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저울과 닮았다. 어느 한쪽 끝에 무게가 과도하게 실리면 저울은 흔들리고 그 흔들림은 결국 양쪽 모두에게 불안으로 되돌아온다. 문제는 어떤 세력이 더 무겁냐가 아니라 왜 모두 끝단에 서서 서로를 끌어내리는 데 힘을 쓰는가이다.극단으로 치우친 무게는 언제나 균형을 잃게 만들고 그 균형 상실이 깊어질수록 반대편의 복원력도 강해진다. 저울이 기울어질 때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양쪽이 아니라 중심이다. 중심이 흔들리면 저울은 존재의 의미를 잃는다.극단의 정치도 마찬가지다. 정치적 승패는 갈릴 수 있어도 중심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승자
천년 전, 신라의 왕들은 금빛 관을 쓰고 사신을 맞았다.당의 사신이 바다를 건너오고, 왜의 사절이 동쪽 길로 들어오면 왕은 향과 음악이 어우러진 전각에서 그들을 맞이했다.왕의 머리 위에서 빛나던 금관은 단지 장식이 아니라 문명을 대하는 한 나라의 품격이었다.그 빛은 권력의 표식이 아니라 평화의 약속이었다.그로부터 천년이 지난 오늘, 그 왕경(王京) 경주가 다시 세계의 문을 연다.이달 말 경주에서 열리는 2025 APEC 정상회의는 ‘신라 금관, 권력과 위신’ 특별전과 함께 열린다.국립경주박물관이 개관 80주년을 맞아 오는 28일부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경주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방문을 앞두고, 그가 부주석 시절 이곳을 찾았던 기억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2009년 12월, 경주의 겨울은 유난히 매서웠다. 찬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했지만, 천년 고도는 따뜻한 손님맞이로 분주했다. 당시 중국 서열 6위였던 시진핑은 특급 의전 대상이 아니었지만, 차기 지도자를 두고 리커창 당시 부총리와 경쟁하던 시점이어서 한국은 그를 국가수반급으로 예우했다. 그 방문은 단순한 지방 일정이 아니었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동아시아의 오랜 역사적 인연을 다시 확
대구 망우당공원에 세워진 곽재우 장군 동상이 수년째 녹슨 채 방치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시민들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국난 극복의 상징이 된 ‘홍의장군’의 기념물이 무관심 속에서 흉물로 변해갔다는 점에서, 이번 문제는 단순한 시설 관리 부실을 넘어선다. 역사를 기리고 공동체의 자긍심을 키워야 할 상징물이 행정의 관심에서 밀려난 현실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곽재우 동상은 1972년 후손들과 곽망우당기념사업회가 주도해 설치됐다. 공원 이름 역시 장군의 호에서 유래한 만큼, 지역사회가 세운 대표
오는 10월 경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를 두고 세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갈 수도 있다”고 언급했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참석은 기정사실로 여겨진다. 여기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까지 합류한다면 경주는 단순한 국제회의 도시가 아니라 세계 평화의 수도가 된다. 문제는, 이 기대가 아직 가설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는 “경주가 평화의 무대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 있다.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즉흥적 농담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외교에서 “가능성”이라는 언어는 결코 가볍지
신라 최대 사찰 황룡사의 심장부였던 중금당 복원을 향한 첫걸음이 경주에서 시작된다. 오는 13일 열리는 학술대회는 ‘경주 황룡사 중금당 복원연구 성과와 과제’를 주제로, 건축·불상·와전·디지털 콘텐츠 등 다방면의 연구 성과를 공유하고 향후 과제를 논의한다. 584년 장륙존상과 19존상을 봉안하기 위해 세워진 이 불전은 당시 불교 건축·조각·미술의 절정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동방 최대 불교도량’으로 불렸던 황룡사 중심축의 한가운데, 국가와 종교, 문화의 위엄이 교차하던 그 건물은 지금은 터만 남았지만, 경주와 한국 불교문화사에서
‘추모는 없다’는 공지 하나가 더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고 김민기의 1주기를 맞아 공연도, 공식 조문도 없었다. 오직 복각된 첫 앨범 한 장과 그의 뜻을 전하는 짧은 안내문이 전부였다. ‘고인의 삶과 작업이 미화되지 않고 기록되길 바란다’는 유언, 그 한 문장이 그의 생애를 설명한다. 이처럼 조용한 1주기야말로 김민기라는 예술가가 살아온 방식, 그리고 우리가 지금 되새겨야 할 예술과 공동체의 본질을 다시 묻게 만든다.김민기의 삶과 철학은 단순한 한 명의 예술가의 궤적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창작을 상품화하지 않았고, 무대를 시장
