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의 왁자함이 사라진 뒤 적막강산이다. 사람들은 떠났고 사람 소리도 사라졌다. 남은 음식 냄새를 쫓는 흐릿한 파리 소리뿐인 절간 같은 집에 사시랑이 육신을 뉜다. 모두가 일상으로 되돌아올 것을 전제하고 떠나온 여행이 아니던가. 올 추석에도 우리 집 십일 남매 대가족은 명절이라는 이름으로 몰려왔다가 정수리에 불었다 사라지는 바람처럼 흩어져 갔다. 덩달아 한순간 달아올랐던 내 안의 열기와 잰걸음도 멈추었다. 그 가족들과 음식을 만들어 나누었다. ‘잘 먹고 갑니다.’ 아무도 들을 수 없지만 또렷이 내 가슴으로만 듣는 말. 내 삶의 기술
청명(淸明)한 가을볕이 천지 가득하다. 바람결도 깊다. 정갈한 듯 반짝이는 그 볕에 단절음의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시작도 끝도 어찌할 수 없음을 기다림이라 했던가. 저릿하게 스며드는 간절함, 막힌 듯 들숨 같은 막막함, 끊어진 실 같은 무력감으로 가을을 기다렸다. 마침내 맹렬한 더위가 훑고 지나간 뒤 푹푹 젖은 숨소리와 생각, 끓어오르는 감정도 식고 있다. 나를 겸허한 온도로 바꾸고 애상을 넘어 존재의 실상을 관찰하기에 좋은 계절이다.이렇듯 볕이 고운 날엔 바람 따라 걷는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걷는 여유와 설렘은 걷기의 묘미라
달포 전, 이른 아침 지인의 전화를 받았다. 한동안 소식이 뜸해 궁금하던 차 걸려 온 전화는 감주 부탁이었다. 잠을 설친 목소리 같았지만 밝았다. 그런 그녀의 들뜬 목소리에 묻어 그만 대답부터 해 버리고 말았다. 평소 우리 집 깊은 단맛의 감주를 좋아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 많은 감주를 어디에 쓰려는지.’ 전화를 끊고 나니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 궁금증은 며칠 뒤 날아온 한 장의 청첩장이 풀어 주었다. 그녀의 애물단지 장녀가 결혼한다고 적혀 있었고, 야외결혼을 하는데 감주만큼은 외식업체의 것을 쓰고 싶지 않아 청한다는 정중한
화면 속, 쇠똥구리 암수가 똥 경단을 만들고 있다. 때마침 나무 위의 쓰르라미가 그 단조로운 노동에 게으른 응원가로 추임새를 넣고 있다. 수없이 덧붙여 굴리고 굴려 다져 만든 경단이 옹골지다. 운명처럼 터득한 굴림인가. 굴림이라는 저들의 생존 방식이 놀랍고 경탄스럽다. 마침내 앞다리로 땅을 짚고 뒷다리로 거대한 똥 경단을 함께 밀며 점점이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문득 저 능력자들의 암수가 나눠 가질 똥 경단의 지분이 궁금해진다.경단의 지분을 생각하며 건널목을 건너다 잽싸게 낚아채는 손에 이끌려 되돌아 나왔다. 막무가내로 끌려 나와보
