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늄이라 쓰고, 페라고늄(Pelargonium)이라고 읽는다. 이름이 달라지면 세상이 조금 달라 보이는 것처럼, 꽃도 나도 언어 속에서 다른 빛을 띤다. 그러나 향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다. 불리는 방식이 달라도, 햇살 아래 피어나는 생의 결은 같다. 제라늄이라 부르든, 페라고늄이라 부르든. 결국 흩어진 향과 빛 속에서 자신을 지켜 나간다.엄마는 제라늄을 좋아하셨다. 장미나 국화를 키우면 좋을 텐데 왜 하필 제라늄일까 의아해했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곱고 정연해야 하기에. 그래서 꽃이란 고요하거나 화려해야 한다고 믿었다. 제라늄은 국
비 오는 날, 산책길을 걷다 우연히 한 그루의 나무 앞에 멈춰 섰다. 두 개의 가지가 잘려 나간 자리에서 흰색 수지가 길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치 오래 참아온 눈물이 껍질을 뚫고 흘러나오는 듯했다. 그 앞에서 쉽게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그날따라 수지의 눈물자국이 가슴에 오래도록 남았다. 빗방울이 수지와 섞이며 흘러내릴 때마다, 나무는 말없이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지가 잘려 나간 흔적은 검게 움푹 패어 있었고, 그 중심에서 하얀 눈물이 굳으며 흘러내리고 있었다.도끼나 전지가위가 나무의 몸에 닿았을 때 몸을 얼마나 움츠렸을
그날부터 내 몸에서 잎사귀가 피었다들은 척 할 때마다 몸에서 가지가 뻗었다사람들의 입을 잎으로 만드는 재주가 생겼다귀는 나에게 감옥이었다시간이 지날수록 잎은 무성한 그늘을 만들고그 그늘 아래서 혼자만의 주파수로 세상을 읽었다세상은 나와 주파수가 맞지 않았다자주 넘어졌다나에게 닿지 않은 소리, 바닥에 나뒹굴었다더듬었지만 연기처럼 사라졌다사라지는 것들을 잡으려다 넘어질 때마다먹먹해지는 꿈들을 하나씩 접었다접힌 꿈들은 귀가 되었다접힌 채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순간부터내 몸의 잎들이 커다란 귀를 세웠다활자중독 무성한 초록의 귀를 가졌다◇수상
문장은 언제나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그래서 사람들은 그 아래선 하나를 긋는다밑줄은 말의 그림자,이미 지나간 의미를다시 불러들이는 얇은 다리다누군가는 사랑 밑에 긋고,누군가는 후회 밑에 긋는다가끔은 지우지 못한 이름 밑에,혹은 아직 끝나지 않은 문장 밑에.시험공부의 잉크 냄새 속에서밑줄은 이해의 표식이 아니라두려움의 손가락이었다이제 나는 밑줄을 긋지 않는다대신 살아 있는 것들 아래눈길을 한 번 더 준다밑줄은 결국세상을 읽는 방식이 아니라멈춰 서서 다시 보는 법이었다한 사람의 생애를 펼쳐 보면가장 진한 밑줄은 언제나사랑과 상처의 경계에
차가움과 뜨거움이 번갈아 지나간나무의 움푹한 몸통은 온돌방이었다그냥 두면 터져 버릴 거 같은 가을은불티로 매달린 잎들을 데리고 끈적거리는 탐욕 속으로먼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혼자여서, 거부할 수 없는아프거나 젖을수록 더 서러워지는구르몽의 시집 낱장을 헤적여여백 많은 페이지 속에 한 줄 적막 새겨넣는다헤진. 신발 끌고 돌아오는 나그네처럼끝내는 허탈이겠지만성큼 다가온 추위에 쩍쩍 갈라진 몸을너에게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이런 나를 감싸주지 못한 너는거부하는 나를 신비롭게 바라보았을 테지남긴 한점 불씨 같은 홍시 하나로품 안에 다시 돌아온
원로소설가 김주영 작가가 제12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시상식 및 학술포럼에서 몽골군의 전쟁 방식과 말 문화의 특성을 예로 들며 “문학은 평생의 고행이며, 겸손과 끊임없는 노력이 작가의 조건”이라고 강조했다.김주영 작가는 시상식에 이어 열린 문학 특강에서 징기스칸과 몽골군의 전략을 비유 삼아 작가 정신과 문학적 태도를 짚었다. 김 작가는 “동양인으로 유럽을 제패한 것은 징기스칸이 아니라 그의 셋째 아들”이라고 바로잡으며, 몽골군이 어떻게 거대한 유럽 세력을 돌파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한 뒤, 이를 문학 수행 과정과 연결해 풀어냈다
‘제12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시상식이 22일 소설가 김주영의 고향인 청송군 진보면 ‘청송객주문학관 다용도관’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국내외 문인 및 문학 지망생을 대상으로 진행된 청송객주문학대전 공모전 시상식에는 한국선 경북일보 사장, 이승택 청송부군수, 심상휴 청송군의회 의장, 신효광 경북도의회 농수산위원장을 비롯해 청송군의회 의원, 수상자와 가족 등 100여 명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올해 문학대전은 양적·질적으로 모두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 2079편, 수필 876편, 단편소설 183편 등 총 3138편이 접수되
