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 연회장에서 전해 들은 임진왜란1592년(선조 25년) 4월 15일. 최문병(崔文柄, 1557-1599)은 자인향교에서 고을의 여러 선비들과 연회를 열고 있었다. 연회가 무르익어 한창 흥이 오를 무렵 앞산에서 한 떼의 남녀가 바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에 쫓기는지 통곡을 하면서 왔다. 사람을 시켜 그들을 불러들인 뒤 자초지종을 들었다.그들은 경남 양산관아의 관속이었다. 그들의 입에서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이틀 전 13일에 왜구가 침입하여 동래를 함락시키고 이어 언양과 양산을 격파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
△평창군수 부임 한달 만에 맞은 임진왜란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1592년 8월 7일 대관령을 넘어 오리라 예상했던 왜군은 삼척을 지나 정선 백복령을 넘어 평창으로 진입했다. 9일, 왜군은 전투에 앞서 사자를 보내 항복을 종용했다. 편지를 들고 온 사자는 조선인이었는데 왜군에 붙은 자였다. 권두문은 사자를 크게 꾸짖은 뒤 목을 치고 항전의 기치를 높였다. 그리고 조국산하를 침탈한 적과는 어떤 협상도 없음을 선포했다.평창군수 권두문(權斗文,1543~1617)은 여기가 죽을 자리라고 생각했다. 3월에 부임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녹둔도 전투에서 만난 이순신과 이운룡함경북도 경흥은 두만강과 동해가 만나는 국토의 끝이다. 여진족과 마주 보고 있는 국경지대여서 어느 하루인들 조용한 날이 없었다. 경흥에 녹둔도라는 섬이 있는데 지금은 모래톱이 밀려 육지가 되면서 러시아 땅으로 편입됐다. 녹둔도는 함경도에 근무하는 군사들의 직접 농사를 짓는 둔전이 있는 곳이다.이순신(李舜臣·1545~1598)은 경흥 일대를 방어하는 조산보만호와 녹도 둔전관을 겸직하고 있었다. 1587년 10월 10일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이 백성들을 데리고 녹둔도에서 추수를 할 때 여진족이 쳐
△살얼음 정국의 판도라 상자, 영남만인소 촉발하다권정침(權正忱)의 ‘서연일기’는 살얼음 정국의 판도라 상자였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임오화변(壬午禍變)’의 현장을 기록해뒀기 때문이다. 상자가 열리는 순간 정국은 피바람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 것이었다. ‘서연일기(書筵日記)’는 사도세자의 스승인 평암 권정침이 사도세자가 죽은 뒤 고향 봉화에 내려와 쓴 사도세자 강연 일지다. 왕의 학습은 경연(經筵), 세자의 학습은 서연이라고 한다.일기를 쓸 당시 그는 설서 겸 춘추관 기사관이었다. 설서는 세자시강원 소속 정 7품 관직
△임진왜란 막판에 터진 악재, 정응태무고사건1598년 10월, 임진왜란이 끝나갈 즈음에 대형악재가 터졌다. 명나라 찬획주사 정응태가 3번째 상소를 명황제에게 올려 조선을 또 위기에 빠뜨렸다. 조선이 일본과 손을 잡고 고구려 고토인 요동을 되찾으려 하는데 이를 조선에 파병나간 양호가 도와주고 있다는 내용이다. 정응태의 상소는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조선에 태풍으로 몰아쳤다. 이 상소로 정응태의 정적인 양호와 마귀, 이여매, 형개 등이 탄핵당했다. 양호는 정묘재란 때 조선 참전 명나라 군사를 총지휘하는 사령관이었고 나머지도 전쟁에
닥나무에서 종이 한 장이 나오기까지 전 과정을 잘 알고 익힌 사람을 ‘한지장’(韓紙匠)이라고 한다.닥섬유 재료만 보고도 묵은 닥인지 햇 닥인지, 어느 지방의 닥인지 닥원료의 상태를 파악해서 삶을 때, 잿물의 농도와 화력의 강도를 맞출 줄 알아야 하며, 지료의 상태를 파악해서 닥풀의 점도와 물질의 방법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하는 등 한지제조과정에서 장인의 감도(感度)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1991년, 가평 산유리 전통한지연구소 시절의 일이다. 서울에 있는 6개국의 외교관(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등) 가족들이 한지만들기 체험교
△김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운세상에 나온 지 7일 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대과에 급제해 관리로 벼슬살이를 시작한 지 한 해도 안 돼 누명을 쓰고 파직됐고 그에 더해 옥고까지 치렀다. 불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몸을 일으켜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전쟁 중에 아내가 병에 걸려 죽었고 아내의 초상을 치른 다음 날 그 역시 병에 걸려 진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 37세였다. 운명은 짧은 그의 삶에 내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지만, 그는 불운에 휘둘리지 않고 영웅적 삶을 살다 세