아득한 슬픔이었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요양원을 향해 돌아서던 어머니 때문이었을까. 그 저릿한 영혼의 눈빛 언어에 우리는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나무 밑에 주저앉았다. 모두가 현실에서 비현실의 세계로 떠밀려간 느낌으로 이지러져 말이 없었다. 엉거주춤 앉은 둘째 오빠는 메이는 목을 헛기침으로, 여동생은 흐르는 눈물을 가두려 나무 위를 쳐다보며 안타깝고 애달픈 마음들을 담담히 다독였다.“어무이 집에 있는 요강은 내가 가져간다.” 여름꽃이 자욱하게 핀 나무 밑의 침울한 분위기를 깬 것은 둘째 오빠였다. 생뚱맞게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하모니카 소리에 가던 길을 멈춘다. 내일이면 집을 비워주고 떠난다는 담장 높은 집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만개한 붉은 줄 장미를 타고 넘어온 소리는 고독과 절망을 내뱉듯 처연하다. 남자의 저 소리는 더 높이, 더 빨리 가려다 추락한 자의 곁에 아무도 없으니, 두렵다는 소리다. 질주의 시간, 직선의 시간으로만 살다 다친 사람만이 아는 제 몸 깎는 흐느낌이다.지독한 흙수저로 태어난 남자는 솔개를 닮고 싶었다. 그리하여 세상 높이 비상하리라 했다. 푸른 하늘 위로 솟구쳐 두 날개 활짝 펴고 비행하는 그 경이로운 몸짓과 창공에서 커다랗게 원
알싸하니 매운 여름꽃이 경쟁하듯, 배려하듯 천차만별의 균형 값으로 만개했다. 어디에도 대충 핀 꽃은 없다. 똑같은 꽃도, 아프지 않고 핀 꽃은 없다. 해를 사모하며 저마다의 무게와 느낌으로 대견하게 피었으니 함부로 해서도, 모두 다르게 피었으니 특별하고 귀하다.하루가 가랑가랑 넘어갈 시간 버스를 탔다. 창밖은 서향 빛에 투사된 잎사귀들이 수천 개의 빛깔로 나부끼다, 느릿한 그림자로 널브러져 있다. 실바람에도 이파리들은 팔랑거리며 빛 그물을 만들고, 다글다글 지는 볕은 뜨거웠다. 무엇인가를 눈에 넣는다는 게 피곤한 시각. 버스는 만석
달그락달그락, 밤새 게딱지가 바람에 흔들렸다. 서녘 처마에 등 맞대고 매달린 빈 게딱지의 흔들림이 심상치 않았다. 할머니는 오랜 연륜으로 게딱지 소리에서 바람을 읽어낸 뒤 말했다. “태풍 온다. 비설거지 해라.”내 유년의 할머니는 집안에 들어오는 악귀를 쫓아낸다며 일 년에 두 번, 서녘 처마 밑에 방사(放赦) 목적으로 빈 게딱지를 매달았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의 몸짓을 읽어내는 훌륭한 바람 자루였다. 게딱지를 흔드는 바람에서 비 소식을 듣기도, 바람이 가는 길과 세기로 날씨를 점쳐 일상을 대비했던 조상들의 지혜였다.올 이른 봄, 마
여름이 완강하다. 한증막에 갇힌 하루가 참으로 길다. 오만한 태양은 거침없이 본색을 드러내 살아있는 것들의 머리를 조아리게 만든다. 기세등등한 더위와 면벽하듯 맞서보지만, 열대야에 잠조차 말라 버렸다. 어디로 보나 꽉 찬 푸름과 이글거리는 햇빛, 사나운 열기로 마치 고통과 절망이 가득한 중환자실 같다. 데친 시래기처럼 시들시들하니 생탈이 날 것도 같다. 일상의 긴장과 이완을 벗어나 마음을 내려놓을 쉼과 여유가 없다. 무감각한 신경은 나른해진 육체를 더욱 널브러지게 하고 생기마저 앗아간다. 착하고 반듯하게 살려는 멋진 마음의 여유를
초저녁, 길을 나섰다. 자꾸 길을 잃고 헤매는 문장을 따라다니다 지쳐 나선 걸음이었다. 어둠살이 조용히 식혀내고 있는 들녘은 생것들의 풋내로 그득했다. 한소끔 순해져 너그러운 저녁 빛으로 물들고 있는 봇둑을 걸었다. 곧이어 자분자분 바닥을 다독인 무논 위에 하얀 달빛 싸라기 쏟아져 내리고, 바람과 노는 볏 잎들이 쉼 없이 소곤대며 반짝였다. 사부작사부작 산책하며 힐링하던 발걸음을 멈춰 세운 건 놓친 잠 풀숲에 숨겨두고 나온 개구리 울음소리였다. 그 소리는 내 안 어디쯤 숨어 있던 그리움 한 자락 길어냈다. 어느 먼 시간에 담긴 눈부
