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에서 다루지 못한 초현실적인 '민중의 역사서' 태동하다
머리말에 이른다. 대체로 옛날 성인은 예악으로써 나라를 일으키고 인(仁)으로써 가르침을 베푸는데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았다. 제왕이 장차 일어나려고 할 때는 하늘의 명과 예언서를 받게 되니 반드시 남과는 다름이 있다. 그런 후에야 능히 큰 변화를 타서 제왕의 지위를 차지하여 큰일을 이룰 수가 있었다. 황하에서 등에 팔괘가 그려진 용마가 나왔고 낙수로부터 낙수에서는 등에 글이 새겨진 신비로운 거북이 나와서 성인이 일어났다. 무지개가 신모를 둘러싸 복희를 낳았고 용이 여등에게 감응하여 신농씨를 낳았다. 황아가 궁상의 들에서 놀다가 백제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는 신동과 정을 통하여 소호를 낳았고 간적은 알을 삼키고서 설을 낳았다. 강원은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서 기를 낳았고 요는 임신된 지 14개월 만에 태어났다. 용이 큰 연못에서 교접하여 패공(유방)을 낳았다. 그 뒤의 일은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한데서 나왔다고 해서 무엇이 괴이하겠는가? 기이가 이 책의 처음에 실린 그 뜻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삼국유사』 ‘기이’서
유사에서 문장으로 시작하는 사실상의 첫 글이 ‘서(敍)다. 유사 전체를 아우르는 서문으로 봐도 좋겠다. 수도 없이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통쾌하다. 일연은 공자를 건드렸다. ‘대체로 옛날 성인은 예악으로써 나라를 일으키고 인으로써 가르침을 베푸는데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았다’라는 문장으로 포문을 열었다. ‘논어’ ‘술이’편에서 ‘공자는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았다(자불어 괴력난신 子不語 怪力亂神)’라고 말한 대목을 비판했다. ‘괴력난신’은 이상하고 의심스러운 것, 상식적이지 않은 괴력이나 폭력,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거나 자식이 아비를 살해하는 것, 귀신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현상 등을 말한다.
일연은 그렇다면 복희씨 시절에 황하에서 등에 아름다운 도안을 가진 용마가 출현한 것과 낙수에서 신비로운 숫자를 새긴 신비로운 거북이 나와서 성인이 그것을 본받았다는 ‘주역’의 말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또 고대 중국 3황의 하나로 소의 머리를 가진 반인반수 농사의 신, 여와 복희씨와 염제 신농씨의 탄생 신화와 한고조 유방의 어머니가 큰 연못에서 용과 교접해 유방을 낳았다는 전설은 황당하지 않으냐고 반문한다. 그 끝에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한 탄생과정을 거쳤는데 그걸 쓰는 게 뭐가 이상한가, 기이는 그런 이야기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공자가 인간이 도덕적 가치를 추구하고 그것을 실행함으로써 국가나 사회가 흥하거나 망한다고 본 반면 일연은 초인적인 힘이 작용해 세상의 질서를 만들어간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쨌건 일연은 서문을 써서 인류의 ‘오래된 스승’ 공자의 정강이를 세게 찼다. 일연은 어쩌면 공자의 춘추필법을 이어받은 ‘삼국사기’의 김부식을 저격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유사는 사기에서 다루지 못했던 ‘괴력난신’을 무제한 방출함으로써 우리 고대사를 ‘유쾌 상쾌 통쾌’한 판타지로 만들었고 2천역사의 삼국의 유적지에 꺼지지 않는 생명의 불씨를 불어넣었다.
