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 3d gpu
바로가기
메뉴로 이동
본문으로 이동

[정자] 82. 안동 만휴정(晩休亭)

굴곡진 인생 끝자락에 얻은 은일의 삶…신선인들 부러우리

김동완 여행작가 등록일 2017년08월24일 18시21분  
만휴정 앞 다리는 나중에 세워졌으나 다리 때문에 정취가 더 난다.
조선의 이름난 선비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의 삶도 굴곡이 많았다. 강직했으므로 곳곳에 적이 널렸고 청렴했으므로 일신의 영달을 누리는 이들을 불편하게 했다. 그리하여 적들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그들은 끊임없이 그의 명줄을 노리며 소를 올리고 탄핵했다. 파직을 당하고 곤장을 맞았으며 복직됐다가 다시 투옥되기를 반복했다.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1431~1517)의 자취를 찾아 만휴정으로 간다. 만휴정은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산 중턱에 있다. 묵계서원(黙溪書院)에서 도로를 건너 마을을 끼고 소로를 들어가면 평범한 계곡이 나오는데 묵계다. 이름 그대로 조용한 계곡이다. 소나무와 암반 계곡이 절경인 이곳은 본래 송암동(松巖洞) 계곡이었는데 김계행이 만년에 정자를 지으면서 묵계로 불렀다. 계곡 입구에 만휴정 원림 안내 간판이 나오고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산을 오르면 얼마지 않아 소나무 숲 사이로 한 폭의 진경산수화가 펼쳐진다. 멀리서 보는 만휴정 풍경이다. 수직의 암반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고 물이 떨어지는 소(沼)에는 하얀 포말이 인다. 이태백의 시 ‘여산폭포를 바라보다’ 중 ‘삼천척 높이를 곧장 내리쏟아지니 은하수가 하늘에서 떨어진 듯하구나’라는 시구가 떠오른다. 송암폭포다. 폭포 위 소나무 가지에 자려 반쯤 자태를 드러낸 정자가 만휴정이다.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가히 선경이라 할 만하다. 명승 제82호의 위엄이다.

▲ 만휴정 앞을 흐르는 묵계. 정자 위쪽에서 급하게 흐르다 정자 앞에서는 소리 없이 고요히 흐른다.
만휴정은 너른 암반 계곡 건너편 산자락에 있다. 옛 어른들은 산과 산 사이 암반을 흐르는 계곡을 ‘도포 자락을 펼쳐놓은 듯 흰 바위를 타고 흐르는 계곡’이라고 말했다. 계곡은 만휴정 앞에서 곡예를 보여준다. 정자 바로 위쪽에는 거대한 책을 어긋나게 쌓아둔 것 같은 바위가 작은 폭포를 이루고 있다. 폭포에서 떨어진 물은 경사면을 빠르게 흐르다 정자 앞에서는 평지를 만들며 천천히 지난다. 정자 오른쪽은 다시 송암폭포다. 폭포는 바위 면을 미끄러지듯이 조용히 흘러내리는데 이 때문에 ‘조용한 계곡’ 묵계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만휴정 편액. 무오사화에 연루돼 갖은 고초를 겪은 김계행이 ‘늦게 얻은 휴식’이란 의미로 이름했다.
만휴정 계곡에는 암각서도 있다. 책을 쌓아둔 형상의 폭포 아래 비탈면에는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내 집에는 보물이 없으니, 보물이라면 오직 맑고 깨끗함이 있을 뿐이다’이란 각서가 새겨져 있다. 폭포 아래쪽 소의 한쪽 바위 위에는 ‘보백당만휴정천석(寶白堂晩休亭泉石) 보백당의 만휴정이 있는 샘의 돌’이라는 글자가 횡으로 새겨져 있다. 글자는 끝이 많이 깎여 거의 알아볼 수 없다. 계곡을 건너 정자로 들어가는 길은 다리다. 김계행이 다니던 시절에는 다리 위 얕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건너갔다는데 다리는 뒤에 세워졌다. 시멘트 다리가 어색하지만 정취가 나쁘지만도 않다. 아름다운 경치 덕에 시인 묵객이 찾아들었고 뒤에 세상에 온 사람들이 묵계문회를 만들어 시를 짓고 즐겼다. 김계행이 죽고 200년 뒤 정자를 중수하자 김굉이 묵계문회에 참석해 당시 만휴정의 아름다운 경치를 차운해 시를 지었다.

송암폭포와 폭포위에 그림같이 들어선 만휴정.
새로 지은 우뚝한 정자 모습
몇 년이나 황폐해져 있었던가
고상한 풍모 붙잡을 수 없지만
남긴 자취 지금까지 전해지네
은하수 떨어져 골짝 트였고
푸른 바위 앞에 문이 열렸네
비록 멋진 경치 맛보긴 했으나
졸렬한 시구 제현에게 부끄럽네


만휴정은 김계행이 71세(1501년) 때 지은 정자다. 김계행은 50세에 과거에 급제해 늦은 나이에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나이 많은 급제자를 우대하는 연만으로 곧바로 6품직에 올랐다. 사헌부 감찰을 시작으로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판 대사간 대사헌까지 올랐다. 벼슬살이를 하기 전 41세에 동갑 나기 절친인 김종직과 ‘주역’ ‘근사록’을 강론하며 도의지교를 맺었고 그 후 서로 시와 편지를 주고받거나 먼 길을 찾아가며 만나는 등 우의를 다졌다.

