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손으로 와서 신라의 4대 왕이되고 '동악신'으로 추앙받다

토함산 정상에 있는 탈해왕사당터.

석탈해는 바다에서 왔다. 다른 성씨의 시조들이 대개 하늘에서 탄강한 것과는 달리 그는 거친 물결을 헤치고 서라벌의 아진포 하서지촌에 들어왔다. 이에 앞서 그는 왕이 되려는 포부를 안고 가락국에 들어갔다가 수로왕에게 쫓겨났다. 서라벌의 궁벽한 어촌 마을로 흘러 들어온 ‘바다의 왕자’가 처음 만난 사람은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혁거세의 해척 할미였다. 해척은 고기잡이하던 신량역천(身良役賤, 신분은 양인이지만 천민들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아진의선은 왕에게 바칠 고기를 잡는 사람이었다.

하루는 아진의선이 바다에 나갔다가 놀라운 광경을 본다. 바다 가운데 낯선 배가 떠 있고 까치가 모여들어 울고 있었다. 배를 끌어냈다. 배 안에 큰 궤짝이 하나 있었는데 길이가 20척, 폭이 13척이나 됐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궤짝을 여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두려웠다. 노파는 하늘에 기도했다. 나쁜 일이 생기지 않기를. 상자에는 단정하게 생긴 남자아이와 칠보, 노비가 가득 차 있었다.

석탈해는 그렇게 서라벌 바다에 떠 있다가 해척 노파의 손에 이끌려 서라벌 땅에 도착했다.
 

모우각. 비석 전면에 신라석탈해왕 비명이 새겨 있다.

탈해가 아진포에 와서 바다 가운데 머물러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이미 가락국에서 수로왕을 만나 왕의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술법대결을 벌였다. 탈해가 매로 변하니 수로왕는 독수리로, 참새로 변하니 새매로 변신했다. 수로왕이 늘 한 수 위의 내공을 펼쳤다. 그렇게 쫓겨나서 찾은 곳이 서라벌 아진포이고 처음 만난 이가 고기잡는 노파였다. 신라 제4대왕이며 석씨의 시조인 탈해의 탄강신화 세레머니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박혁거세는 6부촌장의 축복 속에 알에서 태어나 만인의 축복과 존경을 받으며 왕이 됐고 김알지는 금궤에서 나오는 순간 새와 짐승들이 함께 따라와 기뻐서 날뛰며 춤을 추었다. 탈해의 시작은 미약했다.
 

탈해왕탄강유허비각.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월성원전 옆 공원에 있다.
탈해왕탄강유허비.

탈해가 탄강한 아진포는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로 추정되고 있다. 실제 나아리 월성원자력 옆 공원에 ‘신라탈해왕탄강유허지비’ 비각이 있다. 이 비각은 조선 헌종11년(1845) 건립됐다. 그러나 실제 아진포는 나아리의 남쪽에 있는 하서1리라는 주장도 있다. 탈해가 처음 닿은 곳이 하서지촌 아진포인데 ‘하서지촌’이 지금의 하서1리라는 것이다. 하서1리의 하서항은 하서천을 따라 토함산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으므로 탈해가 토함산에서 일주일 동안 돌무덤 속에서 지냈다는 기록과 일치한다는 주장이다.

가락국 수로왕과의 맞짱 대결에서 패한 탈해는 신중하게 움직였다. 우선 아진포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아진의선에게 입을 연다. 자신이 얼마나 고귀한 사람인지를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본래 용성국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일찍이 28용왕이 있었다. 모두 사람의 태에서 나왔고 5, 6세 때부터 만민을 가르쳐 성명을 올바르게 하였다. 8품의 성골이 있으나 선택하는 일이 없이 모두 왕위에 올랐다. 이때 우리 부왕 함달파가 적녀국의 왕녀를 맞아서 비를 삼았더니 오래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기도하여 아들을 구할 때 7년 뒤에 큰 알을 하나를 낳았다. 이에 대왕이 군신에게 묻되 사람으로서 알을 낳은 고금에 없는 일이니 이것이 불길할 징조이라 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넣고 또 칠보와 노비를 배 안에 가득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마음대로 인연 있는 곳에 가서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라 하였다. 그러자 문득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여 여기에 왔노라” -『삼국유사』 ‘기이’ ‘제4탈해왕’ 중에서
 

탈해왕릉. 금강산 남쪽 끝자락에 있다. 소나무 숲이 아름답다

탈해는 자신의 신분과 집안 배경을 밝히고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라’고 한 자기 아버지의 말을 소개하면서 왕이 될 뜻을 분명히 밝혔다. 상당한 자신감이다. 탈해의 이 말은 노파의 입을 타고 궁중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탈해는 가락국의 수로왕과 맞짱 대결을 벌였다가 낭패를 봤던 터라 신중하게 움직였다. 노비 두 명을 데리고 토함산에 올라가 돌무덤을 파고 일주일 동안 성안을 살폈다.

