경순왕 김부다. 아버지가 박씨에게 빼앗겼던 왕위를 되찾았으나 왕건에게 나라를 바침으로써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됐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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