돌확에 담긴 시간의 온기오랫동안 제 자리를 지켜온 마당 한켠의 돌확을 바라보다 문득 떠오른 제 마음속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어 감사한 마음입니다.돌확은 언제나 우리 집의 조용한 그릇이었습니다. 겉으론 아무 일 없는 듯 묵묵했지만, 그 속에는 어머니의 손길과 절구 내리던 소리, 새벽 공기의 풋 내음, 굳은 손마디가 어루만진 시간이 겹겹이 내려앉아 있었습니다.돌확 앞에 서면 손끝에 밴 짠 내와 등을 타고 흐르던 겨울 햇살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곤 합니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던 자리였지만, 그곳에는 온기와 차가움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등에 와 닿는 햇살의 무게가 한결 가볍다. 계절을 먼저 알아차리는 건 의식이 아닌, 감각이다. 입술 언저리에 닿는 바람결이 까슬하다.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옆구리에 터를 잡을 때면, 나는 돌확과 처마가 잇닿은 풍경 속에 조용히 선다.물방울 하나가 돌확 표면을 툭 치는 첫소리가 들린다. 몇십 년이 지났는데도 움푹 파인 제자리를 기억하는 것일까. 물방울은 나직나직 돌을 토닥인다. 바닥에 깔리는 젖은 음은 금세 사그라지지만, 곧 길고 얇은 여운으로 가슴을 미세하게 두드린다.또 한 방울, 다시 한 방울. 이번엔 돌확 가장자리에 파장을 일으키
올해로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은 제12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연륜에 어울리게 수필 분야에서는 876편의 작품이 응모하였고, 심사위원들은 예심을 통과한 45편의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작품들은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보이면서 수필 문학의 앞날을 밝게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개인의 내밀한 존재의 모습을 파고드는 작품이 많아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특성은 많은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이 사물이나 대상으로부터 일정한 이미지를 이끌어 내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능력은 물질의 실재성에 작가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심히 받아든 문자에 마음이 무너졌습니다.당선 문자였습니다. 저는 사람 많은 식당에서 그만 울고 말았습니다.소설을 쓰면서 늘 고민이 자리 잡은 머릿속이, 공허할 것만 같던 애씀이 인정받은 것 같아 너무 기뻐 눈물이 났습니다.더 빠르고, 좀 더 자극적으로 혹은 극단으로 치닫는 그런 소설을 써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지던 요즘입니다. 어쩌면 지식이 다인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 말입니다. 앎의 세상에 눈물을 묻히고 생각을 펼쳐 약한 것을 소중히 담아내는, 사람
눈이 아프다. 눈을 세게 비볐다. 오늘 아침에 습관처럼 들른 안과에서 의사가 말했다. 여전히 무언가 꿈틀대는 느낌이 드나요? 벌써 십년인데. 털어버릴 때도 된 것 같은데, 라고. 나는 의사를 쳐다보며 살짝 웃었다. 십 년 동안 나를 봐 왔으면서 선생님은 왜 벌써, 라는 단어를 썼는지 의아했다. 십 년이면 어떤 일이라도 무디어져야 한다는 듯이. 삼천육백오십일이면 어떤 아픔도 흔적으로만 남아야 한다는 듯이.눈이 점점 아릿해왔다. 눈알을 밀어내는 무지근한 통증이 시작되었다.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속은 온통 핏빛이었다. 핏빛 속 시뻘건
제12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이 화려한 막을 열었습니다. 신춘시즌이 다가오며, 잠 못 이루며 집필에 몰두했을 많은 문청들에게 수고하셨다는 인사말을 먼저 드리고, 특히 해외에서 응모해주신 분들께 기운찬 박수를 보냅니다.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참여로 단편소설, 시, 수필 등의 세 개 장르에서 총 편수 3,138편의 응모 원고가 들어왔습니다. 시 2,079편, 수필 876편, 소설이 183편이었습니다. 문학대전에 응모하려고 작품을 읽고 또 읽으며 수정을 거듭했을 작가들의 열정 어린 모습이 눈에 선했습니다. 문학상 대상을 공동 수상하게