바다는 연결된다, 그러나 전략은 쪼개져 있다.북극항로 앞에 선 경북과 포항, 이제는 국가가 응답할 차례다.북극의 얼음이 녹고 있다. 기후위기가 해양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동북아에서 유럽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바닷길, 북극항로가 열리고 있다.문제는, 그 바닷길 앞에 대한민국의 전략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지금 북극항로를 둘러싼 경쟁은 단순한 해운의 문제가 아니다.기후와 외교, 안보와 에너지, 데이터와 과학기술이 얽힌 복합적인 미래항로다.일본은 정부가 주도하는 북극전략본부를 구성했고, 중국은 이미 ‘빙상 실크로드’를 외교 용어로 고착
2시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인도 자르칸드 지역의 화물열차는 지난달, 선로 옆에서 출산 중인 코끼리를 위해 그 긴 시간 동안 운행을 멈췄다.임신한 암컷 코끼리가 진통을 겪고 있다는 산림 경비원의 신고에, 철도 당국은 즉시 조치에 나섰다.위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조명을 비추고, 열차의 접근을 차단한 가운데, 코끼리는 무사히 새끼를 낳았다.이 장면은 카메라에 포착되어 SNS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고, 많은 이들은 감동을 받았다.하지만 이 장면이 단순한 ‘따뜻한 뉴스’에 그쳐선 안 된다.지금 이 순간에도 개발과 생존의 경계에서,
팔순 노모에게 월세를 받아야 한다는 법 앞에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법을 만들고 지키고 있는가를 자문하게 된다. 최근 한성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 과정에서 드러난 이른바 ‘편법 증여’ 논란은 단지 한 후보자의 해명을 넘어, 상속세 및 증여세법의 현주소와 그 허점을 드러낸 계기다. 자식이 이사한 뒤 남은 집에 모친이 무상으로 거주한 것을 두고 ‘증여’라 하며 세금을 물리는 이 법 앞에, 상식은 자리를 잃었다.문제의 핵심은 명확하다. 법은 원칙을 세우기 위해 존재하지만, 현실을 외면한 원칙은 삶을 옥죈다. 이번
시간은 전쟁의 참혹함을 잊게 하지만, 피로 맺어진 연대는 사라지지 않는다. 지난 6월 22일, 포항 양포교회 잔디마당에서 열린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초청행사는 전우애가 국경을 넘어 세대를 관통하는 힘임을 웅변했다. 100세 노병의 마지막 소원이 이끈 이 만남은 단지 과거의 재현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직면한 역사 인식의 공백과 국제 관계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었다.한국은 지금, 그들의 기억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기억을 얼마나 성실히 계승하고 있는가. 1950년 6·25 전쟁 당시,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해 질 무렵, 파도가 숨을 고르는 바닷가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번진다. 포항 북구 칠포해변이 들썩인 건 단지 초여름의 바람 탓만은 아니다. 제19회 칠포재즈페스티벌이 6월 14일부터 이틀간 열렸고, 그곳에선 음악이 바다를 삼켰고, 사람들은 파도에 취했다. 음악과 바다, 도시와 예술이 교차하는 그 현장을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또 사회적 문화 생태를 지켜보는 관찰자로서 기록해본다.티켓 예매는 전쟁이었다. 조기 매진으로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공연 당일 오전, 티켓 부스에서 팔찌(손목 밴드)로 교환하기 위한 인파는 이미 축제의
선거가 지나간 마을에 정적이 깃든다. 바람은 소리를 삼키고, 사람들은 눈빛을 거둔다. 보수의 심장이라 불리던 이곳에선 그 많던 확신과 자부심이 침묵의 강을 건넜다. 움직이고 있으나 멈춘 듯한 이 적막은 단지 패배의 여운이 아니다. 더 깊고 오래된 질문이 고요 속에서 고개를 든다. 무엇이 옳았는가. 무엇을 지켰는가. 그리고 무엇을 잃었는가.수십 년을 지켜온 정치적 확신과 뚝심은 낯선 표정으로 바뀌었다. 선거 결과는 단지 숫자가 아니다. 마음의 균열을 드러낸 사건이다. 체념인지 자책인지 모를 눈빛이 거리를 맴돈다. 말은 오가지 않지만
정의는 고대 이래 인간 사회의 질서를 지탱해 온 핵심 개념이다. 그러나 정의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정의는 항상 타자, 곧 부정되어야 할 악과의 관계 속에서만 발현된다. 이때부터 정의는 자기완결적 윤리가 아니라, 상대를 설정함으로써 구조화되는 정치적 언어가 된다.악은 정의를 작동시키는 장치다.현대정치에서 이 메커니즘은 ‘진영’이라는 방식으로 고도화된다. 진영은 윤리적 구분선이 아니라 정체성의 경계선을 긋는 작동체계이다. 어느 한 집단이 스스로를 ‘정의의 편’으로 위치시킬 때, 그것은 논리나 사실의 문제라기보다 감정과 소속의