드디어 목표를 정했다. 서라벌 중심지에 초승달 같이 생긴 산봉우리다. 나중에 신라의 왕궁이 되는 반월성이다. 거기에 호공의 집이 딱 마음에 들었다. 호공은 원래 왜국 출신으로 표주박(瓠)을 차고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마한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후일 김알지를 금궤에서 발견한 실력자였다. 탈해는 호공을 희생양 삼아 서라벌에서 자기의 명성과 입지를 다져볼 요량이었다. 미리 담장을 넣어가 땅속에 숯과 숫돌을 묻었다. 탈해는 호공을 찾아가 여기는 내 집이니 집을 돌려달라고 요구했고 호공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펄쩍 뛰었다. 결국 송사가 벌어졌다. 탈해 측 동자가 말했다. “우리는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시 이웃 시골에 간 동안 다른 사람들이 빼앗아 살고 있으니 땅을 파보면 알 것이다” 땅을 파보니 정말 대장장이들이 사용하던 숯과 숫돌이 나왔다. 그 집을 탈해가 차지했다.
 

하서리 갯목. 탈해왕이 시날로 들어왔다는 하서지촌 아진포 중 하나로 추정된다.

이 대목은 용성국에서 온 탈해 세력과 왜국에서 온 호공 세력의 연합으로 봐도 좋겠다. 용성국은 인도로 보기도 하고 러시아의 캄차카반도, 일본으로 보기도 한다. 호공은 58년(탈해2) 탈해가 왕이 되자 귀족회의의 장인 대보에 올라서 나라와 군대의 정사에 대한 논의를 주관했다. 호공은 김알지의 탄강을 제일 먼저 알고 왕에게 보고 하기도 했다. 이들의 연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탈해가 호공에게서 뺏은 집은 탈해의 다음 왕 파사왕대에 와서 왕궁이 된다. 월성은 이후 경순왕이 나라를 왕건에게 넘길 때까지 약 830년 동안 왕궁이었다.

호공의 집을 차지하면서 탈해는 서라벌 정가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제2대 남해왕이 탈해의 지혜에 마음이 끌렸다. 큰 공주의 사위로 삼고 결혼한 딸의 이름을 아니부인으로 불렀다. 탈해는 자신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신화를 만들어냈다.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갔다가 하인에게 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목이 말랐던 하인이 먼저 물을 마셨다. 그러자 물잔이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하인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하자 그릇이 저절로 떨어졌다. 그때부터 말이 돌았다. 탈해를 속이다가는 경을 친다. 그 우물이 토함산에 있는 요내정이다. 요내정의 위치를 두고도 여러 가지 설이 많다.

 

숭신전. 탈해왕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다.
숭신전. 탈해왕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다.

노례왕(삼국사기의 유리왕)은 처음에 매부인 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다. 처남 매부 간에 서로 왕의 자리를 서로 미뤘다. 결국 이가 많은 사람을 왕으로 정하기로 하고 노례왕이 먼저 왕위에 올랐다. 노례왕이 죽자 탈해가 왕위에 올랐다. 노례왕이 34년 동안 왕좌에 있는 바람에 그의 나이 62세에 왕이 됐다. 재위기간 중에 김알지가 시림에서 나왔으므로 계림으로 바꿔 부르고 국호를 계림이라 했다. 그는 죽어서는 신이 되고 싶었다. 삼국통일이 된 지 4년 뒤 문무왕의 꿈에 나타나 “나는 탈해인데 내 뼈를 소천구에서 파내어 소상을 만들고 토함산에 봉안하라”고 말했다. 문무왕은 그의 말대로 했고 그를 동악신으로 불렀다. 토함산은 남산 낭산 선도산 금강산과 함께 신라왕경 오악의 하나로 동악에 속하며 국태민안을 비는 제사가 열리는 성지였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은 2020년 11월 토함산 정상에서 명문기와 분청사기 청동방울과 신라시대 건물지를 발굴했는데 석탈해사당터로 추정했다. 실제 탈해는 신라의 동악신으로 추앙받았던 것이다. 탈해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빈손으로 와서 왕이 되고 신라의 신이 되는 성공한 삶을 살았다.

탈해왕릉은 동천동 금강산 남단 표암 옆에 있으며 능 옆에는 탈해왕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숭신전이 있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