한지는 여느 공예와 달리 평면공예이고 가볍다.입체성과 무게가 있는 실용적인 물건에 예술적 가치를 더한 것을 공예품이라 하는데, 종이는 다른 공예품에 비해 예술성을 추구하는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공예품이라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기계로 일정하게 생산되는 공산품으로 치기에는 억울할 정도로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지녔다. 그것은 한지작업이 수작업이기 때문에 한 장 한 장 사람의 공력이 느껴지는 한지의 멋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공예품이 단일로서 완성되는 예술품인데 비해 종이는 그 자체로서 완성품이면서 동시에 그 종이에 글씨가 쓰여
△계유정란의 피바람 속에서 살아남은 허후1453년(단종1) 10월 10일, 수양대군의 칼부림이 시작됐다. 좌의정 김종서가 수양대군의 기습을 받아 죽고 영의정 황보인과 병조판서 조극관 이조판서 민신 등이 입궐하다가 궁문에서 철퇴를 맞아 죽었다.의정부 좌참찬 허후(許후, 미상~1453)는 계유정난의 피바람 속에서 살아남았다. 허후의 호는 일영(一寧) 시호는 정간(貞簡), 본관은 하양이다. 세종과 문종, 단종에 걸쳐 좌부승지 예조판서 우참찬을 지냈다. 아버지는 문경공(文敬公) 경암(敬庵) 좌의정 허조(許稠)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박경의 딸
닥종이가 좋았습니다. 함께 길을 걸었습니다.닥종이는 내 유년의 추억과 함께 언제나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윤기가 흐릅니다. 만지면 만질수록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은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부추기고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합니다. 텅 빈 한 장의 종이처럼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렇게 너그럽고 자유롭게 가없는 세상에 회향합니다.-2009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초대전 ‘닥종이와 함께 純,巡,順’ 작가노트에서- △종이 만들기에서 작품이 되기까지내가 닥종이작업을 하다가 작가가 된 사연에는 세계적인 사진가이며 내셔날지오그래픽 편집장을 역임한 故에
1984년부터 나는 기존의 발과 발틀을 벗어나서 종이 작업을 자유롭게 하기 시작했다.망창을 이용해서 우둘 종이, 오목 종이, 물방울 종이, 물결 종이, 구멍 종이 등 다양한 종이를 만들었다. 이런 행위는 아마도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발상이라고 본다.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집에 실성한 할아버지 한 분이 얹혀 지내게 됐다. 한의사인 아버지께서 침과 약으로 치료하자 안정을 찾은 할아버지는 양평 무내미(지금의 문호리)에서 종이 뜨던 통꾼(紙匠)이었다는 것이다.어느 해 큰 물난리가 나서 집과 처자식을 몽땅 잃
△자계에 비친 맑은 달 같은 선비자계제월(紫溪霽月)은 비 갠 맑은 날 자계에 비친 달이다. 자계는 청도군 이서면에 있는 청도천 지류다. 자천이라고도 한다. 비슬산과 자양산에서 흘러나온 물이 자계서원 앞에서 합류해 서원천이 되고 청도천, 유천을 거쳐 밀양으로 흘러든다. 개울물이 자계서원 앞을 흐르기 때문에 자계서원 영귀루에서 바라보는 달이라는 뜻으로도 이해한다. 청도팔경 중 7번째 경치로 꼽힌다. 월인천강(月印天江)이라고 했다. 달은 온 세상의 강을 다 비추므로 자계에 비친 달을 특별히 청도 팔경으로 꼽은 데는 다른 까닭이 있다. 자
옛날 선비들은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닥나무를 만나면 말에서 내려서 “아이고, 닥나무 선생님, 덕분에 공부 잘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라며 절을 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그만큼 종이를 만드는 원료가 되는 닥나무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사찰에서는 종이를 부처님의 법을 담는 곳간이라 하여 ‘법장(法藏)’이라고 불렀으며 법이 담긴 곳간인 종이를 함부로 다루지 않고 공경했다. 천수경에는 제일 먼저 입으로 지은 죄를 깨끗이 씻는 진언인 정구업진언으로써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를 하고 그 다음에 개법장진언으로 “옴 아라남 아라다”을
인류 문명사에서 종이의 발명은 인류의 정신문화를 발전시킨 대발명품으로, 종이문화가 발달한 민족일수록 우수한 문화민족이라 할 수 있다.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종이를 만들어 왔을까? ‘삼국사기’ 영양왕조(서기600년)에 의하면 ‘고구려 건국초기(기원전 37년)부터 시사(時事)를 기록한 유기(留記)라는 역사책 백권(百券)이 있었는데 태학박사 이문진으로 하여금 신집 오권(新集 五券)으로 개수편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한편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記)’에는 서기 600년에 고구려의 담징스님이 종이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줬다는 기록이 있다.
