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두분 대신해 17살 때부터 아버님 밑에서 가업 이어
정호다완을 40여 년간 만들어 왔지만 여전히 조심스러워
젊은 도공들은 현실에 맞는 작품으로 전통 계승해 주길
국내 유일의 도자기 분야 국가무형유산 백산 김정옥(84·영남요) 선생. 300년에 걸쳐 9대째 사기장 가업을 잇고 있는 백산 선생은 아직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주한 외교 사절들이 대거 참석한 문경새재 문화유산 야행을 진행하는 등 전통 도자기 세계화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화통톡쇼’는 67년째 도자기를 빚고 백산 김정옥 선생의 걸어온 길과 앞으로 계획을 들어보았다.
-굉장히 건강해 보이신다. 건강 관리 비결은.
△별도로 건강 관리를 따로 한 건 없다. 그저 마음 편하게 욕심 안 내고 그렇게 살고 있다.
-도자기의 산 역사이신데 올해 도자 인생이 몇 년째이신지
△흙을 만지기는 17세 때부터였다. 지금 84세니까 67년이 된 듯하다.
-300년 가업 역사 소개를.
△1대 할아버지가 조선조 영조시대 때 그때 그분의 아버님께서는 훈장을 하셨다. 지금 교수라면 살기가 풍족하지만, 그때는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아동 10여 명 가르치는데 가을에는 나락 한 말, 여름에는 보리 한 말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할아버지에게 외아들이 있었는데 나는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도자기를 배워서 배불리 먹고 살아야 되겠다 뭐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부터 도자기를 하게 된 시초가 됐다. 2대 할아버지는 상주군 화북면이란 옛날 속칭으로 밤칫골이라고 하는데 거기로 가셨다. 그곳에 흙도 있고 또 나무도 있어서 가셨다고 생각된다. 그분의 아드님은 지금의 관음으로 귀향을 했다. 왜 귀향을 했나 하면 관음에서는 흙과 나무가 해결됐다. 소백산맥 넘어가서 충북 제천, 단양까지 가서 나무를 베어 가지고 왔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세월이 흘러 해방되고 가마가 아주 많이 생겨났다. 6·25가 터지니까 가마가 폐점이 다 되고 유일하게 우리 아버님만 가마를 지켰다. 아버님이 도자기를 처음부터 끝까지를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아버님밖에 없었다. 가정 형편상 17세 때 내가 아버님 밑에서 도자기를 배우게 됐다.
-도자기의 맥이 끊어질 위기는 없었는지.
△내 위로 형님이 두 분 계셨다. 직업도 다 팔자소관이다. 형님 두 분 중에 어느 분 한 분이라도 도자기를 했으면 내가 안 했다. 아버님은 연세가 많으셨다. 그래서 집안이 굉장히 어려워졌다. 젊은 사람 고용도 조금 했지만, 형편이 어려워져 전답을 팔아서 인건비도 주고 하던 시기도 있었다. 17살 때 그건 내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하게 됐다. 형님들이 어느 한 분이라도 했으면 내가 안 했다. 왜냐하면 한 집안에 도공이 둘이 있을 수가 없었다.
-도자기 분야 유일의 국가무형문화재(무형유산) 전수관인데 관람객이 많이 오는지.
△외국인들이 많이 온다. 체험도 하고 또 관람도 하고 그래서 외국인 들어오면 방명록에 사인받아 놓는다.
-외교사절이 최근 많이 다녀가셨는데.
△올해는 특히 야행 행사에 외국 대사 100여 분이 와서 야행에 참여하고 또 한복 패션쇼도 하고 굉장히 좋아했다.
-야행 행사 소개한다면.
△야행 행사는 경북에서 경주·안동·문경에서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문경에서는 무형유산들이 참여해서 그분들이 전시도 하고 또 시연도 하고 또 여러 가지를 그분들 중심으로 이렇게 야행을 했다.
-미디어 아트에 대한 소개를.
