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략)밤이 가면 지평은 밝아오고가문 땅은 빨리 물을 빨아들인다.왜 사느냐 그것은 따질 문제가 아니다.사는 그것에 열중하여오늘을 성의껏 사는 그 황홀한 맹목성.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것은 자연의 섭리.적설 밑에서도 풀뿌리는 살아남고남쪽에서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온다.마른 대궁이는 금년의 화초(花草)땅속에서는 내년의 뿌리[감상] 여섯 살 때 소아마비에 걸린 이후 70년 넘게 철제 산소통 안에서 살면서도 변호사, 작가, 인플루언서로 활동하면서 많은 이에게 희망을 줬던 미국인 ‘폴 알렉산더’가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는 “손이
꽃을 내려놓고죽을힘 다해 피워놓고꽃들을 발치에 내려놓고봄나무들은 짐짓 연초록이다.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 없다는맑은 노래가 있지만꽃 지고 나면 봄나무들제 이름까지 내려놓는다.산수유 진달래 철쭉 라일락 산벚꽃 내려놓은 나무들은신록일 따름 푸른 숲일 따름꽃이 피면 같이 웃어도꽃이 지면 같이 울지 못한다.꽃이 지면 우리는 너를 잊는 것이다.꽃 떨군 봄나무들이저마다 다시 꽃이라는 사실을저마다 더 큰 꽃으로 피어나는 사태를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꽃은 지지 않는다.나무는 꽃을 떨어뜨리고더 큰 꽃을 피워낸다.나무는 꽃이다.나무는 온몸으로
당신에게 엽서를 띄우기 위해 나는 멀리 떠나네 여행지에서 우리는 아름답고기묘한 엽서를 사 오곤 했는데 돌이켜보니 서로에게 엽서를 쓴 적은 없었네엽서에 나는 뒤늦은 사랑을 쓰면서 동시에 엽서에 대해 쓰네 오, 정말, 엽서에상처를 내는 펜촉, 상처를 내지 않고는 이 엽서를 다시 살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아네 우리 안의 어딘가가 이미 죽어 있었다면 우리는 더 적절히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었을까 서로에게 덜 기대하고 서로를 덜 파괴하면서 말이야 그러나 상처를 내지 않고는 사랑을 쓸 수 없네 부서져 새로 태어나지 않고는 말이야 슬프
혼자 밥 먹는 사람은 외로워서 강해 보인다기억의 부력은 놀라워서 언제든 기어이 떠오른다너무 오랜 낮잠으로 불어터진 얼굴을 짓이기며스쿠터가 슬리퍼를 끌 듯 지나간 게 전부인 오후다세계가 고요하면 긴장해야 한다목련의 실핏줄이 아프게 터지는 계절인데꽃말처럼 흩어지는 신파를 거두며찻물이 끓는 동안 입술이 식혀야 할 이름이 있다혼자 노래하는 사람은 쓸쓸해서 강해 보인다[감상] 한 일간지에 따르면, 한국에서 1인 가구가 가장 많은 지역은 서울특별시 관악구라고 한다. 지난해 우리나라 2170만 가구 중 1인 가구는 750만 가구로 34%를 넘었
양말이 두리번두리번자기 짝을 찾는다혼자서는 아무 데도 쓸모없으니구멍이 날 때까지 함께 가자고 한다자기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그런 건 다 까먹고오른발 왼발 상관없다고왼쪽 오른쪽 따질 일이 없다고서로가 서로를동그랗게 껴안는다[감상] 기원전 5000년, 동물의 가죽을 발목에 연결하거나 묶어 신발처럼 신던 것이 양말의 시작이라고 한다. 한자어 양말(洋襪)은 ‘서양식 버선’을 가리킨다. 양(洋)은 ‘서양식’, ‘서양의’라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옛날부터 버선을 신었는데, 이것을 ‘말(襪)’이라고 한다. 양말은 발을 보호하고 따뜻하게 유지하는 기
하늘에는 맑은 성좌땅에는 널브러진 피고름 역사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멀다엉금엉금 기어가는당신과 나의 바라밀다 까마득히하늘에는 꽃이 피고땅에는 꽃이 지고[감상] 기상학적으로 봄은 일 평균 기온이 5도 이상 9일간 유지될 때 그 첫날부터를 가리킨다. 내게 봄은 그해 목련을 처음 목격한 날부터다. 매화도 산수유도 개나리도 진달래도 아닌 목련이 꽃망울을 터뜨려야 내겐 봄인 것이다. 해마다 목련을 보며 시상(詩想)을 가다듬는다. 그래서 내게 목련은 숫돌이다. 목련 숫돌! 저 순백의 숫돌에 겨우내 무디어진 상상력과 은유의 칼을 간다. 이선 시
이번에 저 (이바라기 노리코)는(2006)년 (2)월 (17)일 (지주막하출혈)로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습니다.이것은 생전에 써둔 것입니다.내 의지로 장례, 영결식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앞으로 이 집에는 제가 살지 않으니조위품이나 꽃 같은 것들을 보내지 말아주세요.반송 못하는 무례를 더하게 됩니다.“그 사람이 떠났구나”하고 한순간, 단지 한순간생각해 주셨으면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오랫동안 당신께서 베풀어주신 따뜻한 교제는보이지 않는 보석처럼, 내 가슴속을 채워서 빛을 발하고내 인생을 얼마만큼 풍부하게 해 주셨는지….깊은 감사와 함