△‘최종병기 비격진천뢰’의 등장1592년 9월 7일 마침내 경주성을 되찾았다. 이 전투가 2차 경주성 수복전투다. 경주성을 왜군에게 내준 지 4개월 보름 만이었고 1차 경주읍성 수복전투에서 무참하게 패한 뒤 한 달 보름여 만이었다. 2차 경주성 탈환 전투는 경주판관 박의장(朴毅長·1555~1615)이 지휘했다. 경주성을 빼앗길 때 사실상 전투를 지휘했던 박의장은 죽장으로 물러 나와 와신상담했다. 관군과 의병을 통합하여 결사대, 치중대, 향병부대를 조직하고 전술훈련에 집중했다. 경주성 함락, 경주성 1차 탈환 작전 실패의 경험을 통해
△왕이 내민 ‘독배’ 사간원 사간1725년 3월, 조덕린(趙德린·1658~1737)은 소용돌이치는 정국 한가운데로 불려 나갔다. 영조가 그를 불렀다. 갑술환국이 나던 1694년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 영양 주실마을에 은거한 지 30년 만이었다. 그의 나이 68세였다.정국은 살얼음판이었다. 갑술환국 이후 정국은 그의 정계 복귀 30년 동안 롤러코스터를 탔다. 남인은 완전히 실각해 정치권 밖으로 사라진 듯이 보였고 노론과 소론간 주거니 받거니 피비린내 나는 정권 쟁탈전이 벌어졌다. 경종 때 신임사화로 소론이 집권하면서 노론 4대신이 죽었
△이방원의 삼고초려태종 이방원의 부름은 엄중하고 집요했다. 정신 차릴 틈 없이 불러댔는데 호출의 이면에 피비린내가 묻어났다.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1351 ~1413)는 그때 고향 안동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자신이 형조판서에 제수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침묵했다. ‘을’의 침묵에 ‘갑’은 조바심을 냈다. 두 번째 전갈에 이어 곧바로 세 번째 사람이 왔을 때 김자수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들겠구나, 긴 숨을 내쉬었다.김자수와 이방원은 가는 길이 달랐다. 고려의 개혁에는 뜻을 함께했으나 김자수는 고려 체제를 유지하면서 성리학적 이상
1793년 종 8품 사맹 이사룡(司猛 李士龍·1595~1640)의 제사를 담당했던 고관대작이 줄줄이 날아가거나 감봉을 당했다. 승정원의 우승지와 향실의 관원이 파직당했고 경상도관찰사가 3등급이나 감봉 조치를 받았다. 왕실의 비서실 실세와 종2품 관찰사가 종8품 하급무관의 제사를 지내는 것도 의아했지만 제사가 잘못됐다고 파직 감봉조치를 받은 것은 더더욱 믿기 어려운 일이다.사정은 이렇다. 이사룡은 명청전쟁 때 청나라를 돕기 위해 전쟁에 동원됐다가 부모의 나라인 명나라 군사를 향해 총을 쏠 수 없다며 총알이 없는 빈총을 쏘다가 청나라
△정조의 눈물1799년 성균관유생 이규진(李奎鎭·1763~1822)이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정조(正祖·1572~1800)가 대전으로 이규진을 불렀다. 왕이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유생을 대전으로 따로 불러 만나는 일은 드문 일이다. 정조는 이규진을 앞에 두고 ‘그대의 조부가 아름다운 일을 했다’며 울먹였다. 이규진의 조부는 이석문(李碩文·1713~1773년)이다. 이규진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 후 영의정 체제공이 경연에서 이규진을 마주했을 때 ‘조부의 북비(北扉)가 아직도 남아 있는 지’를 물었다. 북비는 성주 한개마
△재상에서 적객으로, 머나먼 유배지 경원하루를 꼬박 걸어 경기도 양평읍 양근리에 도착했을 때는 벚꽃이 지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이 우수수 흩날렸다. 홍문관 대제학, 호조판서로 한세상 이름을 드날릴 시기였다면 바람에 날리는 꽃잎이 곱디고운 꽃비였을 것이다. 귀양길에 오르는 적객(謫客)이 되고 보니 속절없이 지는 꽃잎이 자신의 처지와 다를 바 없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는 경기도관찰사였다. 관찰사로 좌천되기 전에는 호조판서와 홍문관 대제학, 지중추부사를 지낸 재상이었다. 피는 꽃은 피는 꽃대로, 지는 꽃은 지는 꽃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