△그전에는 작품 전시만 해놓았는데 정부 지원을 받아서 작품 제작 모든 과정과 작품 전시, 1대부터 지금까지 사용해오던 물레 전시 또 독일 공연 등을 모든 과정을 담았다. 이밖에 전시와 가마 만드는 과정도 포함돼 미디어 아트를 보면 우리 집안이 어떻게 살아왔다 하는 걸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그렇게 돼 있다.
-독일 공연 소개 부탁.
△한독 수교 140주년 되는 해라서 정부가 독일에 가서 공연을 해주면 좋겠다는 요청이 들어와서 가서 하게 됐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혼자 간 게 아니고 나와 아들 손자, 무용수들이 가서 흙이 도자기가 되는 과정을 흙으로 표현하는 이런 역할도 하고 이런 퍼포먼스를 했다.
-어떤 작품이 만들기 가장 힘든지.
△달항아리가 매우 힘들다. 혼자 못하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 붙이기가 힘들다. 정호다완을 40여 년 동안 만들어 왔다. 그런데 다완 중에는 정호다완이 가장 제작 과정이 어렵지 않나 이렇게 생각한다. 그냥 보통 그릇은 물만 안 새고 이러면 되는데 이건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선조들이 만든 정호다완을 일본이 국보로 지정하기도 하지 않았나 생각을 한다.
-정호다완이라면 백산 선생님을, 백산 선생님이라면 정호다완을 떠올리는데.
△열심히 정호다완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열심히 공부했다. 또 계속 제작해 왔지만, 내 정호다완이 세계에 제일이라 생각을 해본 적 없다.
-달항아리가 외국 박물관에 많이 전시되고 있는지.
△달항아리는 미국 미주리대 박물관에 전시돼 있고 다른 데는 달항아리는 전시를 안 하고 다른 작품이 전시돼 있는 거로 알고 있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또 캐나다 왕립 박물관, 독일의 동아시아 국립박물관, 프랑스의 세브르 국립박물관 등에 전시되어 있는데 달항아리는 미국의 미주리대학에만 있는 걸로 기억이 난다.
-오래된 발물레 소개를.
△기계로 하니까 발물레 만들기가 어렵지 않다. 옛날에는 전부 수작업으로 인해서 기간도 오래 걸리고 또 가격도 쌀 세 가마니나 됐다. 이래서 우리 할아버지들이 1대 할아버지가 만든 물레를 이동하면서 다른 건 못 가져가도 필수적으로 그건 가져가야 하는 소중한 물건이었다.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이래서 계속 이 나에까지 이어오게 됐다.
-장작가마, 망댕이 가마 고집 그 이유는.
△국가무형문화재, 지금은 무형유산이라고 그러는데 지정 취지가 우리 선조들이 하던 전통 기법을 자손 대대까지 전승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렵더라도 우리 전통 가마의 전통 장작을 가지고 전통 발물레로 그릇을 만드는 것을 아들, 손자에게도 다 전승을 하려고 마음먹었고 지금 다 거의 해놓았다.
-전시회 계획은.
△올해 전시회는 지금 전주박물관에서 하고 있고 또 앞으로 내가 꿈을 꿔 온 세계 순회 전시도 하며 우리 전통 도예를 알릴 예정이다. 내년에는 어디서 전시를 할지 생각 중이다.
-관요에서 작업하던 할아버지 자료가 발굴됐다는데.
△그렇다. 할아버지가 관요에 차출돼 가서 달항아리를 만들고 망댕이 가마를 만든 게 구전으로만 전해졌는데 딸(감남희 백산헤리티지 대표)이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문경 김비안이 망댕이 가마를 만들었다는 기록을 찾아서 다행으로 생각한다.
-지난해 프랑스 파리 전시회를 했는데.
△일반 전시회는 보통 일주일간 한다. 프랑스 박물관에서 두 달 간 전시를 하고 돌아올 적에 항아리도 하나 기증을 했다.
-도자기를 시작하려고 하는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전통 도예를 하는 사람이 뭐 다른 걸 열심히 해라 이렇게 할 수는 없고 전통 도예를 꼭 하면 좋겠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또 나아가서는 현실에 맞는 작품으로 계승 발전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 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