그 풍성한 드라마가 완성된 곳이 군위 인각사다. 앞서 인용한 유사 서문도 여기서 썼을 것이다. 인각사는 642년(선덕여왕 11)또는 643년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된 유서 깊은 절이다. 실제 인각사 발굴 결과 일대에서 보기 드문 규모의 거대한 통일신라시대 사찰터가 확인됐다. 신라의 유서 깊은 절에서 삼국의 판타지를 완성하고 싶었을까? 일연은 1284년(충렬왕 10) 소망하던 인각사에 왔다. 어머니를 봉양하고 싶어 왕에게 인각사행을 허락을 구했지만 정작 어머니가 돌아가고 나서야 인각사 거주가 허락됐다. 그때가 79세였다. 왕이 근시 김용검에게 명령해 인각사를 수리하게 하는 한편 100여 경의 토지를 하사했다. 그에 앞서 1283년에 충렬왕은 일연을 국존에 책봉하고 호를 원경충조라 했다. 일연은 5년 동안 인각사에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완성했다. 그에 앞서 1278년 인흥사에 머물던 시절 유사 편찬의 토대가 된 ‘역대연표’를 간행했다. 인각사에 와서는 역대연표의 뼈대 위에 살을 붙이는 작업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유사는 평생토록 전국의 절들을 돌아다니며 팔순의 노승이 자료를 수집하고 쓴 ‘발로 담은 기록’이다.
일연은 14살 때 진전사에 출가해 8년을 머물렀다. ‘낙산 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은 진전사 근처에 있던 낙산사 이야기이다. 대구 비슬산의 보당암에 머무르면서 관기와 도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포산이성’ 이야기를 수집했고 포항 오어사에 있을 때 혜공과 원효의 물고기 이야기 ‘이혜동진’을 구상했을 것이다. 청도 운문사와 경주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황룡사 9층 석탑 자리에는 최소 2번은 방문했다고 한다.
일연이 5년을 머물렀다는 인각사에는 일연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다. 절 마당에 들어서면 시인 고은이 쓴 ‘일연찬가’ 시비가 길손을 맞는다. ‘오라, 화산 기슭 인각사로 오라/ 하늘 아래 두 갈래 세 갈래 찢어진 겨레 아니라 오직 한 겨레임을 옛 조선 단군으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나라였음을 우리 자손만대에 소식 전한 그이 보각국존 일연선사를 만나 보러 여기 인각사로 오라’로 시작되는 시는 엄숙하고 웅장하다. 그러나 일연의 일대기를 적은 고려시대의 ‘보각국사비’는 처참하기 짝이 없다. 이 비는 일연이 입적한 6년 뒤인 1295년 왕의 칙명을 받은 민지가 지은 비문을, 죽허가 왕희지 글자를 집자해 새겼다. 정유재란 때 왜군이 인각사에 방화를 했다. 이때 비석도 깨지고 비문도 뭉개졌다고 한다.
보각국사 부도탑은 자연석의 지대석 위에 하대석을 올렸는데 복련 16장을 선각으로 새겼다. 8면의 중대석은 각 면에 사각형을 만들고 각면마다 동물을 한 마리씩 새겨 넣었다. 상대석은 8장의 앙련을 새겼고 고 그 위에 팔각형의 몸돌을 올려놓았다. 몸돌의 정면에 ‘보각국사정조지탑 普覺國師靜照之塔’ 두 줄로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문비를 새겼다. 부도탑 옆에 나란히 있는 돌부처는 고로면 괴산리 폐사터에서 옮겨왔다. 일연의 부도탑 옆에 있으니 성불한 일연이 저런 모습으로 좌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인각사 앞을 흐르는 강은 위천(渭川)이다. 강건너 편에 강을 병풍처럼 막아선 수직의 절벽은 학소대다. 학이 집을 짓고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인각사의 이름은 학소대에서 나왔다고 한다. 기린이 학소대 벼랑바위에 뿔은 건 적이 있는데 이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일연도 위천에 나와 학소대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도끼로 내려친 듯한 수직의 벼랑바위에 기린이 뿔을 걸고 있다는 절 이름의 의미도 생각해봤을 것이다. 직벽 아래 서슬 푸른 물이 흐르고 사람의 삶도 그와 같이 흘러간다는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혼을 불태워 쓰고 또 썼을 것이다. 그는 평생 100여 권에 이르는 저술을 했으나 현재 남겨진 것은『삼국유사』‘중편종동오위’ 책밖에 없다. 소설가 김훈은 삼국유사에 대해 “일연은 부서질 수 없고 불에 탈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썼다. 이것이 당대의 야만에 맞서는 그의 싸움이었다”고 말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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