날계란 한 판 속에는 한판의 침묵을 삼킨 부리들, 적막한 부리들이 물고 있는개나리 그늘 수십 평, 그늘 밑에서 심장을 데우는 씨앗의 안간힘, 안간힘으로알을 깨고 나온 김이 오르는 머리통, 보드랍고 촉촉한 머리통 아래에 잡힌 눈주름, 눈주름을 밀면 산초열매같이 반짝이는 까만 눈동자, 아직 어둠을 알아보지 못하는 순진무구한 눈망울 따라가면 말랑말랑하게 뜸이 들고 있는 구수한흙, 잘 익은 흙을 헤집고 싶은 발톱의 근질거림, 뻗대는 잔발들을 달래고 있는알곡의 조바심, 모락모락, 조잘조잘, 비릿비릿한, 갓 태어난 무른 것들을 모르는 척, 침
3월은 두 살 된 아기자빠질 듯 엎어질 듯뒤뚱뒤뚱 오고요4월은 네 살 된 여자 아이사뿐사뿐 생긋생긋웃으며 오지요봄도 봄도 요 때가제일 귀엽고 사랑스럽답니다[감상] 쉽고 단순하고 명료하고 재미있고 즐거워서 저절로 읽힌다. “봄도 봄도 요 때가/ 제일 귀엽고 사랑스럽답니다”는 머릿속에 멜로디가 그려질 정도다. 나도 모르게 몇 번이나 흥얼거리게 된다. 노래로 만들어 봄날, 벚나무 아래서 아이들과 귀엽게, 사랑스럽게 부르고 싶다. 3월은 “자빠질 듯 엎어질 듯/ 뒤뚱뒤뚱 오고요”와 4월은 “사뿐사뿐 생긋생긋/ 웃으며 오지요”를 읽다가 딸의
봄을 빨리 맞으라고2월은숫자 몇 개를 슬쩍 뺐다.봄꽃이더 많이 피라고3월은숫자를 꽉 채웠다.[감상] 올해 첫 동시가 있는 수요일이다. 많은 선생님이 동시가 있는 수요일을 보내달라고 해서 공유 중이다.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에게 시 읽어주는 날을 운영해 보면 어떨까. 매주 특정한 요일에 선생님이 시를 낭송해 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시를 좋아하게 된다. 시를 기다리게 된다. 시는 힘이 세다. 낭송과 암송, 시놀이까지 나아간다면 금상첨화다. 관심이 있는 선생님은 네이버 카페 ‘시와 노는 교실’을 찾으면 된다. 작년에 반 아이들과 서른
(중략)좋지 않은 일들이 한꺼번에 오고좋지 않은 자들이 봄을 밟고 와도눈 녹은 땅에 꽃씨를 심어요지구에서 보낸 한 생의 길에서곧고 선한 걸음으로 꽃을 피워온 그대사랑이 많아서 슬픔이 많았지요사랑이 많아서 상처도 많았지요그래도 좋은 사람에게 좋은 일이 오고어려움이 많은 마음에 좋은 날이 오고눈 녹은 땅에 씨 뿌려가는 걸음마다봄이 걸어오네요꽃이 걸어오네요[감상] 해마다 봄이 오면 꽃시장을 찾는다. 올해는 대구 불로화훼단지를 다녀왔다. 거실에 둘 덩치 큰 식물을 찾다가 역시나, 프리지어를 지나칠 수가 없었다. 프리지어의 꽃말은 ‘당신의
어차피 어차피3월은 오는구나오고야 마는구나2월을 이기고추위와 가난한 마음을 이기고넓은 마음이 돌아오는구나돌아와 우리 앞에풀잎과 꽃잎의 비단방석을 까는구나새들은 우리더러무슨 소리든 내보라 내보라고조르는구나시냇물 소리도 우리더러지껄이라 그러는구나아, 젊은 아이들은다시 한번 새 옷을 갈아입고새 가방을 들고새 배지를 달고우리 앞을 물결쳐스쳐 가겠지그러나 3월에도외로운 사람은 여전히 외롭고쓸쓸한 사람은 쓸쓸하겠지.[감상] 만물이 깨어나는 3월이다. 달력을 보니 경칩(驚蟄)이 내일이고 보름쯤 지나면 춘분(春分)이다. 오늘은 “새 옷”, “새
어쩌면 선생님도수업 시간에 졸지 모른다졸지만 우리가 모르는 건지 모른다우리 선생님은십 년도 넘게 선생님 했으니까졸면서도 눈 안 감을지 모른다졸면서도 말하고졸면서도 걸어 다니고졸면서도 우리한테 졸지 말라 그럴지 모른다우리 선생님은 진짜못하는 게 없으니까졸면서도 우리를 잘 가르칠지 모른다[감상] 2월의 마지막 날이다. 내일은 삼일절이니까 쉬고 토요일, 일요일 또 쉬면, 3월 4일 월요일부터 2024학년도 첫 등교가 시작된다. 어린이집 신입생, 유치원 신입생, 초등학교 1학년, 중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들의 입학식을 시작으로 각 학
사람책 빌려준다는사람 도서관에 가니경찰 의사 요리사 과학자 운동선수 영화감독 프로그래머 스튜어디스금박처럼빛나는 사람책 수두룩하다.천국은 도서관처럼 생겼다는데내가 대출하고 싶은 사람책은쭈그렁…….우리 할머니,천국도서관에서 대출하고 싶다.오래오래연체하고 싶다.[감상] 2024 포항시 원북 선정 협의회에 다녀왔다. 시민들이 추천한 어린이, 청소년, 일반부 양서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민의 추천을 받은 저 좋은 책들을 써낸 작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 줄 알기에. 아울러 포항시가 올해 ‘대한민국 독서 대전’