열차는 멈춰 서 있다. 출발 시각은 지나고, 승객들은 모두 탑승을 마쳤다. 객실 안은 팽팽한 긴장으로 가득하다. 시계를 보는 사람,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 조용히 기도하는 사람도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기관사다. 그러나 기관실은 여전히 비어 있다.두 명의 기관사 후보가 있다. 한 사람은 지난 철로의 굴곡을 몸으로 기억하는 이다. 긴 시간 책임을 지며 체계를 익힌 인물이다. 또 한 사람은 강직하고 명료한 화법으로 주목받는다. 체제의 구심으로 상징성을 띠며, 정비된 질서를 강조한다. 두 사람 모두 기관사의 자격을 주장하지만, 아직 합
정치는 언제나 급격하게 변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진실은 자주 잊혀지거나 왜곡된다. 오늘날 우리는 그 진실을 다시 마주하게 된 순간에 있다. 대법원이 내린 파기환송 판결은 그동안 격렬하게 일었던 정치적 논란 속에서 진실의 중심을 다시 세운 것이다. 이 판결은 단지 법적 논리를 넘어서, 정치적 의미와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사법의 결정은 단순히 하나의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기준, 가치, 그리고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다. 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법원이 단순히 법률
5월 1일, 우리는 단순한 법적 판결을 넘어서 정치의 본질을 가르는 순간을 맞이한다.그날의 판결은 한 사람의 운명만 결정짓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서 드러날 정치적 시스템과 권력의 본질은 대한민국 정치의 미래를 가늠할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이 판결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정치적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폭풍의 중심에서,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그날의 판결이 정치적 대격변의 서막이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그 선택이 무엇을 가져올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진다. 그러나
이철우 경북지사가 비록 국민의힘 대선 경선에는 실패했지만 이번 출마는 단순한 정치적 선택이 아니다. 초고령화와 인구 감소, 지역소멸 등 사라져 가는 지방의 절규였고 중앙 중심 국가 구조에 맞선 결연한 외침이다.무엇보다 그의 출마는 말보다 실천을 앞세운 정치인의 진정성 있는 메시지였다. 지역의 목소리가 외면당해온 현실에서 그는 그 자체로 지방의 ‘존재감’을 증명했다. 정치적 계산보다 시대적 사명을 택한 그의 선택은 지방 정치인의 새로운 역할을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지방이 위태로운 상황에는 누군가는 반드시 앞장서야 한다. 이 지사는 그
정치는 결단의 예술이자, 기다림의 미덕이다. 민주주의가 다수결의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해도,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사는 단순한 표결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럴수록 오래 생각하고, 깊게 숙의하고, 신중히 합의해야 한다. 이런 전통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된 지혜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동양의 신라 화백회의와 서양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콘클라베다.신라의 정치 체제는 ‘성골’이나 ‘진골’ 같은 골품 제도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끝없는 충돌 속에서도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화백회의’라는 정치 메
정치는 늘 기대와 실망 사이를 오간다.그러나 지금처럼 정국의 나침반이 고장 난 듯 갈피를 잡지 못하는 시기는 드물다. 조기 대선 정국이 가시화되며, 정치의 본질은 흐릿해지고, 오히려 ‘정치 아닌 것들’이 정치의 중심에 들어섰다. 이름 없는 권력의 그림자, 사라진 책임, 반복되는 정쟁. 그 자리에 남은 것은 갈등과 무기력이다.최근의 정국은 정치의 변곡점을 넘어, 정체성의 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새로운 세력의 부상과 구체제의 해체가 동시에 일어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오히려 과거의 유령들이 이름만 바꾼 채 반복 출현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