눈총을 받아 시나브로 닳은 기타가 있다. 대가족의 좁은 거실 한편에 가부좌 틀고 앉아 여기가 영원한 안식처려니 눌러앉은 남편의 기타다. 대학 때부터 끼고 다녔다는 그 골동품 기타에 가족들은 행여 부딪힐세라, 구르는 돌처럼 아슬아슬하게 비켜 다니며 뾰족해져 눈 화살을 쏘아댄다. 그러나 냉큼 치우지 못하는 건 가끔 제 자릿값을 톡톡히 하기 때문이다. 이따금 남편은 가족들의 밉상이 된 그 기타를 무릎에 연인 앉히듯 하고 자분자분 다독이며 조율한다. 헐거워진 여섯 개의 줄을 세심하게 풀고 조이기를 거듭하며 올바른 제소리를 내기 위해 갖은
지척에 두고, 찾는데 시오리쯤 헤맸던 것 같다. 추적추적 제법 굵은 봄비가 살라 먹은 어둠 탓일까. 작은 네온사인 간판은 까무룩 하니 졸 듯 가물가물했다. 허위허위 여러 번 지나치고 있는 어리바리한 방문객을 붙잡아 세우지 못했다. 낮은 곳에 있어서 눈에 잘 띄지도, 작고 낡아서 뭇시선 사로잡지 못해도 발길 이어지는 집. 여기, 이윤 없이 실제로 든 비용만으로 가격을 책정한다는 들무새 마음 겨운 실빗집이 있다.아늑한 고립이 찻물처럼 고이는 날엔 연하 실비로 가보라. 혹여 짙은 허기와 고독으로 깊은 어둠 속에 침잠해 있는가. 현실에 마
봄이 강물을 타고 흐르며 마구마구 피워올린 꽃들에 설렜다. 그러나 잠깐 사이, 하얀 속살 내비치던 목련이 제빛을 잃었다. 기암절벽 틈새 피었던 보랏빛 동강할미꽃도 졌다. 그러다 노란 부리를 오므리던 개나리 진 자리에 솟아난 앙증맞은 새순과 눈을 맞췄다. 다시 연분홍 불을 지피던 진달래가 지고 겹벚꽃과 철쭉꽃이 아직 봄의 향연은 끝나지 않았다는 듯 불타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죽음을 서러워하듯 툭툭 떨어지며 토해내는 동백꽃 지는 소리에 봄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아픔에 슬펐다. 봄의 마지막 책갈피를 넘긴다.누구나 살다 보면 유난히
어떤 사물은 기억으로 각인된다. 그러다 어느 해거름 녘, 꽃이 때리듯 문득 찾아온다. 그 기억 속에는 더 먼 옛날의 내가 있어 반갑다. “나를 기억하시는지요.” 조금은 깊고 어두운, 그러면서도 매력적인 사내의 전화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하고 무춤거렸다. 거뭇하게 어둠이 내리는 시장은 소란스럽고 무리 지어 둥지를 찾아가는 새 떼처럼 제 갈 길 찾아 서두르고 있었다. 나 역시 떨이하는 시금치 두 단과 떡집 좌판대에 남은 인절미 한 팩을 집어 들며 서두르던 때였다. 순간, 들고 있던 시장바구니에서 봄이면 잘 살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한 사
봄의 초록이 설레게 해 길을 나섰다. 고요한 사색을 꿈꾸며 봄이 비치는 물길 따라 자박자박 걷는다. 걷는 발걸음 따라 바람이 느리게 쫓아온다. 봄을 거니는 물소리가 귀를 간질이며 마음을 틔운다. 살랑거리며 따라오는 봄빛에 앳된 초록이 곳곳에 피어오른다. 목마름을 견디며 싹을 틔워 올린 풀들이 나직한 숨결로 기지개를 켜고 있다. 차진 봄볕이 양기를 보태니 풀과 나무에도 토실토실 젖살이 올랐다. 생명의 숨결이 온존하다. 들꽃이 드레드레 핀 길로 향한다. 꽃의 재잘거림이 유난하다. 다양한 꽃과 연둣빛 조화로 단아하다. 가랑비에 물기 머금