김계행은 청백과 강직으로 일관한 삶을 살았다. 비슷한 또래의 장조카가 학조대사(學祖大師)다. 학조대사는 국사로 세조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성주에 와서 성주향교 교수로 있는 그를 찾았다. 시골 향교 교수를 하는 숙부가 짠했던 모양이다. 벼슬자리를 하나 알선해보겠다고 넌지시 운을 띄었다. 김계행은 “너로 인해서 벼슬을 얻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세상 사람을 보겠느냐”고 거절했다. 오히려 숙부를 대하는 태도를 문제 삼아 피가 나도록 매질을 했다. 성주에 도착한 뒤 숙부를 찾아오지 않고 오라고 한 것에 대한 질책이었다.

계곡 암반에 새겨진 암각서.‘우리집에 보물은 없으나 오직 보물은 청백뿐이다. 김계행의 호는 이 구절에서 나왔다.
김계행의 호는 보백당이다. 만휴정 위 계곡에 새겨진 문구 그대로 ‘내 집에 있는 보물은 오직 청백뿐이다’라는 뜻이다. 그의 자는 ‘취사(取斯)’다. 논어 ‘공야장’에서 공자가 제자 복자천을 군자답다고 칭찬하면서 “노나라에 군자가 없다면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러한 덕을 취하였겠는가 魯無君子者, 斯焉取斯”라는 구절에서 땄다. 호와 달리 자는 부모나 스승, 인망 있는 윗사람이 지어주는 것인 만큼 김계행의 인품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김계행이 고향으로 돌아와 정자를 지은 때는 정국이 복잡하고 불안하게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대사간으로 지내던 김계행은 68세가 되던 해 고향 길안면 묵계로 돌아왔다. 작은 집을 짓고 보백당 이름했다. 여생을 후학이나 가르치며 한가하게 보낼 작정이었다. 세상은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김종직과 동갑나기 절친이었던 그는 무오사화에 연루돼 성희증 조호문 등 10명과 함께 태장을 맞고 석방됐다. 김종직은 부관참시당하고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은 처형당했다. 많은 사람이 죽고 유배를 갔다.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 현판
다음 해 그는 다시 대사간에 임명된다.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과 노사신 등이 그를 또 흔들어댔다. 김계행은 사간원에 재직하면서 신수근 등 외척과 내시의 비리를 직소했는데 척신들에게 박힌 미운털이 그를 괴롭혔다. 이번에 국청까지 열렸으나 그는 홀로 방면됐다. 동배들이 모두 일망타진된 상황에서 홀로 그물망을 빠져나오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그해 8월에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됐다가 이조참의 대사헌에 제수됐다. 구속과 잦은 이직으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다음 해 70세에 연산군이 다시 지난 사건을 들추어 그를 구금했다. 5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만휴정은 이런 곡절 끝에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이름이다. 외할아버지 남상치가 지은 쌍청헌 자리다. 50세의 늦은 나이로 관직에 첫발을 디뎠고 수차례 사직 소를 올리고 잦은 이직과 체포 구속 끝에 얻어낸 은일의 삶이다. 이름 그대로 ‘늦게 얻은 휴식’이다. 그는 집이 있는 보백당과 만휴정을 오가며 간난신고 끝에 얻은 평화를 마음껏 즐겼다. 다섯째 아들 극신이 무과에 급제하는 기쁨을 맛보았고 외손 박거린과 박형린이 대과에 급제했을 때는 사위 박눌까지 와서 잔치를 벌였다. 김계행은 1517년 (중종12) 보백당에서 8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졌다. 정면을 누마루 형식으로 개방해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고, 양쪽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정자 안에는 김양근의 만휴정중수기와 김양근, 김굉, 이돈우 유도원 김도행 정박등의 시가 걸려있다. 김계행의 트레이트 마크가 된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과 ‘지신근신 대인충후(持身謹身 待人忠厚) 자기 몸가짐은 삼가고 신중히 하며 남을 대할 때는 진실되고 후덕하게 대하라’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 글 사진 / 김동완 여행작가
층층이 급한 물 쏟아져 내리니
물 돌아가는 곳에 저절로 물가마가 생겼구나
십장 높이에 옥처럼 푸른 빛 떠오르니
그 속에 신의 손길이 담긴 물건이로다
폭포와 연못은 가끔씩 널려 있고
너럭바위는 넓게 펼쳐져 있구나
희디 흰 것이 갈아낸 돌과 같으니
가히 백 사람쯤은 앉을 수 있겠도다
앞을 보니 세 개 물가마가 어울려 있어
시흥이 날개 짓으로 솟구쳐 오르네
지천으로 피어난 꽃들은 웃음을 다투고
마치 산 전체가 물속에 든 형국이로다

- 김양근의 시

<ⓒ 경북일보 & kyongbuk.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