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수 전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장·경북대의대 명예교수
▲ 이건수 전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장·경북대의대 명예교수

건강은 우리가 생활하는데 필수 사항이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영양소 섭취는 기본이었다. 필자들 세대에 비해서 요즘의 젊은이들의 신장은 15 cm 이상 증가하였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으며 체격은 유전과 환경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 각 종 국제 운동경기에서 체격과 체력은 대등하여 축구경기에서 0:10이란 기록은 먼 과거의 일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과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해방을 맞이하면서 빼앗긴 산하를 되찾았지만, 곧 이어 발생한 6.25 남침으로 인한 혼란 속에 국민들의 생활은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로 앞날이 불확실한 나날을 헤맸다. 이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부모님들 상황은 몹시 열악하였다. 자식들은 많아 부모님들은 하고 싶은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마음 아픈 말이 ‘너는 방천 다리 밑에서 주워 와서 키우고 있다’였다. 전후에 사망자나 부상자도 많았지만 이산가족도 많아 부모가 없이 혼자 떠도는 아이들이 다리 밑에서 추위를 피하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이다. 그 말을 들을 때 마다 눈물을 많이 흘렸다. 혼란이 지속되다가 1961년 군사혁명 후 뼈를 깎는 노력으로 산업혁명을 이루며 서서히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어린 나이에도 생활이 조금씩 좋아지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사탕을 먹다가 땅바닥에 흘리면 얼른 주어 대충 사탕에 뭍은 흙을 털어 내고 다시 그 단맛을 느꼈던 기억이 생생하다. 리어카에 실어 다니면서 팔았던 주된 단백질 식품인 번데기, 멍게, 다슬기 등은 고급 간식에 속하였는데 성장(?)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 것을 사 먹을 수 있었던 돈은 어디서 생긴 것인지 기억이 없지만, 물론 어머님이 용돈으로 주셨겠지만, 학교 다녀와서 친구들과 골목에서 야구, 술래잡기 등 하다 보면 허기를 채우기엔 좋은 간식거리로, 요즈음도 식전에 나오는 번데기를 먹을 때마다 그 당시가 생각이 난다. 이렇게 궁핍을 벗어나 부모님은 집도 마련하고 가구도 장만하여 안정된 삶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각 가정마다 상수도가 보급되지 않아 수도가 있는 집에서 여러 가정이 수돗물을 길어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그 집을 ‘수도 집’이라고 이름 지었으며 그 수도 집에는 우리 집과 연배가 비슷한 자녀들이 있었다. 그 중에 한 명은 나와 동갑이었지만 국민학교는 달라 늘 방과 후에 만나 밤늦게까지 놀았다. 봄이 오면 늘 앞산(비슬산의 끝자락)꼭대기까지 올라가 참꽃(진달래) 잎이 좋다고 먹기도 하였다. 여름 태풍 후에 방천이 홍수가 나면 겁도 없이 팬티 하나 걸치고 풍덩 뛰어 들었다. 그 수영 실력으로 아직까지 수영장, 강 그리고 바다에 아무 거리낌 없이 더위를 즐기고 있다.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드넓은 수성 들판에 메뚜기를 잡으러 매주 일요일엔 갔었다. 그래서 또 단백질 섭취를 하였다. 겨울엔 물론 가까웠던 범어못, 수성못, 조금 멀었던 동촌 강에 앉은뱅이 썰매를 형들과 만들어 탔었고 중학교부터는 스케이트도 탈 줄 알았다. 그래서 체격은 크지 않았지만 남보다 운동신경이 발달하여 국민학교 운동회 시절엔 ‘피라미드 쌓기’ 5층 맨 꼭대기에 올라가 양손을 균형 있게 펼쳐 박수를 받는 영광도 누리곤 하였으며, 그리고 철봉, 평행봉, 달리기는 늘 남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선두를 지켰다.

어릴 때 추억을 다시 되새기게 한 중요한 대목이 갑자기 나타났는데, 대학 입학시험 때였다. 그 당시 입시제도는 희망과를 선택해서 본고사를 하루 동안 치렀는데 작문 시험이 포함되어 있었다. 매년 작문의 제목은 바뀌고 글의 내용뿐 아니라 한 글자 한 글자 네모난 400자 원고지에 띄어쓰기 등 원고 작성 시 교정부호 등 일상생활에서 꼭 필요한 사항들을 아는지 모르는지를 테스트하는 것이어서 일부러 띄어쓰기를 하지 않고 붙여 썼다가 띄어쓰기 부분에 띄어쓰기 부호를 하면 가산점이 붙는 재밌는 시험이었다. 그런데 제일 포인트는 작문의 제목이었다. 추상적인 제목이면 상상력을 동반해야 되어서 전체 공간을 채우기엔 시간이 모자랐다. 시험지를 받아보는 순간 바로 그 옛날 매년 봄이면 친구들과 즐겨 찾았던 ‘산(山)’이 제목이어서 바로 10년 전을 거슬러 추억을 더듬으며 정리하였다.

과거에 즐겨 찾던 산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꿈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겨우내 추위에 움츠렸든 그 당시에는 답답했던 겹겹이 내복을 벗고 따사로운 봄 햇살은 어린 우리들을 산으로 불러들였다. 숨 가쁨도 느끼지 못하고 무조건 앞선 친구의 발만을 보고 뒤 따르느라 정신이 없이 정상에 올라갔었지만, 17세 나이에 뒤 돌아 회상할 기회를 갖게 되는 계기가 이 엄숙한 시험장에서 잠시라도 시간을 갖게 될 줄이야! 마음 속 생각을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 중간 중간에 교정 부호도 적절히 표현하면서 작문을 마쳤는데 다 쓰고 나니 기분은 더 없이 좋았다. 평소에 수학에 비해서 국어가 약했던 필자는 아마도 작문 점수에서 약간 만회가 되어 어려운 시험에 단번에 합격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 후에도 오랫동안 일요일 새벽이면 어머님 모시고 가족과 함께 은적사와 대덕사까지 산보를 하였고, 그 후로는 케이블카로 산 정상을 들러 보곤 하였다. 최근에는 군대에 있을 때 수요일 오후가 ‘전투체력의 날’이라고 인근 야산에 사격훈련 등으로 체력을 단련했던 기억을 되 살려 동료와 앞산을 찾곤 하였다. 정상까지는 힘이 들어 약수터까지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순두부의 맛은 피로를 풀기에 딱 좋았다. 늘 앞산은 대구시민의 안식처이자, 마음의 고향이다. 오늘이 수능 시험이 있어서 그런지, 괜스레 50여 년 전 과거를 회상을 해 본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