할머니와 손녀가 거울 앞에서 실랑이다. 손녀의 차르르 윤기 나는 머리를 예쁘게 묶고 싶은 할머니와 미덥지 못한 손녀의 눈빛이 거울에 얼비친다. 침침한 눈과 무딘 손끝이 자꾸 머리끈을 놓치자, 할머니는 진땀 흘리신다. 좀 전까지 발그레하니 생글거리던 손녀의 얼굴도 차츰 일그러진다. 거듭된 시도에 복원력이 떨어진 끈은 이미 늘어질 대로 늘어져 있다. 곤혹한 할머니는 울상인 손녀를 바나나 우유로 달래며 다시 끈을 바투 잡는다.올봄엔 대전 안사돈이 오지 않았다. 매년 이맘때면 경주 벚꽃을 핑계로 다녀가셨다. 봄의 전령 같은 낭랑한 목소리로
지난해, 친절한 이웃 덕에 당근마켓에 입문했다. 중고 거래나 나눔, 재능기부와 취미생활까지 동네를 기반으로 한 일종의 커뮤니티 앱인 그곳은, 사람과 사람들의 마음이 들고나는 인연의 바다였다. 쓸모라는 이름표에 가격과 설명을 붙이고 거래하거나 나누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붓하게 감각하고 감응하는 곳이었다.나이 들면서 익숙했던 좌식 생활에 변화가 필요해 보였다. 일어나고 앉을 때마다 약해진 허리며 닳은 무릎이 먼저 비명을 질러 댔다. 이제는 결심의 영역이었다. 매끼 마다 대가족을 불러 앉히던 원목의 긴 좌식 식탁과 짧은 휴식을 책임지던
눈을 기다리는 마음이었을까. 시작의 선율은 이른 아침 햇살 머금은 숫눈 위에 사뿐히 섰을 때의 느낌으로 왔다. 그 해사한 설경으로 자늑자늑 스며들었다. 그러나 오케스트라의 선율은 혼자 외로이 오지 않았다. 고요와 열정 그리고 설렘, 낭만과 손잡고 왔다. 먼 하늘에서 바다로 향해 하얀 눈송이 내리듯 찬찬히 녹아들어 한 사람의 순간을 지배했다. 나는 그 순간에 스며들려 매화향 맡듯 눈과 귀, 마음을 열고 끝없는 심연에 집중하였다.때론 뭔가를 읽거나 보고 들을 때 울컥할 때가 있다. 그 뭔가가 마음을 건드리는 탓이다. 위로가 돼서, 현장
사내가 멀리 떠났다. 목성을 가장 밝게 볼 수 있다는 날이었다. 절망과 희망의 팽팽한 줄다리기에 지쳤을까. 홀로 순탄한 삶을 망치고 행복한 삶을 어그러뜨린 죄책감에 더는 버틸 힘을 잃었을까. 수없이 아득한 가능과 희망에 머뭇거리다 꺾여버린 생이었다. 침묵의 뒤편에서 흐르지 않고 고였던 외로움이 마침내 동파(凍破)된 죽음이었다.사내는 행복보다 불행의 총량이 더 많았을까. 거듭된 사업 실패 후 열쇠 구멍도 보이지 않는 희망이라는 문 앞에서 왜 그토록 서성였을까. 혼자라도 외롭지 않고 가진 건 없어도 비난받지 않는 한 송이 들꽃처럼, 피
가을볕에 잘 여문 통무가 쩌억 쩍 갈라져 깍둑깍둑 썰린다. 걸핏하면 눈물만 찔끔대게 하던 예전의 그 칼날이 아니다. 시퍼렇게 날 세워 파고드는 날카로움이다. 기다리던 나무 도마가 칼날의 노고를 위무하듯 지긋이 받아 품는다. 하얀 속살을 비집고 흐르는 온순한 눈물만 통증을 대변할 뿐 한갓진 순응 모드다. 가슴께가 뻐근해진다. 이 순간, 잘 벼른 저 무쇠 칼 앞에 도저한 저항이란 있을 수 없다. 무자비한 절삭만 있을 뿐이다.눈이 되지 못한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 칼 벼르기 참 좋은 날이다. 이런 날, 출장이 잦은 칼갈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