배송이 완료됐다는 문자였다. 며칠 전 온라인에서 주문한 복숭아가 도착한 것이다. 시장까지 가지 않고 내 방에 앉아 클릭 한 번으로 원하는 물건이 배달되는 일은 이제 도시인의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종국엔 인간을 무력하게 만들 시스템일지언정 애초에 나는 운전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재래시장이나 마트서부터 복숭아 상자를 머리에 이고 올 자신도 없었다. 이미 무력한 인간 부류인 내가 이 빈틈없이 편리한 배달 문화를 포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클릭 한 번에 공산품도 아닌 생물이 내 집 앞에 도착했을 뿐 아니라 그 향기로 입 안에 침
숫자 속에 사람이 있다투구를 쓰고 욕받이가 되었다 벽 뒤에 숨어 회색 정장 입은 당신을 위해달리는 경주마눈으로 보이는 그를 채워야 하고 외면하기 어려운통장에 찍히는 그가 줄어든다면납작한 숫자를 높이기 위해 달라지는 나의 페르소나수치 속에 웃음과 눈물로 굽어진 이야기들이 매몰되어 버리고 끝내 이름을 잃었다유모 군은 철근 내리는 작업 중 추락 이모 군은 엘리베이터 수리 중 승강로에 끼여 사망A 군 ㄱ 군 옆에 사고의 언어는 괄호신문 한 귀퉁이에 낯선 이방인이 스치고 퇴근하지 못하는 숫자는 쌓여 가고실적만으로 서열화되는 세상부조리가 유언
노란 M자가 박힌 출입문을 열고 나는 종업원부터 살핀다. 점심시간을 맞은 종업원은 지금 한창 바쁘다. 식당 안에는 앉을 자리조차 없이 손님으로 꽉 찼다. 나는 자연스럽게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걸고 웃옷을 벗어서 재빠르게 윗몸을 씻는다. 옷은 물비누를 묻혀 대충이라도 빤다. 냄새를 지워야 그나마 노숙인의 티를 감출 수 있다. 그렇게 빤 티셔츠는 땡볕에 나가면 금방 마를 것이다. 처음엔 업주나 종업원에게 쫓겨난 적도 있다. 이제는 쫓겨날 만한 곳을 피해 눈치껏 볼일을 본다. 그리고 바야흐로 출근한다. 카지노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원의
큰아들이 넓은 운동장을 보자 정신없이 내달렸고 동생이 고함을 지르며 뒤따랐다. 양철은 자신의 아이들이 뛰는 모습을 보며 천천히 걸었다. 두류야구장을 몇 년 만에 와보는 것인지 영철은 순간 계산이 되지 않았다. 우뚝 솟은 타워가 보이는 야구장에서 두 아들이 축구공을 패스하며 뛰어다녔다. 아빠가 축구공을 높이 띄워 차자 두 아들은 탄성을 질렀다. 영철은 두 아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투영했다. 시간은 타워를 넘어 과거로 이끌었다.영철은 동네 구멍가게로 들어섰다. 냉장고에서 쭈쭈바를 꺼내 주인아저씨에게 다가갔다. 백
1내가 머무는 세계로 어스름이 진군해 오고 있다. 검은 군대가 몰려오기 전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카멜레온 블루 매니큐어가 마르길 기다린다. 창밖엔 다음 큐를 기다리는 군악 연주자들의 날랜 눈빛처럼 마주 보이는 집마다 하나둘 불이 켜지고 있다.곧 사람들은, 악몽이나 죽음처럼 혹은 낱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리에 끼어 먼 곳으로 날아가는 철새의 날개처럼 아득하고 끄무레한 밤을 맞이해야 한다. 형체도 없는 밤,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버린, 밝은 날의 환하던 빛에 안겨 있을 때는 미처 상상하지 못하는, 아득한 밤.타닥타닥 자판을 두드려 한
글은 엉덩이로 쓴다.알을 품고 있던 윗매듭 비둘기 새끼가 막 태어나던 순간 고국에서 날아온 수상 소식은 기적일까요, 우연일까요? 새는 엉덩이로 부화시킨 네 마리 새끼를 저는 엉덩이로 쓴 새로운 이야기를 각각 세상에 선보이게 된 건 분명 기적이겠지요. 새와 제가 받은 선물은 엉덩이의 열매입니다.유리로 차단된 몇 미터 앞의 보틀 추리 위에 얹힌 둥지를 바라보며 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애가 탄다! 애가 타!”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는 새의 눈을 뚫어보면 새는 어지러이 눈을 피하다 결국 제 동공에 멈추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반짝이는 주점 입구는 펄 립스틱을 잔뜩 바른 입술 모양이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빛바랜 붉은색 카펫이 깔려 있었다. 흐리터분한 적색 계단은 굴곡진 목구멍 주름과 비슷했다. 오랜만에 만난 계원의 대학 동창은 호기를 부렸다.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듯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왔다. 반투명 유리문이 열리자 호화로운 샹들리에가 회색빛 밖과는 다른 세상임을 알렸다. 붉은색과 황금빛으로 치장된 내부는 호화스럽지만, 품위와는 상관없게 꾸며져 있었다. 친구는 멈칫하는 계원의 팔을 잡았다.“걱정하지 마. 내가 쏜다니까.”담당 상무라는 건장한 체격