이마에 손바닥을 올리고 눈을 감는다. 아닌 것 같다. 맞을 수도 있다. 병원에는 안 갈 것이다.어떤 것 같아? 사람들이 내 이마를 만지기 시작한다. 이봐요, 뭐라고 말 좀 해봐요. 하나같이 눈을 감고 고개만 갸웃거리네.사람들이 나 때문에 눈을 감을 때. 나는 눈을 크게 뜬다. 우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그냥 평범한 감기 같아. 비로소 네가 고개를 든다. 그런 것 같애. 한숨을 크게쉬고, 나는 다음 사람에게 간다. 어떤 것 같아?나는 겁이 나지만 마스크는 쓰지 않을 것이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은 늘 혼자있었다.[감상]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워합니다철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들은 체하였더니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 그려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고 ‘너는 언제 피었니’하고 물었습니다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감상] 초등학교 5학년 때 청송으로 야영을 갔다. 장기자랑 시간에 그 아이가 ‘해당화’ 독창을 했다. ‘바닷가에서’라는 동
몸의 중심은 심장이 아니다몸이 아플 때 아픈 곳이 중심이 된다가족의 중심은 아빠가 아니다아픈 사람이 가족의 중심이 된다총구 앞에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양심과 정의와 아이들이 학살되는 곳이 순간 그곳이 세계의 중심이다아 레바논이며팔레스타인이여이라크여아프가니스탄이여홀로 화염 속에 떨고 있는 너국경과 종교와 인종을 넘어피에 젖은 그대 곁에지금 나 여기 서 있다지금 나 거기 서 있다[감상] 올해도 종전(終戰)의 희소식은 아득하다. 세계가 포화로 뒤덮여 통곡과 눈물과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있다. 특히,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비
곁을 떠난 적이 있다 당신은 나와 헤어진 자리에서 곧 사라졌고 나는 너머를생각했으므로 서로 다른 시간을 헤매고 낯익은 곳에서 다시 만났다 그 시간과공간 사이, 우리는 서로가 없어도 잔상들을 웃자라게 했으므로 근처 어디쯤에는 그날 흘리고 온 다짐 같은 것도 있었다[감상] ‘곁’은 15세기 문헌에서부터 ‘곁’으로 나타나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진 말이다. 어떤 대상의 옆을 가리키는데 공간적, 심리적으로 가까운 데를 말한다. ‘곁이 많다’는 가까이에서 보살펴 주거나 도와줄 만한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곁을 떠나다’는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헤어진 애인이 꿈에 나왔다물기 좀 짜 줘요오이지를 베로 싸서 줬더니꼭 눈덩이를 뭉치듯고들고들하게 물기를 짜서 돌려주었다꿈속에서도그런 게 미안했다[감상]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에서 “꿈은 은폐되고 왜곡된 소망이 드러나는 곳이다. 그러므로 꿈의 해석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라고 썼다. 이 시에서 화자(話者)는 오이지의 물기를 짜서 돌려주는 헤어진 애인의 꿈을 꾸고는 “꿈속에서도 그런 게 미안했다”라고 고백한다. 베에 싼 오이지 따위도 정성스럽게 “고들고들하게 물기를 짜서” 돌려주는 애인이라면, 그가 어떤 사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지은 지 삼 년밖에 안 된 집을 부득이 헐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지붕을 들어내자 꼬리에 못이 박혀 꼼짝도 할 수 없는 도마뱀 한 마리가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 동료 도마뱀이 그긴 시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이를 날라다 주었기 때문이다.[감상] 독자들을 만나면 빠지지 않고 받는 질문이 “시의 소재를 어디서 얻는가?”이다. 내 시의 팔 할은 신문이나 잡지, 책에서 얻는다. ‘좋은 생각’, ‘샘터’ 같은 월간지에서도 많이 얻는다. 나머지는 일상에서 500원짜리 동전 줍듯 가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